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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타인에 대한 공감을 위해서는 인터넷 정보보다, 종이로 이야기를 읽어야 한다.

1년 전 오늘 글입니다.


11월도 거의 다 지나간다. 11월 달력을 떼어내면, 이젠 12월 한 장만 남는다. "벽에 걸 때만 해도 곳간에 그득한 양식 같던 한 해가 어느새 다 지나갔다는 회한에 젖는다. 회한은 반성과 자책으로 이어진다. 연초에 세운 목표는 달성했는지, 잘못한 거나 아쉬웠던 건 없는지 생각이 꼬리를 문다. 11월은 거울 앞에 선 나를 마주하는 달이다. 감상에 빠질 새도 없이 '살은 다 발라 먹고 뼈만 남은' 듯한 자신을 발견한다. 사랑은 아낌없이 주는 것이라지만, 미처 주지 못한 사랑은 '그냥 두기로' 한다."

11월/이영옥

나를 한 장 넘겼더니
살은 다 발라 먹고 뼈만 남은 날이었다

당신이 나뭇가지에 매달렸던
나의 마지막 외침을 흔들어 버리
새가 떨어진 침묵을 쪼아 올리는 것이 음악이라고 생각했다

텅 빈 하늘 아래
발 밑에서 바스락거리는 목소리는 누구인가

깊고 깊어서
부스러기도 없이
뼈만 앙상하게 만져지는 기억들

미처 사랑해 주지 못했던 사랑처럼
남겨진 몇 개는
그냥 두기로 했다

오래된 노래처럼
내 귓속에서 흥얼거리며 살도록

오늘 아침은 일찍 일어나서, 단편 소설을 한 편 읽었다. 어제부터 다짐한 거다. 문학 작품을 매일 조금씩 읽기로 했다. 언젠가부터 집중력이 떨어져 <인문 일지>를 몰입하여 쓰지 못하였다. 집중력이 떨어졌다. 실제로 주변에도 집중력 저하 때문에 고민이 많다는 사람들을 여럿 만났다.

나의 경우는 스마트폰과 포털(예컨대, 구글이나 네이버)이 그 이유이다.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 접속한  후 나는 대부분 목적지가 아닌 엉뚱한 곳을 배회한다. 애초의 목적과 상관없는 콘텐츠를 보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다. 요한 하리(Johann Hari)의 책 <<도둑맞은 집중력>>에 의하면, 책이 아니라 화면으로 글을 볼 때 사람들은 내용을 훨씬 적게 기억하고, 대충 본다는 거다. 분명한 건 인터넷으로 글을 읽을 때 팝업처럼 튀어나오는 광고나 뉴스에 간섭을 받으면 집중력이 부서진다는 것이다. 특히 알고리즘 때문에 범죄, 주식 폭락, 정치 스캔들 같은 분노와 불안을 자극하는 기사가 더 눈에 띄다 보니 세상이 양 극단으로 나뉘어 갈등 하는 모습이 더 부각된다.

다른 의견을 가진 타인에 대한 공감이 급속히 줄어든 이유도 거기서 찾을 수 있다. 타인에 대한 공감을 위해서는 인터넷 정보보다, 종이로 이야기를 읽어야 한다. 실제로 소설을 많이 읽을수록 사람들의 감정을 잘 읽는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흥미로운 건 비 소설 독서가 정보를 얻는 데 용이하지만, 공감 능력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소설을 읽으면 우리는 다양한 인물을 통해 그들의 목표나 동기, 갈등을 따라간다. 왜 저렇게 행동 할까를 추측하고, 나와 다른 해결 방법에 감탄하거나 분노한다. 공감의 예행 연습인 셈이다.

최근에 급증하는 범죄와 갈등의 원인에는 공감의 부족이 있다. 소설 시장의 위축과 소설보다 잔혹한 혐오가 쏟아지는 세상 사이에서 사라지는 건 집중력만이 아니다. 집중을 요하는 모든 행위들, 가령 인내심이나 이해심 같은 가치가 빠르게 사라지며 사람들을 둘로 가르고 있다. 타인의 편에 서서 보는 ‘역지사지’는 ‘정보’가 아니라 오직 ‘이야기’를 통해 강화된다. 구비 문학 이래 인류가 소설을 읽어 온 이유다. 백영옥 소설가의 주장이다.

그리고 소설을 읽어야 내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어휘, 즉 단어들을 잊지 않는다. 나이가 들면, 단어가 잘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사용하는 언어의 수가 줄어든다. 언어가 우리의 사고를 규정하기 때문이다. 특히 글이 '이성', 아니 생각하는 인간의 능력을 키우는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요즈음 이런 언어, 특히 글과 활자매체가 소외 받고 있다. TV의 등장과 함께 서서히 자리를 내주기 시작하더니 스마트폰 등 디지털 기기의 발달로 이제는 지난 2000년간 누려왔던 지식 소통 수단의 자리를 내주고 있다. 심각한 것은 일상에서 책을 읽는 모습이 사라졌다. 지하철 안에서도 독서하는 사람보단 스마트 폰에 더 집중한다.

아침에 읽은 소설에서 만난 어휘들을 몇 가지 공유한다.

"비록 다룸가죽은 아니지만, 어쨌든 모피 외투를 살 수는 있어."

다룸가죽은 '다루어서 만든 가죽으로 숙피(熟皮)라고도 한다. 나는 '익는다'는 '숙'자가 들어 가는 이런 말들을 좋아하다. 숙성(熟成), 성숙(成熟), 숙의(熟議), 숙독(熟讀), 숙피(熟皮) 등. 이 단어를 찾아 보니, 다음과 같은 정보도 따라왔다. 다룸가죽을 말하는 한자가 있었다. "위(韋)". 가죽을 의미하는 글자로 皮(가죽 피), 革,(가죽 혁), 韋(다룸가죽 위)가 있다. 皮는 입을 벌리고 죽은 짐승의 몸으로부터 가죽을 벗겨내고 있는 것을 나타내고, 革은 잘 다듬은 가죽을 펼쳐 놓은 모양이다. 韋는 원래 성 주위를 돌고 있는 군사들의 발 모양을 의미하고 있지만 펼쳐놓은 가죽을 발로 밟고 있느 의미도 포함하고 잇다.

"바늘겨레에 바늘을 꼽고": 바늘겨레 또는 바늘방석, 바늘꽂이, 바늘집, 핀쿠션(pincushion)은 바늘을 꽂아 두기 위해 헝겊 속에 솜 따위를 넣어 만든 작은 수공예품이다.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갸웃거릴 뿐이었다."

"당신은 염치마저 홀랑 마셔 버린 모양이다." 염치(廉恥)는 '체면을 차릴 줄 알며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며 인간으로서도 반드시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어야 되는 것으로, 순 우리말로는 '주리팅(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라고도 칭한다.

언젠가 적어 둔 문장이다. "우리는 지금 염치없는 사회에 살고 있다. 더러우면 숨거나 숨기기라도 해야 한다. ‘염치’는 ‘결백하고 정직하며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으로 설명되어 있다. 말하자면 '염치'란 남을 대하기에 떳떳한 도리를 차릴 줄 아는 체면과 동전의 양면이다. 면면히 이어온 경험적 지혜가 함의된 속담에서 ‘염치’는 다양한 표현으로 드러난다.

염치없는 자는 낯짝과 뱃가죽이 소가죽보다 두껍다.

봉당을 빌려주면 안방까지 내 달라고 우겨 대고, 안뒷간에 똥 누고 안 아가씨더러 밑을 씻겨 달라고 덤벼든다.

고약한 노린내가 나는 놀래기 회라도 마다하지 않고 먹을 형국이다.

조상들은 이처럼 두려움도 모르고 고마움도 모르고 제 욕심만 차리려 덤비는 자를 꺼리어 멀리했다. 이 모두의 근원이 바로 부끄러운 짓을 저지르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몰염치다. 바야흐로 지금 우리 사회는 ‘염치’가 실종된 후안무치의 시대다. 어떤 악행과 실행보다도 번연히 제가 저지른 일 앞에서 뻔뻔스레 구는 철면피들이 더욱 놀랍다. 그렇다. 화가 나기에 앞서 놀랍다.​

3염치없음, 그리하여 뻔뻔스러움은 결국 철저한 특권의식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자아도취, 자기합리화, 안하무인의 행태는 철학자 아론 제임스가 지적한 대로 “모든 인간은 도덕적으로 평등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 그들은 실로 특별하여 당당하다. 특혜는 당연하고 다른 사람들의 불만 따윈 아랑곳없다. 자아도취와 자기 합리화는 그들의 ‘DNA’에 새겨진 불굴의 면역성이다. 그런데 그 특권의식을 뒷받침하는 건 다름 아닌 “진상은 호구가 만든다”는 사실이다. 일단 강단에서 마이크만 잡으면 사탄이 떠드는지 천사가 외치는지 가려 듣지도 않고 무조건 “아멘”을 외치는 맹신자들과, 거지 코스프레를 하는 약탈자들에게 ‘불쌍해서’ 표를 던지는 유권자들은 그들이 마음껏 진상을 떨도록 만들어주는 ‘호갱님’에 다름 아니다. “내가 누군지 알아?”하고 배짱을 튕기는 파렴치한에게 “네가 누군지 안다”고 똑바로 말해 줄 수 없는 한 이 끔찍한 ‘참극’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 슬프다.

글이 길어진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내일로 넘긴다.

다른 글들은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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