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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인문에세이

대한민국은 SNS 공화국이다.

인터넷 공간에서 제기되는 선정적인 의혹만이 사실이다. 그 의혹이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외로움을 달래 주고 부러움을 경감해주면 굳건하게 진리가 된다. 이게 IT공화국의 역설이다. 그 사실의 진위와는 상관 없이, 대중이 그렇게 생각하면, 그것은 정의이고 진실이다. 그런 일에 휘말린 당사자는 자신이 그런 의혹에 비춰진 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번거롭게' 증명해야 한다. 슬픈 일이다. 인간은 좀처럼, 자신이 경험한 인간을 신뢰하지 못하고, 남들이 제기한 소문을 진리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우리 대부분은, 자신의 판단보다는, 대중이 떠드는 그것이 정의라고 믿는다. 인간은 좀처럼, 어떤 사안에 대해 숙고하지도 않고, 숙고를 통해 자신만의 의견을 도출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예수가 제자들의 정신적인 수준을 알아보기 위해 던진 질문은 이것이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다른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예수에 관한 소문을 말하지만, 베드로는 자신만의 확신을 말한다. 베드로만 예수라는 육체에 숨겨져 있는 신성을 발견했다.

난 산전수전(山戰水戰) 다 겪었다. 산전수전은 동물과 같은 인간을 비로소 신적인 인간으로 개조하는 스승이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시도하는 사람들은 항상 오해와 질시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 순간같은 인생을 살면서, 자신에게 의미가 있고, 타인들에게 아름다움이 되게 하면서 사는 삶을 추구하는 사람은 언제나 오해의 대상이다.

이때 남들보다 앞서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려면 무엇보다 자신을 믿어야 한다. 타인은 그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기에 앞산 자들은 언제나 불안하고 외롭다. 세상은 오해 받는 사람들이 진보 시킨다. 오해 받는 인간이 자신의 원대한 꿈과 열정을 자신의 몸으로 실천하면, 그것이 수용되던지 혹은 수용되지 않던지 상관 없다. 그것이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거리낌이 없다면, 그 진실은 통하기 마련이다. 나도 그렇게 믿는다.

우리는 곤경에 빠지면, 제대로 생각할 수 없다. 그때 누군가 호의로 잡아주면 큰 힘이 된다. 나도 누군가 도움을 원하면 호의로 도와 줄 테다. 감정적일 때, 이성적으로 생각하게 해 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래 같이 사유의 시선을 높여 주고 싶다. 사유의 시선을 높이면, 우리는 삶을 운용하는 실력도 좋아진다.

지금 겪고 있는 일이나 싸움을 세계 전체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시선이 낮은 사람이다. 세상은 생각보다 넓다.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야 한다. 예컨대, 거실에 TV를 없애면, TV를 중심으로 만들어졌던 권력 관계나 시간을 쓰는 내용도 함께 사라져서 새로운 가정, 새로운 풍경으로 바뀐다. 변화를 이런 식으로 인식하는 것을 '인문적 통찰'이라고 한다.

인문정신은 ‘전진하는 분석’과 ‘후퇴하는 종합’, 즉 통찰하는 정신이다. 예리한 관찰력으로 사물을 꿰뚫어 보는 것이고, 처음부터 끝까지 총체적으로 모두 훑어 두루 살펴보는 것이다. 인문 정신은 우리의 삶과 세상을 잘 볼 줄 알게 해준다. 통찰은 두 가지 의미이다. 영어로 말하면 insight, penetration이고 overview이고, 한문으로는 洞察이면서 通察이다. 이러한 통찰의 힘을 기르는데 최고의 자양분이 인문학, 후마니타스(humanitas)이다. 진정한 통찰의 힘은 현실의 팽팽한 긴장감 없이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인문학에서 학(學)을 빼고 '인문(人文)'하면 이해가 쉽다. 인문이란 말 그대로 하면 인간의 무늬와 인간이 그리는 무를 말한다. 인문과 함께 우리가 쓰는 말 중에는 '천문(天文)-하늘이 그리는 무늬'이란 말이 있다. 그리고  '천지인(天地人)'을 생각한다면 '지문(地文)-땅이 그리는 무늬'이라는 말도 사용할 수 있다.

천문과 지문은 '이(理)'가 지배한다면, '이'란 '옥돌에 새겨진 무늬'이다. 인간과 별 상관 없이 자연이 그리는 무늬인 것이다. 이에 비해 인문은 인간에게 새겨져 있고, 인간이 관여하는 무늬라면, 인문은 '이'보다는 '문'에 방점이 찍힌다. 인간은 좀 더 자유롭게 자신의 무늬를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인간도 하나의 큰 무늬, 커다란 결 위에서 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 인간 각자는 하나의 커다란 결속에서 움직이지만 각각 '다름'을 가진 사람일 뿐이다. 그래서 인문이란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 근본적인 철학적 요소들과 인간 중심의 근원적인 사상을 다룬다. 그 이유는 좀 더 나은 삶, 지혜로운 인생을 살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나만 잘 살자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인간끼리 잘 살자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힘든 처지에 놓인 그 사람이 잘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먹는 것이 사람 사는 맛이고, 이런 것을 '인문정신'이라고 한다. 요즈음 관심 받는 것도 관심을 주는 것도 꺼리는 각박한 요즈음, 우리에게 인간에 대한 따뜻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는 것이 인간들이 그리는 '인문정신'이다. 인문정신은 지식, 즉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그저 따뜻한 열린 마음에서 나온다. 그런 마음으로 생각의 틀을 만드는 것이다. 이 생각의 틀이란 세계관이다. 세계관이란 세계와 관계하는 방식이다.

현재 우리는 이론이나 학술보다는 '진영'의 정치 공학이 우선이다. 이렇게 되면 진영만 바꾸는 일이 반복되고, 학술과 문화가 국가 운용과 별 상관 없이 존재한다. 삶과 지식이 분리되어 있는 현상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인문학과 인문정신이 따로 논다. 인문적 지식을 기능적인 이해의 대상으로만 삼지 내 삶에 충격을 주는 송곳으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약하다. 높은 수준의 지식을 송곳으로 삼을 줄 알아야 한다. 송곳이란 말을 하니까 사자성어 '낭중지추(囊中之錐)'가 생각난다. 날카로운 송곳은 주머니 속에 있어도 날카롭다는 뜻이다. 주머니 안에서도 들어 나는 것처럼, 인문정신도 스스로 드러난다. 지난 글들은 https://pakhanpyo.blogspot.com 을 누르시면 더 보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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