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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겨루지 않는다.

3026.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11월 28일)

지난 수요일에 10회로 이어졌던 <서양 철학으로 본 노자의 사상>> 강의를 마쳤다. 다음 사진이 자기 알게 된 노자의 생각을 그림 엽서에 적어 보았다. 그것을 강의실에 전시한 것이다.


노자 <<도덕경>> 은 이렇게 끝난다. "성인은 쌓아 두지 않고 다른 사람에 모두 준다. 더 많이 가질수록 더 많이 준다. 하늘의 도는 모두를 이롭게 하고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다. 성인은 이를 따라서 모두를 이롭게 하고 누구와 겨루지 않는다." 여기서 겨루지 않는다는 것은 베풀고 공을 과시하지 않는다는 거다. 원문 이렇다.

"聖人不積(성인부적) 旣以爲人(기이위인) 己愈有(기유유): 성인은 쌓아 놓지 않고, 사람들을 위해 베풀지만, 더욱 더 많이 가지게 된다.
旣以與人(기이여인) 己愈多(기유다): 사람들과 더불어 쓰지만, 더욱 더 많아진다. 
天之道(천지도) 利而不害(이이불해): 하늘의 도는 이롭게 할 뿐 해롭게 하지 않는다. 
聖人之道(성인지도) 爲而不爭(위이부쟁): 성인의 도는 일을 도모하지만 다투지 않는다. (성인의 도는 사람을 위해 잘 하면서도 사람과 다투는 법이 없다.)"

다툰다 기보다 '겨루지 않는다'는 말이 더 좋다. 다른 사람과 경쟁하지 않는다. 인간은 자연에 순응하면서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지 않고 살아야 한다. 인생무상(人生無常),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이니 모든 것을 비우고 낮추며 섬기면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 우리는 '아무것도 없음(nothing-ness)'에 태어났고,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도 역시 아무 것도 없다. '도'의 '형태 없음' 속에 순수한 '도'라 할 수 있는 것은 없는 것처럼 우리의 진정한 본질은 형태가 없다. 그러니 노자는 마지막 글에서 더 많이 내주고, 덜 따지며, 세상 모든 것에 대한 집착을 놓으라고 마지막 장에서 말하였다. 

장자가 말한 "심재"가 소환된다. 장자는 '자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을 "심재(心齋)"라 했다. "심재"를 하면, 일상의 의식 속에서 이루어진 옛날의 '작은 나(self, 小我)'가 사라지고, 새로운 큰 나(Self, 大我)'가 탄생한다. 그런 근본적인 변화가 생겼을 때 명예나 실리 추구에 초연하게 되고, 그 때 비로소 사회 어느 곳에 있더라도 위험 없이 할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 일이 쉽지는 않다. 세상과 완전히 인연을 끊고 은둔하면 몰라도, 사회에 참여하면서 마음을 비우고 살기는 몹시 어렵다. 그렇지만, 진정으로 "심재"를 하며 마음을 완전히 텅 빈 방과 같은 상태가 되면 그 '텅 빈 방이 뿜어내는 흰 빛', 곧 순백의 예지가 생기는 것을 체험하리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 고요히 머물러야 한다. 가만히 앉아 몸과 마음을 고요히 하는 것
▪ 그 중에서 특히 '마음을 모으는 일'이 기본 요건이다. 몸은 가만히 앉아 있으나 마음이 함께 앉아 있지 못하고 사방을 쏘다니게 되면 헛일이다. 이렇게 몸은 앉아 있으나 마음이 쏘다니는 상태를 '좌치(坐馳)'라고 하는데, 가만히 앉아 자기를 완전히 잊어버린다는 좌망(坐忘)과 맞서는 개념이다. 좌망이 마음의 구심(求心)운동이라면, 좌치은 마음의 원심(遠心) 운동인 셈이다.

다 비워, '아무것도 없는', 사물들이 사라진 세상을 상상하기는 어렵지만, 노자는 그런 세상에 대해 설명하였다. 그곳에는 아름다운 말이 필요 없다. 묘사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다툴 것도 없고, 서로 차지하기 위해 싸울 소유물도 없다. 존재하는 것은 도의 숨은 '덕'뿐이기에 비난하거나 흠잡을 일도 없다. 그리고 그곳에는 축적하고 쌓아 올릴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가진 것을 나눠주고, 다른 사람을 지지하게 된다. "하늘의 도"가 "모두를 이롭게"하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살아 있는 동안 "하늘의 도"를 따르기 위해 할 수 있는 전부를 다 하라고 노자는 말하고 있는 거다. 노자의 다음 제안은 우리들의 일상에서 가능하다.
▪ 따지고 다투려는 성질을 버리고 자신과 의견이 다른 누군가가 옳을 수 있음은 인정한다.
▪ 상대방에게 그저 '당신이 옳다. 당신의 의견을 들려줘서 고맙다'라는 의미의 말을 전함으로써 다툼을 마무리한다. 이렇게 하면 싸움은 끝나고 동시에 비난과 책망도 남지 않는다.
▪ '당신이 옳다'라는 말을 건네는 것으로 자신만 옳기를 바라는 에고를 다스린다. 이 한마디가 우리의 삶을 훨씬 더 평화롭게 만들어 줄 것이다.
▪ 스스로를 '아무것도 없음'의 수준까지 낮춘다.
▪ 자신의 몸과 모든 소유물을 관찰한다. 그리고 나서 그 모두가 변화하는 세상의 일부분임을 받아들인다.
▪ '아무것도 없음' 혹은 '0'의 자리에서 관찰자가 되어 물질의 세상 속에 자신이 쌓은 것들을 살펴보라. 그럼으로써 세상에 확실하게 실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소유물이나 사고방식에 집착하고 있는 자신이 느껴질 때마다 이를 실천한다.

"聖人不積(성인부적) 旣以爲人(기이위인) 己愈有(기유유): 성인은 쌓아 놓지 않고, 사람들을 위해 베풀지만, 더욱 더 많이 가지게 된다. 旣以與人(기이여인) 己愈多(기유다): 사람들과 더불어 쓰지만, 더욱 더 많아진다"를 샘 해밀(Sam Hamill)은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다. "성인은 쌓아주지 않으며, 내어준다. 다른 사람을 위해 살수록 그의 삶은 위대해지고, 다른 사람에 줄수록 그의 풍요로움은 커진다." 주었지만(與), 더 많아(多)지고, 베풀었지만(爲) 더 갖게(有) 된다는 노자의 논리 속에는 쌓지 말고 베풀라는 삶의 방식을 말하는 거다. 통장에 돈을 쌓아 놓아도 내가 다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 문장, "天之道(천지도) 利而不害(이이불해): 하늘의 도는 이롭게 할 뿐 해롭게 하지 않는다. 聖人之道(성인지도) 爲而不爭(위이부쟁): 성인의 도는 사람을 위해 잘 하면서도 사람과 다투는 법이 없다." 자연(천)은 세상을 이롭게 한다. 비를 내려 만물을 생육하게 하고, 적당한 온도로 세상을 품어준다. 나무와 숲은 사람들에게 산소를 내 품고, 사계절은 만들의 생존에 리듬을 만들어준다. 자연 그 어느 하나도 우리에게 베풀지 않음이 없다. 이렇게 아낌 없이 베푸는 천도(천도)의 특징은 베푼 것에 대한 보답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 성인도 자연의 원리를 본받기에 자연의 아낌없이 주는 모습을 그대로 실천한다.

여기서 "적(積)"은 '쌓아 두는 것'이다. 지식이든 돈이든 쌓아 두는 것은 리더가 할 일이 아니라는 거다. 우리는 재화를 쌓아 두지 아니할수록 더 많이 소유하게 되고, 지식을 전유하지 않을수록 더 창조적인 인간이 된다. 이게, 정치적으로 말하면, '무위정치의 마지막 덕성'이고, 동시에 <<도덕경>>에서 노자가 주장하는 <덕경>의 마지막 덕성이 아닐까?
 
사실 남을 위해 자기를 버릴수록 더 많은 것을 소유하게 되고, 남에게 주면 줄수록 더 풍요롭게 된다. 노자가 마지막으로 강조하는 것이 '비움'과 '줌'이다. 도올 김용옥 교수는 이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20세기는 비움의 세기가 아니라, 채움의 세기였으며, 줌의 세기가 아니라 가짐의 세기였다.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는 '나는 소유한다'였으며, '나는 소유한다'는 '나는 소비한다'와 등가의 가치를 지녔다. 소비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소유해야 하고, 소유하기 위해서 주체와 객체를 모두 물건으로 만든다. 주체와 객체의 관계가 죽음의 관계가 된다."

마지막 문장, "天之道(천지도) 利而不害(이이불해): 하늘의 도는 이롭게 할 뿐 해롭게 하지 않는다. 聖人之道(성인지도) 爲而不爭(위이부쟁): 성인의 도는 사람을 위해 잘 하면서도 사람과 다투는 법이 없다." 자연(天)은 세상을 이롭게 한다. 비를 내려 만물을 생육하게 하고, 적당한 온도로 세상을 품어준다. 나무와 숲은 사람들에게 산소를 내 품고, 사계절은 만들의 생존에 리듬을 만들어준다. 자연 그 어느 하나도 우리에게 베풀지 않음이 없다. 이렇게 아낌없이 베푸는 천도(天道)의 특징은 베푼 것에 대한 보답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 성인도 자연의 원리를 본받기에 자연의 아낌없이 주는 모습을 그대로 실천한다.

반면 권력자는 국가라는 것을 만들어 세금, 부역, 전쟁의 의무 같은 것을 바란다. 자연의 원리와는 다른 모습이다. 그러나 성인은 자연의 원리를 본받기에 자연의 아낌없이 주는 모습을 그대로 실천한다. 자신의 공을 과시하고 자랑하지 않기에 영원히 지도자로 존경받을 수 있는 거다. 이것이 "성도(聖道)"이다. 그것을 다시 말하면, "부쟁(不爭)"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이기 때문이다.
 
노자에게 있어서 존재하는 것은 생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생성하는 것은 '빔(虛)'을 가져야 한다. 따라서 존재하는 것은 비어 있는 것이 된다. 비어 있지 않은 것은 존재할 수 없다. '빔'이란 모든 가능성의 잠재 태이며, 창조성의 원천이다. '빔'이 없으면 창조는 불가능하다. 우주도 비어 있는 것이고 하찮은 미물도 다 비어 있는 것이다. 비어 있어야만 합생(合生)이 가능하고 타자의 포용이 가능하고, 다(多)를 일(一)로 통합하여 포일(包一)시키는 창조적 전진이 가능하다. 

강의를 마치고, 이런 생각들을 하며, "흰 구름의 마음"으로 즐겁게 대전으로 돌아왔다. 좀 힘든 10번의 대구 여행이 이번 가을의 자랑이다.


흰 구름의 마음/이생진

사람은 
아무리 높은 사람이라도
땅에서 살다
땅에서 가고

구름은 
아무리 낮은 구름이라도
하늘에서 살다
하늘에서 간다

그래서 내가 
구름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구름은 작은 몸으로
나뭇가지 사이를 지나갈 때도
큰 몸이 되어
산을 덮었을 때도
산을 해치지 않고
그대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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