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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잘 보낸 하루가 행복한 잠을 가져오는 것처럼, 잘 살아낸 인생은 행복한 죽음을 가져온다.

3년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1년 11월 29일)

사람은 묵을수록 좋다는 말이 있다. 오랫동안 가깝게 사귄 벗을 우리는 친구(親舊)라 한다. 친(親)은 친할 친이고, 구(舊)는 예부터 친하게 지내온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 말로는 '벗'이라 한다. 한자어로는 붕(朋)이라는 말이 있는데, '함께 공부한 벗'을 말한다. 반면 우(友)는 뜻을 함께 하는 동지(同志)로 붕 이외의 친구를 말한다. 어쨌든 사랑하는 사람보다 친구가 필요할 때가 있다. 아픈 이야기 힘든 야기기들을 허물 없이 그리고 서슴없이 마음을 터 놓을 수 있는 친구, 이런 이야기나 저런 이야기 그리고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며 위로하고 위로 받을 수 있는 친구, 나의 속내를 가식없이 들어내도 괜찮은 편안한 친구가 필요할 때가 있다.

SNS에 떠다니는 "네 종류의 친구"도  공유한다. 첫째는 꽃과 같은 친구(花友, 화우)로 꽃이 피어서 예쁠 때는 그 아름다움에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꽃이 지고 나면 돌아보는 이 하나 없듯이, 자기 좋을 때만 찾아오는 친구는 바로 꽃과 같은 친구이다. 둘째는 저울과 같은 친구(秤友, 칭우)로 저울은 무게에 따라 이쪽으로 또는 저쪽으로 기운다. 그와 같이 자신에게 이익이 있는지 없는지를 따져 이익이 큰 쪽으로만 움직이는 친구가 바로 저울과 같은 친구이다. 셋째는 산과 같은 친구(산우, 山友)로 산이란 온갖 새와 짐승의 안식처이며 멀리 보거나 가까이 가거나 늘 그 자리에서 반겨준다. 그처럼 생각만 해도 편안하고 마음 든든한 친구가 바로 산과 같은 친구이다. 넷째는 땅과 같은 친구(지우, 地友)로 땅은 뭇 생명의 싹을 틔워주고 곡식을 길러내며 누구에게도 조건 없이 기쁜 마음으로 은혜를 베풀어 준다. 한결 같은 마음으로 지지해 주는 친구가 바로 땅과 같은 친구이다. 친구가 많음이 중요한 게 아니라 깊이가 중요하다. 산과 같은, 땅과 같은 친구가 진정한 친구이다.

<<장자>>에는 "사생존망(死生存亡)이 일체임을 터득한 네 명의 벗"이야기가 나온다. 내용은 이렇다. "자사(子祀), 자여(子輿), 자리(子犁), 자래(子來) 네 사람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
다. “누가 무(無)를 머리로 삼고 생(生)을 등뼈로 삼고 사(死)를 꽁무니로 삼을 수 있는가? 누가 생(生)과 사(死), 존(存)과 망(亡)이 한 몸임을 아는가?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와 사귀고 싶다.' 그리고는 네 사람이 서로 쳐다보면서 빙그레 웃고 마음에 거슬리는 것이 없자 마침내 서로 더불어 벗이 되었다."

여기서 등장 하는 친구는 이렇게 4명이다. 제사 선생인 자사(子祀), 수레 선생인 자여(子輿), 쟁기 선생인 자려(子㴝) 그리고 오심 선생인 자래(子來)이다. 그리고 서로 거슬림이 없는 막역지우(莫逆之友)들이다. 여기서 막역(莫逆)은 서로 거슬리는 일이 없음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막역지우'란 '아주 허물없이 지내는 친구'를 말한다. 친구를 뜻하는 한자 성어는 굉장히 많다. 죽마고우(竹馬故友). 수어지교(水魚之交), 지란지교(芝蘭之交), 백아절현(伯牙絶絃), 간담상조(肝膽相照), 교유이신(交友以信), 단금지교(斷琴之交), 문경지교(刎頸之交), 경개여구(傾蓋如舊), 도원결의(桃園結義) 등이다.

장자가 말하는 서로 거슬림 없는 사이의 친구인 '막역지우'는 죽음과 삶, 있음과 없음이 바로 떨어져 독립한 실체가 아니라 몸의 각이한 부분처럼 하나의 유기적 관계를 가진 단위임을 자각하고, 서로 의연하고 자연스럽게 대할 수 있는 찬구 사이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세 종류의 친구 이야기를 했다. 즐기기 위한 친구, 이용 가치를 위한 친구, 마지막으로 선과 덕을 바탕으로 한 친구가 있다 했다.

장자가 말하는 참된 친구란 선과 덕을 바탕으로 한 우정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맺는 친구이다. 인생관이나 세계관의 차원에서 의기투합할 수 있는 친구, 한번 같이 웃기만 해도 속마음을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는 거다. 이런 친구는 귀하기 때문에 거리에 관계없이 서로 찾는다. 그래 공자는 <<논어>>의 첫머리에서 "친구가 있어 멀리서 찾아오면 역시 기쁘지 아니한가?(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하지 않았을까?

이 글을 쓰다가, 소설가 정여울의 칼럼을 접했다. 어쩌면 가장 멋진 친구가 니어링 부부가 아닐까? 친구같은 그 부부의 삶에 용기와 위로를 받으며 이번 주도 힘차게 출발한다. "잘 보낸 하루가 행복한 잠을 가져오는 것처럼, 잘 살아낸 인생은 행복한 죽음을 가져온다고. 니어링 부부는 1년 동안 필요한 최소한의 생활비를 정하고 농사일을 통해 그만큼의 비용을 버는 순간, 노동을 딱 멈췄다. 나머지 시간은 읽고, 쓰고, 사랑하고, 음악을 듣고 연주하며(두 사람은 함께 플루트를 불기도 했고 헬렌은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자였다), 내가 아닌 다른 존재와 삶의 아름다움을 함께 나누는 데 온전히 바쳤다. 니어링 부부는 매일 나누는 삶, 매일 내가 아닌 다른 존재를 사랑하는 삶, 더 많이 가질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미 가진 것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냈다. 소로가 스콧 니어링 부부를 만났다면 ‘나의 눈부신 친구이자 다정한 동지’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소로와 스콧 니어링은 마치 한 몸이 되어 아름다운 합창을 하는 것만 같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날마다 타인과 무엇인가를 나누라고. 어떤 식으로든 나보다 약한 존재를 돕고, 내가 가진 것을 나누며 살아가라고. 세상 모든 피조물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라고." 나도 너무 힘들어하지 말고, "매일 나누는 삶, 매일 내가 아닌 다른 존재를 사랑하는 삶, 더 많이 가질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미 가진 것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리라. 힘내자. 오늘 아침 시처럼.

새의 날개/박상봉

새는 하나의 단어 하나의 음절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의 단어는 다시 하나의 자음과 하나의 모음으로 구성된다

새의 날개는 아침에 우산처럼 펼쳤다가
저녁이 되면 집으로 돌아오는 노을처럼 곱게 접힌다
날개가 너무 커서 한 폭의 치마를 입은 것 같다

넓적한 물갈퀴로 뒤뚱거리며 걷는 걸음걸이가 바보 같다
거추장스러운 큰 몸통 때문에 놀림감이 되기도 하고
제아무리 날갯짓 버둥대봐도 제대로 날지도 못한다
사람들은 한 번도 새가 나는 것을 본 적 없다

그러나 폭풍이 불어올 때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들*과 서 있는 모든 나무와
엎드린 풀들조차 숨죽이고 몸을 숨길 때
혼자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 긴 치마를 활짝 펼치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폭풍 몰아치는 공중으로 몸을 던진다

그 순간, 두 날개로 바람을 힘껏 안고 날아오르는 새의 기적을 보게 된다
두 달 만에 지구를 한 바퀴 돌아오는
세상에서 가장 멀리, 가장 높이 나는 앨버트로스

사람들은 이제 그 새를
‘하늘을 믿는 노인’이라고 부른다

그동안 나는 아등바등 살았다
하늘을 원망하고 바람을 외면하고
한 번도 날개를 펼친 적이 없다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나의 힘이 아닌 바람의 힘으로 날아야 한다는 것
신천옹(信天翁)이 되고 싶다

*창세기 1장 26절에서 인용.

<<장자>> 이야기를 좀 더 한다. "얼마 있다가 자여(子輿)가 병이 났다. 자사(子祀)가 문병을 와서 이렇게 말을 했다. '기이하구나! 조물자가 그대를 이처럼 오그라들게 하다니!' 그의 등은 곱추처럼 굽고, 등뼈는 불쑥 튀어나오고, 오장이 위로 올라가고, 턱은 배꼽에 묻히고, 어깨가 정수리보다 높고, 목덜미 뼈는 하늘을 향하고, 음양의 기(氣)가 조화를 잃어버렸는데도, 그 마음은 한가로워 아무 일도 없는 듯 평온했다. 자여가 비틀비틀 걸어가 우물에 자기 모습을 비춰보고는 말했다. '아아! 저 조물자여, 거듭 나를 이처럼 구부러지게 하는구나!' 자사가 말했다. '그대는 그것이 싫은가?' 자여가 말했다. '아니다. 내가 무엇을 싫어하겠는가! 가령 나의 왼쪽 팔뚝을 서서히 변화시켜서 닭이 되게 한다면, 나는 그것을 따라 새벽을 깨우겠네, 나의 오른쪽 팔뚝을 서서히 변화시켜서 활이 되게 한다면 나는 그것으로 새를 잡아 구워 먹을 것이며, 가령 나의 궁둥이를 변화시켜서 수레바퀴가 되게 하고, 나의 정신을 말(馬)이 되게 한다면, 나는 그것을 따라 수레를 탈 것이니 어찌 따로 수레에 멍에를 하겠는가! 게다가 생명을 얻는 것도 때를 따르는 것이며, 생명을 잃는 것도 때를 따르는 것이니, 태어나는 때를 편안히 맞이하고 죽는 때를 순하게 따르면 슬픔이나 즐거움 따위의 감정이 나의 마음에 들어 올 수 없다. 이것이 옛날의 이른바 ‘거꾸로 매달렸다가 풀려 났다(현해, 懸解)’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스스로 풀려나지 못하는 것은, 사물이 그것을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또 세상의 모든 사물은 하늘(自然)의 오램을 이기지 못하는 법이다. 내가 어찌 이를 싫어하겠는가?'"

좀 길지만 인상적인 문장들이 여럿이다. 자여는 몰골이 이렇게 되었는데도 하늘을 원망하거나 누구를 탓하는 기색이 없다. 오히려 "위대하구나! 저 조물자. 나를 이처럼 오그라뜨리다니" 할 정도로 마음이 느긋하다. 게다가 찾아온 친구에게 "내 왼팔이 점점 변하여 닭이 된다면, 나는 그것으로 새벽을 깨우겠네"하는 등의 말까지 한다. 지극히 달관한 경지이다. 부럽다. 나도 그렇게 할 생각이다.

그리고 현해(懸解)라는 말이 또 나온다. <<장자>> 제3편 '양생주'에서도 나오는 말이다. 懸解(현해)는 매달린 상태에서 풀린다는 뜻이다. 여기서 매달림이란 무엇이고, 풀림이라는 말은 무엇인가? 실에 매달려 춤추는 인형의 모습이 떠오른다. 인간이란 모두 '하늘'의 손에서 내려온 끈에 대롱대롱 매달려 그 손놀림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인간, 실존(實存)으로서의 인간이기 때문에 가질 수밖에 없는 인간적 한계의 끈에 매달려 살아가는 것, 이런 숙명적인 부자유나나 제약에 항거해서 이를 극복하려고 안달하는 것은 순리가 아니라는 것, 안달하면 할수록 우리의 비극적 얽힘은 더욱 심해질 뿐이다 따라서 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편안한 마음으로 순응함으로써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는 일종의 종교적 역설을 말했다. 이렇게 숙명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므로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을 '메임에서 풀리는 것(懸解현해)'이라 표현한 것이다.

인생을 살면 몇 백 년을 살겠는가? 하늘에 비하면 우리의 삶은 찰나에 불과하다. 길게 살았다 짧게 살았다 따지는 것은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 우리를 내려다보는 조물자가 있다면, 우리가 이렇게 몇 십년을 놓고 마음을 졸이는 것은 일상 속에서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것보다 더 무의미한 일일 것이다.

어쨌든 자여는 살아 있어도 살아 있어서 좋고, 죽어도 '거꾸로 매달림에서 풀려나니' 좋고, '사생존망지일체(死生存亡之一體)'를 터득한 사람이다. 나도 그처럼 생각하며, 그런 친구를 찾기 보다, 내가 먼저 그런 친구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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