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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신명(神明)을 이야기 한다. (2)

3013.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11월 15일)

신명(神明)을 이야기 한다. (2)

어제에 이어 '신명"이야기를 이어간다. 자연 과학적으로 말하면, 생명은 물질과 정신의 교집합이다. 여기서 교집합에 방점을 찍는다. 교집합이 욕망의 배치이다. 생리적인 것과 심리가 교차하는 만큼이 우리들의 생명의 바탕이기도 하다. 만약 물질, 생리적인 것만 있으면, 그건 기계가 될 것이고, 만약 심리만 있으면 그건 유령이 될 것이다. 물질과 정신이 교차하는 만큼이 인간 존재성이라 말할 수 있다. 그게 욕망의 기본이고, 욕망의 배치이다. 생명이 있는 인간과 기계인 AI의 차이가 아닐까?
 
우리 존재는 우주의 부분이면서, 동시에 우주 전체이기도 하다. 그게 생명이다. 그러니 욕망도 마찬가지이다. 욕망을 존재와 분리해 버리면, 우리는 생명이 없는 추상적인 존재로서 아주 수동적인 삶을 살아가야 된다. 거기서부터 우리는 이미 욕망의 포로가 될 준비가 되어 있는 거다. 인간과 기계는 다르다.
 
고미숙은 생명을 식욕과 성욕으로 푼다. 우리의 일상에서 펼쳐지는 생명 활동이 먹는 것과 성욕이다. 먹는 것은 우리가 항상성을 유지하고 생존을 지키는 데에 기본적인 것이다. 그러나 계속 섭취만 하면 안 되니까 이걸 발산해야 한다. 발산하는 가장 강력한 게 성욕이다. 식욕이 외부의 것을 내 안에 들이는 거라면, 성욕은 외부에 있는 타자를 향해 달려 가는 거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성욕은 번식을 위한 거다. 생존했으니 번식하라는 것이다. 우리의 생명이자 욕망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 방향인 것이다. '살아라, 내 몸의 향상성을 지켜라' 그리고 그 다음에 '타자와 하나가 되어서 번식해라. 즉 다른 생명을 낳아라'이다. 이걸 간단하게 말하면, 흡수와 발산으로 말할 수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받아들였으니, 아이에 걸맞는 창조를 해야 한다는 점이다. 발산을 위한 창조가 중요하다. 예컨대, 글쓰기나 그림 그리기나 노래하기 등도 밠ㄴ이 될 수 있다. 흡수했으면 발산해야 하는 것이 물리학적인 원칙이다. 이를 간단하게 하면, "지속하고 접속하라'이다. 이렇게 해서 내가 다른 존재로 변형되어 가는 걸 우리는 성장이라 한다. 
 
우선 내 몸의 항상성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만 하면 그냥 건강의 노예가 된다. 이건 생명 활동의 반쪽밖에 안 된다. 반드시 타자와 접속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타자 안에는 시공간도 들어가고, 동물, 인간, 기계 다 포함된다. 타자와 접속해서 나를 변형시켜야 온전한 생명활동이 이루어지는 거다. 문명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살아 있으면서 누구나 계속 접속하고 뭘 창조하다 보면, 오늘의 문명 수준까지 따라온다. 우리는 계속 그 활동, 접속하고 창조하는 리듬 안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근대 서구 합리주의는 이성으로 그걸 제어할 수 있다고 보았다는 거다. 이건 착각이었다. 욕망은 그런 식의 균질화와 분류, 유형 따위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욕망은 카오스이다. 방향도 없고 그냥 움직인다. 게다가 움직이면서 계속 생존하면서 번식하는 것뿐이다. 그러니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같은 욕망을 마주하고 그걸 성찰하는 힘이 필요한 시점이다. 욕망의 방향을 바꿀 때이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태과불급(太過不及) 상태로 태어난다. 태과불급은 동아시아 철학의 오행 상극관계에서 사용하는 말이다. 적절한 조화를 이루지 못한, 지나치게 과다하거나(太過), 부족한 것은(不及) 모두 병이라는 뜻으로 "태과불급 개위질(太過不及, 皆爲疾)'이라는 말을 쓴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은 다 어떤 식으로든 기울어져 있다. 왜 그런 가? 우주 자체가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 기울어짐 때문에 태양계가 전혀 다른 모습으로 계속 변화하는 거다. 기울어져 있어서 계속 차이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원래 기우뚱하게 태어났는데,  태어난 시, 공간 안에서도 계속 차이가 생겨난다. 그러나 고민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만약 모든 게 세팅이 되었다면 평생 고민을 할 필요도 없고, 세팅 되어진 대로 살면 된다. 그건 재미 없는 일이다. 늘 움직이고 변하고 있는 거라면 여기에 미세한 털끝만큼의 차이만 있어도 내가 온전히 바뀔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흥미로운 일이다.
 
문제는 인간이 역사와 문명을 만들면서, 누군가 특수한 사람에게 특수한 상황에서 맞는 걸 진리라고 만들어 놓았다는 거다. 예를 들면 노예제 사회. 그게 많은 사람들하고 맞지도 않는데, 진리라고 주입해야 되니까 폭력이 발생하게 된 거다. 맞지 않는데, 우기다 보니 그렇게 되는 거다. 이 끝이 자본주의이다. 자본주의 물질적 소유를 통해서 욕망을 다 채우게 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도 물질적 소유를 향해 열심히 따라왔지만, 생명의 이치나 자연의 지혜인 영성에 대해서 너무 소홀히 했고, 하고 있다.
 
욕망은 타자를 만나서 접속하는 거다. 즐거 우려면, 욕망과 접속이 동시에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 타자와 만나 스토리가 없으면 폭력이 된다. 욕망을 카오스적이기 때문에 무엇이든 될 수 있다. 특히 자본주의와 욕망이 결합하면, 맹목적인 식욕, 성욕, 그 다음에 분노조절장애로 나타난다.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는 데 욕망을 아무리 채워야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래 욕망의 다른 측면이 로고스로 질문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 내가 왜 이렇게 먹나 라는 질문을 하는 거다. 그리고 그것이 주는 쾌락에 대해 객관적으로 아무 가치 판단 없는 상황에서 질문을 해 보는 거다. 질문 대신 욕망을 갑자기 멈추어 버리면 오히려 정체를 알 수가 없다. 원래 하던 걸 계속하면서 그걸 관찰하는, 일종의 텍스트로 삼는 거다. 쾌락과 쾌락 사이에 괴로움이 있다. 쾌락은 정, 기, 신을 굉장히 많이 쓰게 한다. 그 대가로 기진맥진하거나 너무 공허해 진다. '태과불급'인데, 좀 지나치게 쓰고 있는 거다. 그때 필요한 것이 욕망의 현장과 대면하는 거다. 

우리는 노동, 화폐, 소비의 사이클 안에서 비전 탐구를 하지 않고 있다. 앞에서 말한 정, 기, 신에서 신을 쓰지 않는 거다.  '그냥 좋은 일자리를 얻어서 돈 벌어서 소비하는 것이 내 인생의 방향이다.' 이렇게 말하고 생각하는 삶이다. 이젠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욕망은 에너지와 질량처럼, 거기에는 가치가 없다. 사람마다 다 다르다. 중요한 점은 내가 수렴과 발산,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조율하는 것이다. 조율이 힘들더라도, 내가 이걸 조율하겠다고 방향을 틀어야 한다. 가고자 하는 방향이 잡히면, 그걸 보고 있으면 힘을 낼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욕망의 힘을 버리면 안 된다. 다만 방향만 잘 잡으면 된다. 그때 필요한 것이 에로스와 로고스의 결합이다.
 
지금까지의 방향은 소유를 향한 것인데, 소유의 증식이 아니라 내 존재의 끊임없는 생성을 향해야 한다. 소유와 증식을 하면 친구가 있을 수 없다. 그러니 욕망을 있는 그대로 껴안고, 소유와 증식보다는 '존재' 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 그게 욕망으로부터 해방되며, 내 인생의 주인이 되는 길이다.

사람들은 다들 '내 삶의 안전장치'를 마련한다. 돈을 통해, 직장을 통해, 가족을 통해, 명예를 통해 그걸 구축한다. 그리고 안전장치가 버텨 주길 바란다. 그런데 이런 장치는 결국 무너지게 마련이다. 궁극적 안전장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무너지지 않는 안전장치가 있다. 그게 영적인 가난의 태도를 지니는 것이다. '영적인 가난'의 태도는 이 세상을 소유하려 하지 않고, 누리려고 하는 거다. 내게 주어진, 이미 주어진 이 하늘의 은혜, 자연의 은혜를 누리는 거다. 자연의 흐름에 맡기면서 무위적 삶을 살려는 자세이다. 내가 인위적으로 나의 안전을 구하지 않고, 자연에 맡기고 의지하면서 살려는 태도이다. 스스로가 영적으로 가난하다는 것을 인정할 때 이런 자세가 나온다. 가난 하려는 것은  존재의 자세 문제이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어떤 일을 하든지 자신의 뜻대로 하기보다는 자연의 힘에 맡길 줄 아는 자이다. 느긋하게 여유를 가지고 그 일 자체가 돌아가는 것을 볼 줄 아는 것이다. 초조해 하거나 조급해 하지 않고, 여유 있고, 지혜롭게, 넉넉하게, 잘 살 수 있게 된다. 

연구실 앞의 거리에 있는 은행 나무들이 오늘 아침 사진처럼 노란 물이 들었다. 은행나무 잎을 보면 늘 독일의 대 문호 괴테가 생각난다. 200여 년 전인 1815년 가을날, 그는 한 여인에게 사랑의 시를 담은 편지를 보냈다. 편지지에는 노란 은행잎 두 장도 붙였다. 예순 여섯 살 시인의 표정은 사춘기 소년 같았다. 얼마 뒤 그녀에게서 화답시가 도착했다. 그녀의 이름은 마리안네 빌레머. 서른한 살의 유부녀였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건 1년 전인 1814년. 나이를 초월한 이들의 사랑은 은밀하면서도 위태롭게 진행됐다. 남의 눈을 피해야 했으므로 더 애틋했다. 이 둘의 사랑은 완성되지 못했다. 그러나 시인 괴테는 둘로 갈라진 은행잎을 보고, "서로 어우러진 두 존재"의 합일을 발견했다. 암수 딴 그루의 은행나무가 수태하는 과정을 "둘로 나누어진 한 몸"의 의미와 접목한 감수성도 뛰어나다. 그의 시를 공유한다.

은행나무 잎/괴테

동방에서 건너와 내 정원에 뿌리내린
이 나뭇잎엔
비밀스런 의미가 담겨 있어
그 뜻을 아는 사람을 기쁘게 한다오.

둘로 나누어진 이 잎은
본래 한 몸인가?
아니면 서로 어우러진 두 존재를
우리가 하나로 알고 있는 걸까?

이런 의문에 답을 찾다
비로소 참뜻을 알게 되었으니
그대 내 노래에서 느끼지 않는가.
내가 하나이며 또 둘인 것을.

은행(銀杏)은 동아시아 원산의 나무로, 암수딴그루이다. 가을이 되면 낙엽이 지기 전에 잎사귀가 샛노랗게 물들어 아름답고, 병해충에 강한 특징 등 다른 여러 장점이 있어 가로수로 많이 심는다. 은행나무는 활엽수일까, 침엽수일까? 잎이 넓적한 걸 보고 활엽수로 대답하고 싶은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이론상으로는 침엽수로 분류하기도 한다. 은행잎을 자세히 살펴보면 가는 부채 모양으로 퍼진 바늘 같은 잎맥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은행나무의 분류학적 위치는 침엽수도 활엽수도 아니라고 한다. 더 놀라운 건 은행나무가 지구상에 1과 1속 1종만이 존재하는 나무라는 것. 자신과 엇비슷한 친족을 절대 인정하지 않는 은행나무는 2억년 이상 지구에서 자라왔다. 인간보다 먼저 지구에 뿌리를 내린 것이다. 지금은 가로수로 흔히 심지만 조선시대만 해도 절이나 서원 같은 특별한 곳에 심어 경배하던 나무였다.

은행잎은 사랑뿐만 아니라 건강과 장수, 다산을 상징한다. 독일 식물학자 마리안네 보이헤르트도 《식물의 상징적 의미》라는 책에서 은행나무와 은행잎의 특성을 설명하며 “은행나무는 희망, 장수, 다산성, 우정, 순응, 정복 불가능성을 상징한다”고 했다. 괴테는 이 같은 은행나무의 미덕에 달콤한 사랑의 밀어와 노란 잎 두 장을 붙여 연인에게 보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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