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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나의 사랑이, 그 낯선 자를 신으로 둔갑시키는 것이다.

4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오늘부터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의 글쓰기 스타일을 바꾸기로 했다. 우선 사진과 시를 하나 고르고, 한 가지 주제만 공유하기로 했다. 너무 길게 이야기를 하니, 글에 몰입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오늘 아침 사진은 최근 우리 동네에 생긴 디저트 커피숍이다. 그리고 아침 시는 류미야 시인의 것이다. 짧지만 긴 여운을 남긴다. 이 시는 내 주변에 있는 "곁"을 되돌아 보게 한다.

나는 다섯 가지의 "유'를 좋아한다. 그리고 그걸 지향한다. (1) 자유(自由) (2) 사유(思惟) (3) 여유(餘裕) (4) 온유(溫柔) 마지막 다섯 번째가 YOU(당신)이다. 인간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자신이 왔던 흙으로 다시 돌아간다. 그 사실과 진리를 깨달은 인간은, 한정된 시간에 자신의 최선을 발휘되는 전략을 짠다. 유한함에 대한 아쉬움이 인문-과학-예술이다. 인간은 자신이 아닌 타자들, 타인과 자연과 함께 살기 위해  ‘문화(文化)’를 구축하였고, 그 문화를 가시적인 성과로 표현한 것이 ‘문명(文明)’이기 때문에 마지막 YOU가 중요하다.

"타자 윤리학"을 말하는 프랑스 철학자 엠마뉴엘 레비나스는 이런 말을 했다. "타자는 나에게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얼굴로 나타내는 현현(epiphany)에 의해 나에게 의무를 지운다." 이러한 의무에 따라 타자로 향한 정향성으로 말미암아 인간 간의 유대와 연대가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이 레비나스의 주장이다. 그는 "제대로 된 정의는 타자로부터 시작 된다"고 말했다. 오늘은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싶다. 다들 마스크를 쓰기 때문에 "얼굴로 나타나는 현현"을 느끼지 못해 그런지 점점 더 세상이 삭막하다.

한 마디만 더 한다. 위에서 말한 '현현(epiphany)'이란이 어렵다. 이 말은 평범하고 일상적인 대상 속에서 갑자기 경험하는 영원한 것에 대한 감각 혹은 통찰을 뜻하는 것이다. 원래 'epiphany'는 그리스어로 '귀한 것이 나타난다'는 뜻이며, 기독교에서는 신의 존재가 현세에 드러난다는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

언젠가 내가 좋아하는 권선필 교수가 페북에서 말한 문장을 적어 둔 적이 있다. 오늘 다시 꺼내 공유한다. "세상과 이웃을 돌봐야 할 이들은 온통 다른 그 누구만 떠올린다. 그가 돌봐야 한다고. 조금 더 지적인 사람은 제도와 구조를 가지고 복잡하게 설명한다. 이웃과 생명에 대한 책임에 대하여. 선이 비워진 자리엔 악이 그득하고, 그 악은 제가 악인 줄 모른 채 삼킬 자를 찾기에 바쁘다. 서로를 돌보지 않는 세상은 그렇게 더욱 춥고 쓸쓸해 진다."

내 "곁"에 있는 이웃이 누구입니까? 여기서 이웃은 나하고 가까운 사람이기도 하고, 나와는 상관 없는 낯선 자 혹은 동물이나 식물이기도 하다. 낯선 자는, 내가 그에게 사랑을 베풀면, 그 낯선 자는 자신의 본래 모습을 드러낸다. 그 본모습이 '신'이라고 배철현 교수는 자주 말한다. 나의 사랑이, 그 낯선 자를 신으로 둔갑시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내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 때, 그 가운데서 '신'이 등장하는 것이다.

곁/류미야

​상자 속 귤들이 저들끼리 상하는 동안

​밖은 고요하고
평화롭고
무심하다

상처는
옆구리에서 나온다네, 어떤 것도.

이어지는 글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blogspot.com 으로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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