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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오늘이 '지공거사(地空居士)'가 되는 날이다.

3023.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11월 25일)

<<도덕경>>의 마지막 문장이 "하늘의 도는 모두를 이롭게 하고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다. 성인은 이를 따라서 모두를 이롭게 하고 누구와 겨루지 않는다(天之道(천지도) 利而不害(이이불해), 聖人之道(성인지도) 爲而不爭(위이부쟁)"이다. 싸우지 마라는 말보다 겨루지 마라는 말이 더 마음에 든다. 겨루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겨루지 않으려면 '소욕지족(少欲知足)' 정신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내가 '아무 것도 아님(nothing-ness)'을 자각하는 거다. 그러니 더 많이 주고, 덜 따지며, 세상 모든 것에 대한 집착을 놓을 줄 아는 거다. 욕망을 절제하는 것이 ‘소욕지족’의 정신이고, 이것이 바로 부자로서 살아가는 것이 된다. <<아함경>>에서도 지족(知足, 족함을 아는 것)이 제일 부(富)요, 무병(無病, 건강한 것)이 제일 이(利)요, 선우(善友, 착한 도반)가 제일 친(親)이요, 열반(涅槃, 고요한 명상)이 제일 락(樂)이라고 하였다. 법정 스님도 "소욕지족 소병소뇌(少欲知足, 少病少惱)를 말한 적이 있다. 적은 것으로써 만족할 줄 알며, 적게 앓고 적게 걱정하라'란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작은 것으로 만족하고, 몸에 병이 적고 머리에 생각이 적게 하자는 거다. 크고 많은 것보다는 작고 적은 것 속에, 삶의 향기인 아름다움과 고마움이 스며 있다.

번뇌, 걱정을 줄여라. 번뇌는 욕망을 바탕으로 한다. 이 욕망은 스스로 자족하지 못함에서 생기는 것이다. 번뇌에 물들지 않고 지혜로운 사람은 애써 구하거나 가지려 하지 않는다. 오는 것을 막으려 하지 않고 가는 것을 잡으려 고도 하지 않는다. 인연 따라 그저 마음을 편안히 지니고 살아간다.

내려가는 것이 바로 올라가는 거다. 시간이 지나면 부패하는 음식이 있고, 시간이 지나면 발효되는 음식이 있듯이 시간이 지나면 부패하는 인간이 있고, 시간이 지나면 발효되는 인간이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썩지 않고 맛있게 발효되는 인간은 바로 끊임없이 내려가는 사람이다.

시위를 떠난 화살을 어찌 잡을 수 있나? 그런데 나는 내 나이의 정체성에서 자주 혼란을 느낀다. 아직 지공거사(지하철을 공짜로 타는 나이)는 아니다. How old is old? 얼마나 늙어야 늙은 걸까? 난 내 머리와 가슴과 다리가 아직 늙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회는 날 보고 결코 젊다고 하지 않는다. 유엔이 ‘호모 헌드레드(Homo Hundred)’ 시대를 맞아  제안했던 '새로운 인간 생애주기 연령 지표'에 따르면, 난 아직 청년(18~65세)에 속한다. 그 기준을 보면, 중년은 66~79세이고, 80이 넘어야 노년이다. 

“네 젊음이 네 노력의 보상이 아니듯, 나의 늙음도 나의 과오에 의한 것이 아니다.” (박범신, <<은교>>)  “나이 든 사람의 비극은 그 사람이 나이가 들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여전히 젊다는 데 있다.” (오스카 와일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오스카 와일드가 했던 다음 말이 즉각 소환되었다. "파렴치(破廉恥)함이란 모든 것의 가격만 알고, 가치는 조금도 모르는 것이다."  모두들 '돈 돈' 하며, 자신 가치를 판다. 몇 가지 질들을 해본다.
▪ “몇 살이세요(How old are you)”라고 묻지 말고 “몇 살로 느끼세요(How old do you feel)”라고 물으면 웃기는 걸까? 
▪ 얼마나 늙어야 진짜로 늙은 걸까? 
▪ 내 나이는 진정한 나를 반영하는 것일까? 
▪ 나는 몇 살로 살아야 하는 걸까? 
이름과 성별도 바꿀 수 있는 시대인데 스스로 나이를 결정할 권리는 없는 것일까?

오늘이 '지공거사(地空居士)'가 되는 날이다.  '지공거사'란 지하철을 공짜로 타는 노인이라는 뜻의 은어이다. 


지공거사/권순진

지하철을 공짜로 탈 수 있는 대망의 연세가 착착 다가온다. 저기 있는 고지처럼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이러다 내 바로 앞에서 덜컥 차단기가 내려와 가로 막히는 건 아닐까 조바심마저 생긴다. 이렇게 늙음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건재함을 반겨도 좋은 노릇일까 갸우뚱하다 가도 알량한 당근이 재촉하는 생의 덫에 서둘러 빠져들려는 이 치사한 심보는 무언가. 남은 생이라야 기껏 대통령이 한 둘 더 바뀔 터이고 몇 번 더 올림픽의 성화를 볼 수 있으리라. 그조차도 명운이 좋았을 경우다. 노약자 석에 앉아서도 시침 뚝 떼고 마구 싸돌아다닐 할랑한 시간이면 좋으련만. 분별없는 열정 따윈 다 소진하였겠으나 삶의 틈새로 끼어든 구차한 이물질이 아니라 남루한 존엄일망정 지켜낼 것은 지켜가며 덤으로 얻은 생, 쌩쌩 세포들이 살아 꿈틀거려주기를 소망하노니


'지공거사'가 시작되는 날에, 노자 <<도덕경>>에서 알게 된 "수유왈강(守 柔曰强)"을 소환한다. '부드러움(柔)을 지키며 사는 것이 진정한 강함'이라는 거다. 부드러운 물이 강하고, 센 바위를 이기듯이, 부드러운 풀이 강한 바람에 견디듯이, 부드러움은 위대한 강자의 정신이라는 거다. 부드러움은 이 자연 계가 운행하는 모습이다(弱者道之用, 약자도지용), 또 살아 있는 것은 부드럽고, 죽어 있는 것은 뻣뻣하다.

비슷한 말이 제43장에도 나온다. '천하의 가장 부드러운 것이 천하의 가장 단단한 것을 부린다'는 "지유치빙지견(至柔馳騁至堅)이란 말이다. '지극히 부드러운 것이 지극히 견고한 것을 뚫고 들어간다'는 거다. "치빙(馳騁)"은 말을 타고 이리저리 내달리는 것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뚫고 들어간다는 의미로 보기도 하고, 완벽하게 제어한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말을 달리게 하는 것은 말을 제어할 때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 '부린다'고 해석했던 것이다. 지유(至柔)가 지견(至堅)을 제어(制御)한다고 읽을 수 있다. 마치 여자가 남자를 제어하고, 물이 불을 제어하는 것과 같다. '제어'라는 말에 방점을 찍는다. '제어하다'라는 말 중에는 '감정, 충동, 생각 따위를 막거나 누르는' 것으로 쓰인다.

그리고 제36장에는 "유약승강강(柔弱勝剛强, 부드럽고 약한 것이 강하고 견고한 것을 이긴다)"이란 말이 있다. "수유(守柔, 부드러움을 지키기)"는 이유를 말하는 거다. 강한 다이아몬드를 뚫고 지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이아몬드보다 더 단단하고 견고한 물질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정답은 아니다. 그렇게 하면 둘 다 부서지고 만다. 물과 같은 가장 부드러운 물질이라야 다이아몬드를 뚫고 들어갈 수 있다. "'형체가 없는 것은 틈이 없는 곳에도 들어간다. 나는 이것으로 무위의 유익함을 안다(無有入無間)"는 거다. 중국 한나라의 명장 이광이 어느 날 산속을 가다가 호랑이를 발견하고 화살을 쏘아 정통으로 맞혔는데 알고 보니 그것은 바위였다. 그런데 바위라는 것을 알고 다시 쏘니 화살이 계속 튕겨져 나왔다. 마음속에 바위가 없는 상태, 즉 무(無)의 상태에서는 바위를 뚫을 수 있었지만 바위를 채운 상태, 즉 유(有)의 상태에서는 그것을 뚫을 수 없었던 것이다. '유'를 뚫을 수 있는 것은 '무'밖에 없다. 왕필은 "무유입무간(無有入無間, 형체가 없는 것은 틈이 없는 곳에도 들어간다)"에 대해 "기(氣)는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없고, 물은 스치지 못하는 곳이 없다(기무소불입, 수무소불경(氣無所不入, 水無所不經)"고 주를 달았다.

부드러운 사람은, "즐거운 때"를 아끼지 않는다. 남은 삶 동안 기쁜 마음으로 즐겁게 살아갈 생각이다. 인생에서 언제나 좋은 일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상처 받아 가슴 아픈 날도 분명히 있다. 누군가는 기쁨과 슬픔이 씨실과 날실이 되어 인생이라는 천을 직조한다고 표현했다. 중요한 건 기쁨이나 슬픔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일 것이다. 기쁨 속에서도 신중함을, 슬픔 속에서도 희망과 긍정을 가미한다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슬픔만으로 짜인 어둡고 우울한 색감이나 기쁨만으로 짜인 가벼운 색감 대신 깊이가 느껴지는 멋진 색감의 천이 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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