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4.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11월 15일)
신명(神明)을 이야기 한다. (3)
노자의 <<도덕경>> 제1장에서 "無名, 天地之始 有名 萬物之母(무명, 천지지시 유명 만물지모)"라는 것을 우리는 읽을 수 있다. '이름이 없는 것은 천지의 시초이고, 이름이 있는 것은 만물의 근원이다'. 그리고 제21장에서의 "道之爲物(도지위물) 惟恍惟惚(유황유홀)"에서 만물의 시작인 "중보(衆甫, 만물의 근원)"를 접한 바 있다. 이렇게 '도' 자체는 보이지 않고, 만질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는 무엇이지만, 그 속에 들어 있는 형상, 질료, 속알 등이 서로 어울려 세상의 모든 것이 생겨나게 하고, 이런 뜻에서 '도'는 모든 것의 근원이며 시원이 된다는 것이다. 이를 노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自古及今(자고급금) 其名不去(기명불거), 以閱衆甫(이열증보)." '예로부터 이제까지 그 이름이 떠난 적이 없기 때문에 이로써 만물의 근원을 엿볼 수 있다'는 거다. 이런 '도'가 예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작용하고 있고, 한시도 그 작용을 쉰 적이 없다는 거다. 지금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이, 아니 우리 자신도 모두 '도'의 덕택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거다. 우리에게 만물의 깊이를 꿰뚫어볼 수 있는 형안만 있다면, 지금도 순간순간 작용하고 있는 '도', 만물의 시원이며, 우리 존재의 근거인 '도'를 알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중보(衆甫)"의 '보'에는 '시(始)'의 뜻이 있다고 한다. 우리가 황홀한 '도'를 체험할 때, 우리는 만물의 원초적 모습, '도'의 최초의 모습을 알고 싶어한다. 인간의 호기심은 항상 근원을 올라가는 습성이 있다. 따라서 만물의 처음, 만물의 근원을 알고 싶어하는 우리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以此(이차)" '이것으로 알 수 있잖아'이다. 즉 네 눈에 보이는 것이 다 '도'라는 거다. 이 세계의 모습이 바로 '도'의 모습이라는 거다. 이는 내가 좋아하는 '거피취차(去彼取此)'의 재선포라고 도올 김용옥 교수는 말한다. 어제 서울 한강 변을 산책하며 '고'의 모습을 보았다. 오늘 사진이 그 거다. 갈대를 만났다. 행사가 진행되는 도중에 밖으로 나와 실컷 걸었던 것이다.
어제 나는 갈대였다. 시인은 갈대처럼 "누추를 입고, 뼛속까지 바람의 지층이 나 있고, 바람의 목청으로 울다 이제는 꺾인" 아버지를 갈대 속에서 보았지만, 난 나를 봤다. 지금 시인이 서 있는 공간, 즉 폐염전과 빈 둑과 꺾인 갈대와 바람이는 이 공간이 마치 아버지라는 존재의 영역처럼 느껴졌던지 모르지만, 난 내 바람을 그 갈대 속에 넣었다. 왜냐하면 시의 마지막 문장처럼, 나는 그 바람을 다 걸어야했기 때문이다.
오늘 난 "갈대등본"에 또 한 줄 더 기록하고, 그 등본 한 통을 다시 가져오리라. 등본에 내 마음을 다 담고 싶다. 내 뼈 속에도 바람이 있다.
갈대 등본/신용목
무너진 그늘이 건너가는 염부 너머 바람이 부리는 노복들이 있다
언젠가는 소금이 설산(雪山)처럼 일어서던 들
누추를 입고 저무는 갈대가 있다
어느 가을 빈 둑을 걷다 나는 그들이 통증처럼 뱉어 내는 새떼를 보았다 먼 허공에 부러진 촉 끝처럼 박혀 있었다
휘어진 몸에다 화살을 걸고 싶은 날은 갔다 모든 모의(謀議)가 한 잎 석양빛을 거느렸으니
바람에도 지층이 있다면 그들의 화석에는 저녁만이 남을 것이다
내 각오는 세월의 추를 끄는 흔들림이 아니었다 초승의 낮 달이 그리는 흉터처럼
바람의 목청으로 울다 허리 꺾인 가장(家長)
아버지의 뼈 속에는 바람이 있다 나는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신명' 이야기로 돌아온다. 요즈음 카오스 이론에 의하면, 카오스 속에도 엄연한 코스모스가 들어 있다. 그러니 '것'이 있는 데, 그 '것'이 혼성된 것이다. 우리의 감각에 분별적으로 잡히지 않는 무형, 무명의 것이다. 그 무형의 혼성의 '것'은 하늘과 땅보다도 먼저 생겨났다는 거다. 따라서 "有物混成, 先天地生(유물 혼성, 선천지생)"에서 "유물혼성", 즉 '혼성된 것'은 어떤 초월적인 것이 아니라, "생"의 대상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니까 '혼성된' 그것의 생명적 우주의 프로세스(process, 과정)의 한 측면을 말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혼성된 것, 혼돈의 그것은 무엇보다도 천지(天地)보다 먼저 생겨났다는 거다. 여기서 천지는 하나의 단일 개념, 건(乾)과 곤(坤), 양과 음, 혼(魂)과 백(魄), 신(神)과 정(精), 기(氣), 혈(血), 시간과 공간, 남성과 여성, 강강과 유약 등의 생성의 양면을 나타내고 있는 상징체계로 읽어야 한다고 도올은 강조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노자가 말하는 혼성된 것(카오스)는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 내에서 생육하는, 사는 과정인 것이다. 여기서 "생"을 '낳다' 또는 '발생시킨다'고 읽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노자의 세계관에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무로부터의 창조'는 허용되지 않는다. '무형으로부터 유형으로의 생성'이 있을 뿐이다. 도올은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쌍방적 전이'가 있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최진석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도는 이 세계가 반대되는 두 대립항이 서로의 존재 근거를 나누어 가지면서 꼬여 있음을 말하는 범주이다. 따라서 도는 이 세계의 순수 단일성이나 일원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서로 관계 속에 잡종처럼 얽혀 있음을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혼성(카오스)라는 거다. 그러므로 카오스 상태에서 질서의 상태로, 무형질의 상태에서 유형질의 상태로의 이행 과정으로 노자의 철학을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라 최 교수는 강조한다.
신명은 기이다. 천지신명은 하나이다. <태일생수>에서 태일이 물을 낳고, 물과 태일이 사로 도와 천지신명(천지신명)을 낳았다고 말한다. <<태일생수>>는 <<노자>>의 한 부분이었거나, <<노자>>와 같이 융합할 수 있는 동질적 사유의 문헌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1993년에 초묘(楚墓)에서 발견된 죽간(竹簡)에 나오는 <<태일생수(太一生水)>>라는 말이 생각난다. ""태일(太一)은 물을 생한다. 생(生)하여진 물은 생하는 태일(太一)을 오히려 돕는다. 그리하여 하늘을 이룬다. 하늘 또한 자기를 생한 태일(太一)을 오히려 돕는다. 그리하여 땅을 이룬다. 이 하늘과 땅이 다시 서로 도와서 신명(神明)을 이룬다. 신(神)과 명(明)이 다시 서로 도와서 음양을 이룬다. 음과 양이 다시 서로 도와서 네 계절을 이룬다. 이 네 계절(춘하추동, 春夏秋冬)이 다시 서로 도와서 차가움과 뜨거움(창열, 凔熱)을 이룬다. 차가움과 뜨거움이 다시 서로 도와서 습함과 건조함(습조, 溼燥)을 이룬다. 습함과 건조함이 다시 서로 도와서 한 해(세, 歲)를 이루고 이로써 우주의 발생이 종료된다." 여기서 "태일"은 "도"이다.
꼼꼼하게 여러 번 읽으면, 변하면서 변하지 않는 나무의 신록을 읽을 수 있다. 복잡한 것 같지만, 논리 정연하다. 그 진행 순서는 다음과 같다: 태일(太一) → 수(水) → 천(天) → 지(地) → 신명(神明) → 음양(陰陽) → 사시(四時) → 창열(凔熱) → 습조(溼燥) → 세(歲)
그렇지만 생의 과정은 모든 단계에서 동시적으로 상보(相輔) 관계를 이루고 이룬다. "생(生)"의 과정은 반드시 "복상보(復相輔)"라고 하는 역의 관계를 동시에 수반한다. 이 점을 간과하면 안 된다. 흥미롭다. '"복상보"의 논리'에 따르면 내가 나의 자식을 생한다면, 나의 자식은 동시에 나를 생하여야 한다는 거다. 태일이 물을 생한다면 물은 동시에 태일의 생성을 도와 하늘을 생한다. 하늘은 동시에 태일의 생성을 도와 땅을 생한다. 하늘과 땅은 서로가 서로의 생성을 도와 가믈한 신(神)을 생하고 밝은 명을 생한다. 이렇게 전개되어 나가는 전 과정의 특징은 아무런 항목도 실체화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올 김용옥이 강의에서 한 말이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본다. "태일이라는 실체가 물이라는 실체를 탄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태일과 물은 상호 교섭하는 관계일 뿐이며, 그 관계는 끊임없이 서로를 포섭하고 서로가 대자(對者)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항목, 즉 천과 지를 생성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천과 지도 실체가 아닌 교섭의 과정적 사건일 뿐이며 그것은 신명을 생성시키고, 신명은 다시 음양을 생성시키고, 음양은 다시 춘하추동을 생성시키고, 춘하추동은 다시 창열(차가움과 뜨거움)을 생성시키고, 창열은 다시 습조(습합과 건조함)를 생성시킨다. 이 모든 존재(Being)의 과정이 아닌 생성(Becoming)의 과정은 결국 무엇으로 귀결되는가? 그 귀결처를 <<태일생수>>의 저자는 '세(歲)'라고 보았다." 그러니 가는 세월을 걱정할 필요 없다. 이루어질 일은 다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우리 인생의 시간은 물의 시간이다. 우리는 물과 더불어 살고 물과 더불어 투쟁한다. 물이 없어도 죽지만, 물이 너무 많아도 죽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히 해야 할 것은, <<태일생수>>의 저자가 이 세계의 가장 보편적인 현상의 기조를 "물(水)"이라고 보았지만, 그 물은 태일(太一, '도'의 다른 이름)과의 관계에서 천지만물의 모든 현상을 생성시키는 비실체적 사건일 뿐, 그 나름대로 원질을 형성하는 존재의 대상이 아니라고 보았다는 점이다. 그런 데 그 물의 궁극적 귀결처가 '세(歲)'이다. 여기서 '세'라는 것은 일 년이지만, 농경사회에 있어서 일 년은 곧 영구한 시간을 의미한다. 계절로 이루어지는 세의 반복이 곧 시간이 것이다.
고로 물은 곧 시간의 창조주인 것이다. 물은 태일을 상보(相輔=反輔, 반보)하여 천지를 생성시키고, 천지는 물에 힘입어 결국 차가움과 따뜻함, 습함과 건조함의 변화를 일으키고 그 변화가 인간에게 시간으로 인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은 물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물의 한열조습이 우주와 인체와 사회의 리듬을 형성하는 것이다. 놀랍다. 그러니까 물은 모든 존재에 스며 있으며 그것은 생명의 원천이며 시간의 본 모습이다. 한강의 강물을 보면서, 이런 생각들을 소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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