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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인문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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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컴의 면도날 화장실에 붙어 있는 교훈 같은 이야기지만, 천천히 읽어 보니 일상에서 기억해야 할 것들이다. 여기서 말하는 노인은 늙은 사람이고, 어르신은 주위로부터 존경받는 노인이다. - 노인은 몸과 마음이 세월이 가니 자연히 늙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어르신은 자신을 가꾸고 젊어지려고 스스로 노력하는 사람이다. - 노인은 자기 생각과 고집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고, 어르신은 상대방에게 이해심과 아량을 베풀줄 아는 사람이다. - 노인은 상대방을 자기 기준에 맞춰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이고, 어르신은 좋은 덕담을 해주고, 늘 긍정적으로 이해해 주는 사람이다. - 노인은 상대에게 간섭하고, 잘난체하며, 지배하려는 사람이고, 어르신은 스스로를 절제할줄 알고, 알아도 모른체 겸손하며, 느긋하게 생활하는 사람이다. - 노인..
교육 혁명을 논할 때이다. 이렇게 온라인 시대가 지속된다면 그리고 여전히 교육의 중심이 ‘지식의 전달’에 한정된다면, 디지털 에듀테인먼트에 최적화된 소위 ‘강의의 신’ 한두 사람으로 교육은 충분할 가능성이 크다. 어느 교사는 이번 사태를 겪으며 아이들이 학교에 ‘와주고 있었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었다고 토로했다. "아이들은 학교 없이도 아무렇지 않게 잘 지내더라는 거죠. 기껏해야 애들이 학교에 오고 싶은 이유는 친구와 놀이고, 학부모들도 세끼 식사와 돌봄이 가장 현실적인 이유더라는 겁니다. 과연 코로나 이후의 세계에서 학생들에게 학교는 꼭 와야 하는 곳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자신 없습니다." 국가가 개입하는 전 국민 대상의 교육기관으로서 학교의 기원을 들여다보면 이미 그 시발점에는 (학대나 아동노동으로부터의) 아동 보호와 (..
욕망도 재구성되어야 한다. 오늘도 김기석 목사님의 다음 이야기를 공유한다. 목사님으로부터 힘을 얻는다. "유토피아는 ‘없는 장소’라는 뜻이다. 오로지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곳이라는 말이다. 조선 시대의 화가 안견이 꿈속에서 거닐었다는 무릉도원이든, 제임스 힐턴의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에 나오는 샹그릴라든, 장자가 꿈꾸었던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이든 다 마찬가지다. 그런 장소에 대한 꿈은 아름답지만 슬프다. 그 꿈에 담긴 절실한 소망은 역설적으로 현실의 척박함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먹고 살기 위해서 진동한동 달리느라 사람들은 자기를 돌아볼 여유를 누리지 못한다. 누리지 못하는 삶은 그늘로 남는다." 욕망이라는 것이 우리 생존의 동력이지만, 욕망의 벌판에서 질주를 거듭하다 보면, 어느 순간 우리 자신이 고립돼 있음을 자각할 때가 온..
대한민국은 SNS 공화국이다. 인터넷 공간에서 제기되는 선정적인 의혹만이 사실이다. 그 의혹이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외로움을 달래 주고 부러움을 경감해주면 굳건하게 진리가 된다. 이게 IT공화국의 역설이다. 그 사실의 진위와는 상관 없이, 대중이 그렇게 생각하면, 그것은 정의이고 진실이다. 그런 일에 휘말린 당사자는 자신이 그런 의혹에 비춰진 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번거롭게' 증명해야 한다. 슬픈 일이다. 인간은 좀처럼, 자신이 경험한 인간을 신뢰하지 못하고, 남들이 제기한 소문을 진리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우리 대부분은, 자신의 판단보다는, 대중이 떠드는 그것이 정의라고 믿는다. 인간은 좀처럼, 어떤 사안에 대해 숙고하지도 않고, 숙고를 통해 자신만의 의견을 도출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예수가 제자들의 정신적인 수준을 알아..
정신문명과 물질문명은 하나다. 오늘 아침 하려는 사유는 지난 주에 내가 좋아하는 최진석 교수의 글을 보고 정리한 것이다. 나도 얼마 전까지 오해하고, 잘 못 이해했던 것인데, 이번에 균형감을 찾았다. 세계 언론은 대한민국이 코로나-19 방역을 잘 했다고, 선진국에 진입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선진(先進)이라는 말을 부정한다. 선진이니 후진이니 하는 일은 경쟁을 통해 '줄 세우기'를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매우 비인간적인 것으로 보는 심리이다. 최진석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경쟁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 특별하게 되고 싶은 욕망을 품기보다, 경쟁을 부정하며 일반성의 단계에서 평범하고 싶어하는 것은 지적으로 강인하지 못하고, 감성적으로 유약하기 때문이다. 나도 감정의 문제와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힘을 혼동하였다. 두 영역을 나..
머뭇거림 어제 나는 우리가 사랑 가운데 서로를 대하기 위해 필요한 태도가 머뭇거림이라는 시몬느 베이유의 말을 인용했다. 속절없이 흐르는 세월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머뭇거림은 답답함으로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머뭇거림 속에는 함부로 말하거나 판단하거나, 응대하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움이 담겨 있다. 지나칠 정도로 단정적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이 있다. 자기도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존재임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다. 확신은 고단한 생을 지탱해주는 든든한 기둥이지만, 그 확신이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폐쇄성에 갇힐 때는 아집에 불과할 수 있다. 오늘 아침 다시 노자의 제45장을 불러낸다. 노자는 다음 5 가지 '고졸(古拙)의 멋' 세계, 즉 결(缺), 충(沖), 굴(屈), 졸(拙), 눌(訥)의 모습을 보여준다. 노자는..
인간은 자유인이거나 노예이다. 그럼 나는 자유인인가? 아니면 노예인가? 여기서 말하는 자유인은 자기 확신과 자기 존경으로 탁월(자유 자재함)을 수련하여 어제보다 나은 나를 만드는 사람이다. 그 반대로 어제와 똑같이 주위의 인정에 목마른 사람은 자발적인 노예이다. 지난 주 배철현 선생의 을 읽고, 성찰한 내용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우리는 탁월해지는 것이 아니라. 탁월함이 드러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탁월하기 때문이다. 그 탁월함이 드러나지 않는 것은 자신들의 탁월함을 드러나지 못하도록 막고 있기 때문이다. 배철현 선생에 의하면, "소극적인 의미의 자유는 타인으로부터 구속을 받지 않는 상태이지만, 적극적인 의미의 자유는,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 것을 지금-여기에서 몰입하는 기운이다." 이러한 몰입하는 기운은 자기 분야에서의 '탁월', '자유 자재함'에서 나온다. 그건..
인서울하지 못한 지잡대의 보수화는 다르다. 6년 전 오늘 아침에 공유했던 글입니다. 희망을 주어야 하는데, 사회가 꼴이 아니다. 나 자신부터 밀려난 자이기에 능동적으로 택한 삶의 문법은 아니지만, 많은 성찰과 배움으로 나만의 삶에 충실하며 남은 삶이라도 가장 나답게 내 삶의 주인공으로 살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인서울 하지 못한 지잡대는 온전한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온전한 인간이 아니라는 권위적 목소리에 잘 순응했기 때문이다. 비단 사회이슈에서만 그럴까. 강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대체로 방관자적 태도로 뒷자리와 가장자리를 고수하려는 이들에게 ‘너희들이 바퀴벌레냐, 벽에 가서 달라붙게’라고 웃픈 농담을 하지만, 생애 대부분을 ‘들러리’ 역할에 충실했던 이들의 태도는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들러리에게 이 사회를 이끌어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