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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상처 없이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자립적으로 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4년전 오늘 글이에요 .

인문 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나는 '놀기 좋아' 하는 '쿨'한 자유인으로 살고 싶다. 그러면서 백수처럼 살고 싶다. 무엇이 되려고 하는 것은 동양철학에서는 무의미하다고 가르친다. 굳이 뭐가 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동의한다. 그러려면, 상처 없이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자립적으로 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제주도에 보낼 두 번째 날 아침이다. 그래 오늘 나는 그리스 인 조르바이고 싶다. 그리스인 조르바가 소설 속에서 말하던 것을 나는 좋아한다.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自問)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존재는 마주하는 지금 이 시간 속에 있다. 지금 이 순간에, 내가 가고 있는 '길'에 확신을 가지고 싶다. 바다는 비에 젖지 않는다. 오늘도 행복하게 보내고 싶다.

§ 나는 조르바처럼 어떤 이념도 이상도 믿지 않는다. 조국, 신, 혁명 따위는 한갓 망상에 불과하다. 궁극적으로 사람들을 얽어 매고, 노예 화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조르바가 이런 원리를 깨달은 것은 학교나 책이 아니라 생로병사의 현장이었다. 그의 가르침은 이성이란 "물레방앗간 집 마누라 궁둥짝"이고, 결혼이란 "개골창에 대가리를 집어 넣은 것"이며, "하느님과 악마는 하나이다" 등과 같다.
§ 나는 그처럼 천하를 떠돌지만 묵을 곳을 걱정하지 않는다.
§ 조르바의 사랑은 진짜이다. 그걸 나는 배우고 싶다. 예컨대, 조르바의 손길이 닿으면 과부의 쭈글쭈글한 주름이 펴지면서 생의 가장 빛나던 시절로 돌아간다.
§  조르바는 모든 사물에서 영혼을 발견하는 범신론 자이다. 나도 그처럼 영혼이 떨리는 삶을 살고 싶다. "어린아이처럼 그는 모든 사물과 생소하게 만난다. 그는 영원히 놀라고, 왜 하고 캐묻는다. 만사가 그에게는 기적으로 온다."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살아 있는 육체가 느끼는 것이다.
§ 조르바가 보기에 세상은 카오스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아무리 정교한 이념도, 완결된 이상도 이 카오스의 무상한 흐름을 따라잡을 수 없다. 그가 보기에, 두목(조르바의 주인)은 삶으로부터 한걸음 떨어져서 이리 재고, 저리 재고, 또 이런 이상, 저런 정열에 사로잡힌다.  마치 이념과 가치를 잘 구축하기만 하면 세상만사가 다 해결될 듯이 말이다. 그런 것은 언제나 "뒷북"이고, "미네르바의 부엉이"이고, "뻘 짓"이다. 그러니 조르바처럼 카오스의 무상성의 파도에 몸을 맡긴 채 그 리듬을 타는 것 말곤 달리 길이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 머리에서 나오는 추상과 관념이 아니라, 오장육부로부터 솟구치는 기 혹은 에너지의 유동적 흐름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명상 호흡이 중요하다. 단전 호흡을 통해 기운을 모으는 실력이 필요하다. 육체, 몸을 써서 힘을 길러야 한다.

그리고 장자가 말하는 삶의 방식이기도 하고, 『도덕경』에서 노자가 말하는 "거피취차(去彼取此, 저 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의 삶이기도 하다.

노자가 바라는 인간은 저 높고 먼 곳에 설정되어 있는 이상적 체제나 기준을 갈망하지 않고, 바로 지금 여기에 있는 구체적이고 자연스런 일상에 더 충실하자는 것이다. 예컨대, 그런 사람은 정해진 어떤 특정한 맛이나 옷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자기가 먹고 있는 음식을 맛있어 하고 지금 자기가 입고 있는 옷을 예쁘다고 여긴다. 자신이 지금 처한 구체적인 곳에서 충실하지, 지금 이 곳의 구체성을 버리고 저 멀리 있는 이상을 향해 맹목적으로 내달리지 않는다.

장자는 이 카오스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다. "세상이 아무리 한심하고 구질구질하고 역겹고 난감하더라도 그것을 피할 방법은 없다." 그렇다면, "어떤 운명이라도 사랑하면서 그 운명을 껴안고 한바탕 노는 능력을 터득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 세상의 어떤 운명이라도 사랑할 수 있다면, 세상의 어떤 삶이라도 다시 살아낼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절대자유의 삶이 아니겠는가 묻는다.

이념이나 가치가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지금 우리사회도 이념이나 가치로 잘 무장되었다고 하는데, 혼용무도(混用無道, 다 뒤 섞여 혼란스러움)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어떤 명분과 가치도 자연과 생명의 리듬을 따르는 것보다 더 위대할 수는 없다. 이것을 잊으면 외적 성취(겉치레, 허영)에 사로잡히고, 그러면 번잡 해져서 불안에 빠져 버린다. 그 순간 한편으로 두려워서, 무서워서, 되레 난폭 해지거나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쾌락을 좇게 된다. 그리고 두려움과 쾌락에 빠진다면 제명에 죽기 어렵다. 자기 명도 지키지 못하면서 세상을 구하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쯤 되면,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이 더 잘 이해된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두려움과 쾌락으로부터의 해방, 이것이 자유의 경지이다. 이것은 수동적인 도피나 체념이 아니다. 내 안에 잠자고 있던 생명과 자연이 깨어날 때 비로소 가능한 세계이다.

그리스 정신을 잘 이해한 작가가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니코스 카잔차키스이다. 나도 그의 소설을 아주 좋아한다. 고대 그리스 정신을 잘 모르는 독자들은 이 소설을 '이상하다'고 말한다. 내가 좋아하는 이유는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의 성격과 행동에서 삶을 긍정하고 인생을 찬미하는 자세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 조르바에게 인생은 한바탕 추는 춤이다. 그에게 춤이란 무엇인지 묻자, 그는 일단 술 한잔 마시라고 권한다. 그리고 함께 들이킨 다음, 자신이 나가서 춤을 출 테니 보라고 한다. 춤에 대한 설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춤을 추는 것이다. 생각이 아니라, 행동을, 관념 속의 인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춤추고 있는 자기 인생을 직접 보여주는 것이다. 이게 인생을 긍정하고 삶을 찬미하는 그리스인의 정신이다. 오늘은 바다를 실컷 볼 생각이다. 그래 김명수 시인은 <발자국>을 공유한다. 내 삶의 '발자국 흔적"도 제주도 바다가 "아늑히" 품어 주었으면 한다.

발자국/김명수

바닷가 고요한 백사장 위에
발자국 흔적 하나 남아 있었네
파도가 밀려와 그걸 지우네
발자국 흔적 어디로 갔나?
바다가 아늑히 품어 주었네

나는 아침마다 내 일상을 지배하기 위해 우선 시 한편을 고르고, 그 시에 맞는 사진을 선택한 다음, 하나의 화두를 찾는다. 오늘 아침은 '유니크니스(uniqueness, 유일함)'이다. 나는 이것을 들뢰즈가 사용한 '단독성'으로 보기를 더 좋아한다. 이는 교환 불가능한 것이다. 대체 불가능한 고유성이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자기 스스로가 간절하게  바라고 원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그걸 찾아 균형점을 깨뜨려서 에너지를 일으킬 수 있는 작용이 있어야 한다. 잘 되고 안되고는 그 다음의 문제이다. 균형은 에너지가 필요하지 않은 상태이다. 자연은 균형을 유지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생명 현상은 그 균형을 깨는 것부터 시작된다.

‘바라고 원하는 것'은 남들과 경쟁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가급적 남들에게 도움이 되는 독보적인 것이어야 한다. 독보적이라는 것은 '유니크 하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있었던 것과 다른 것을 말한다. 그것이 새로운 엔트로피다. 그래서 힘이 된다. 많은 사람들에게도 힘이 된다. 나에게만 도움 되는 일은 이젠 그만하고, 경쟁에 지치지 말고, 가장 나다운 것이 남을 돕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왜? 다름으로 그 조직이나 사회를 더욱 빛나게 하니까 그렇다.

기존의 것을 잘 하겠다는 것은 단순하게 말하면 학습이다. 학습이 새로운 바램을 만드는 기반은 될 수 있어도, 학습 그 자체가 유니크니스(독창성)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남들이 만들어 놓은 발자국을 뒤따르는 것이다. 뒤따르는 것은 전술이다. 판을 새롭게 짜는 전략이 필요하다. 학습은 유니크니스(고유성, 단독성)를 만들어 낼 힘을 배양하는 과정일 뿐이다. 그러니 학습은 일상적이어야 한다. 늘 공부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면 안 된다. 그 공부로 뭔가가 생산되어야 한다. 그래 중요한 것이 글쓰기와 토론이다. 그러면서 앞으로 치고 나아갈 동력은 역시 ‘유니크하게 바라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야 남과 경쟁을 안 하게 된다. 그렇다고 서두를 필요가 없다. 인생은 경쟁이 아니라, 내 페이스로 가는 아름다운 모험이기 때문이다.

나는 '신 귀족'이다. '21세기 적 양반'이다. 이를 우리는 영어로 '노블레스 노마드'라 한다. 노블레스(noblesse)는 귀족이고, 노마드는 초원에서 이동하며 사는 유목민을 뜻한다. 들뢰즈가 썼던 용어이다. 노마드의 생활 철학을 '노마디즘'이라 한다. 노마디즘은 기존의 가치와 삶의 방식을 부정하고 불모지를 옮겨 다니며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는 일체의 방식을 의미하며, 철학적 개념 뿐만 아니라 현대사회의 문화 심리 현상을 설명하는 말로 쓰인다.

노마드의 라이프 스타일을 다룬 국내 첫 저작물 『디지털 시대의 엘리트 노마드』를 쓴 손승관 저자는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전환하면서 불가피하게 삶의 방식과 노마드적 삶으로 변화했다" 고 진단하고 아날로그 시대가 토지, 자본, 노동이라는 유형의 자산의 시대였다면, 디지털 시대는 지식, 기술, 정보라는 무형의 자산 시대라고 정의한다.

그럼 노블레스 노마드의 삶을 사는 사람들의 특징을 다음의 8 가지로 요약하였다. 나는 여기에 모두 속한다. 그래 나는 '신 귀족', '노블레스 노마드'이다.
(1) 그들은 일도 여가처럼 하고, 직장에서도 휴가지 에서처럼 산다.
(2) 그들은 매사에 창의적이다.
(3) 그들은 개인의 행복 추구가 우선이다.
(4) 그들은 인문학적 소양이 깊다.
(5) 그들은 소유 대신 경험을 중시한다. 가지는 것은 끝이다. 임대 비즈니스에 매달린다.
(6) 그들은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
(7) 그들은 상품 가치가 뛰어난 지식 사업가이다.
(8) 그들은 감성의 인적 네트워크를 한가지고 있다. 연줄은 가라! 그들은 생각이나 지향점이 같으면 형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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