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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홀로 있어야 하는가? (2) 2708.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5월 3일)오늘 아침에 만난 문장이다. 지금은 마이클 해리스의 >를 읽고 있다. "인간은 진사회성(eusocial)을 진화시킨 극소수에 속한다. '진사회성'이란 말은 개미학자 에드워드 윌슨이 여러 세대에 걸친 자기희생적 동물 계통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이다. 간단히 말하면, '진사회성'은 두 세대 이상 구성원이 함께 살면서 협동하고 이타적 행동을 하는 것이다. 1970년대 들어 미국의 하워드 에번스(Howard Evans), 찰스 미세너(Charles Michener), 에드워드 윌슨(Edward Wilson)과 같은 진화학자들은 번식 행동을 중심으로 사회성을 분류했다. 즉 부모의 자식에 대한 투자, 신구 세대의 거주지 공유, 자손에 대한 협동 돌봄,..
5월의 즐거운 오후 한나절 산다는 것은/오세영 산다는 것은 눈동자에 영롱한 진주 한 알을 키우는 일이다. 땀과 눈물로 일군 하늘 밭에서 별 하나를 따는 일이다. 산다는 것은 가슴에 새 한 마리를 안아 기르는 일이다. 어느 가장 어두운 날 새벽 미명(未明)의 하늘을 열고 그 새 멀리 보내는 일이다. 산다는 것은 손 안에 꽃 한 송이를 남몰래 가꾸는 일이다. 그 꽃 시나브로 진 뒤 빈주먹으로 향기만을 가만히 쥐어 보는 일이다. 산다는 것은 그래도 산다는 것이다.
사는 건 "그 길"을 찾는 과정 속 여정일 터이다. 6년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내 안에는 여러 자아가 산다. '여러 묶음의 자아'가 있다. 나는 '그 자아들'을 세지않는다. 그 자아들이 가는 '그 길'은 말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도가도 비상도이다. 그래, 사는 건 "그 길"을 찾는 과정 속 여정일 터이다. 서두름이 잦아든다. 길 위에서/이정하 길 위에 서면 나는 서러웠다. 갈 수도, 안 갈 수도 없는 길이었으므로 돌아가자니 너무 많이 걸어왔고, 계속 가자니 끝이 보이지 않아 너무 막막했다. 허무와 슬픔이라는 장애물, 나는 그것들과 싸우며 길을 간다. 그대라는 이정표. 나는 더듬거리며 길을 간다. 그대여, 너는 왜 저만치 멀리 서 있는가 왜 손 한번 따스하게 잡아주지 않는가 길을 간다는 것은, 확신도 없이 혼자서 길을 간다는..
자아의 실현이나 완성은 장소에 좌우 되지 않는다. 5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어제는 여러 나라의 '주님'을 모셨다. 낮에는 중국 '주님'을, 저녁에는 세계 '주님'과 놀았다. 그래 오늘 아침은 머리가 무겁다. 그러나 창을 여니 맑은 "봄날"이다. 5월은 노는 날이 많다. 오늘도 아무 일정이 없다. 그래 방심(放心)한 것이다. '마음'이 방학을 맞은 거다. 그래도 일상을 지배하자는 마음이 습관이 되어, 눈을 뜨자마자 이를 닦고, 혀를 닦았다. 그리고 미지근한 물을 마시고 잠든 내 세포들을 깨웠다. 그리고 오늘을 위한 최선의 전략을 짠다. 나는 오늘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배철현 선생처럼, 나도 오늘을 나에게 만족스럽도록 만들어주는 격식(格式), 즉 시간표(時間表)를 만든다. "하루라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주어지지만, 그 시간..
"같이 걸어가는 사람의 가치를 기억하라." 4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일요일마다 만나는 짧지만 긴 여운의 글들이다. 이런 글들은 책을 한 권 읽은 것과 갖다고 본다. 이런 글들은 나태하게 반복되는 깊은 잠에서 우리들을 깨어나도록 자극을 준다. 그리고 내 영혼에 물을 주며, 근육을 키워준다. 한 주간 모은 것들 중 매주 일요일 아침에 몇 가지 공유한다. 지난 글들은 https://pakhanpyo.blogspot.com 을 누르시면 보실 수 있다. 오월 첫번째 일요일이다.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를 보면, 낙타를 데리고 사막을 건너는 대상들이 잘 가다가, 멀리 오아시스의 신기루를 보면 그 때부터 갈증을 느끼기 시작한다. 단지 신기루이고 아직도 몇 십 킬로를 더 가야 하는 데 말이다. 나도 서울에서 대전을 차를 ..
건강한 사회는 창피함, 아니 부끄러움(恥)을 아는 사회이다. 3년전 오늘 글입니다. 와인 파는 인문학자의 인문 일기매주 월요일은 이야기를 하는 날로 정했다. 우리는 이야기 하려고 사는 줄 모른다. 누구나 자기 자심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 실제로 누구에게나, 아무리 사소해 보일지라도 자기 자신만의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이 이 삶의 엄연한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고, 그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래서 자신만의 이야기가 없거나, 이야기를 할 수 없으면 행복할 수 없다. 그래 우리는 서사의 힘을 길러야 한다. 최진석 교수는 "논증이나 논변에 빠지는 사람보다 이야기 하는 사람의 영혼이 한 뼘 더 높다. (…) 치밀하게 짜진 논변의 숲에서 사람들은 자신을 잃는다"고 말했다. 논문 같은 논증적인 글에서는 영혼이 건조하고, 자신을 ..
나는 교환불가능한 단독자이다. 사진 하나, 문장 하나누군가가 자신을 하나로 규정지으려 한다면 맞서 싸워야 한다. "나는 그것만 아니에요!"라면서, 누군가 나를 하나로 규정한다면, 나는 지배당하는 거다. 나의 여러 면을 보여주어야 한다. 누군가를 하나로 규정하면, 특수한 것으로, 바꿀 수 있는 것으로 규정하면 '폭력'이다. 예컨대, "여자니까 또는 술 파는 사람이니까"라고. 나는 교환불가능한 단독자이다. 나는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대체불가능한 '나'이니까. 이게 인문학이 말하는 '생귤래리티(singularity)'이다. 자신만의 삶을 살아내는 자이다. 그런 사람만이 타인의 설움과 기쁨에 공감할 수 있다.
절제는 자기를 작게 가지는 것이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4월 30일)속절없이 "잔인한" 4월이 다 갔다. 오늘이 4월 30일, 4월의 마지막 날이다. 영국 시인 엘리엇은 자신의 시 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썼다. 이렇게 시작한다. ​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 “ ​ 왜 "잔인한"가? 4월이 잔인한 것은 마치 겨울잠을 자듯 자기 존재를 자각하지 않으려는 인간들을 뒤흔들어 깨우는 봄 때문이라는 것이다. 엘리엇은 봄비가 잠든 식물 뿌리를 뒤흔드는 4월이 가장 잔인한 달이며, 망각의 눈(雪)으로 덮인 겨울이 차라리 따뜻하다고 했다. 얼어붙은 현실에 안주하려는 사람들에게 약동과 변화를 일깨우는 봄의 정신이 숭고하면서도 잔인하기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