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오늘 글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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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2년 11월 15일)
오늘은 노자 <<도덕경>> 제50장을 읽는다. 마음의 근육을 키우고 싶다. 가을 타는가, 좀 우울한 요즈음이다. 제50장의 제목은 다양하게 붙일 수 있다. '죽음의 자리를 피하려면 삶에 대한 집착을 버려라.' 본문 중, "생생지후(生生之厚)"에 방점을 찍는 거다. '삶에 대한 집착이 죽음의 땅으로 인도한다'는 거다.
出生入死(출생입사) 生之徒十有三(생지도십유삼) 死之徒十有三(사지도십유삼) 人之生(인지생) 動之死地(동지사지) 亦十有三(역십유삼) 夫何故(부하고) 以其生生之厚(이기생생지후): 사람의 일생은 삶으로 나왔다가 죽음으로 들어간다. 태어나는 사람이 삼분의 일이고, 죽는 사람이 삼분의 일이며, 태어나서 살다가, 죽을 자리로 움직이고 있는 사람도 역시 삼분의 일이다. 왜 그러한 가? 모두 삶에 대한 집착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일생을 대체로 삼 등분하여 처음은 삶에 대한 관심만으로 사는 삶, 끝은 죽음을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 그 중간은 삶에 대한 관심만으로 사는 삶에서 죽음을 생각하면서 사는 삶으로 옮겨 가는 중간 단계의 삶 등으로 나눈다는 이야기로 보통 읽는다. 조금 다른 결의 버녁을 읽어 본다.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서 죽음으로 들어간다. 사는 길로 가는 무리가 열에 셋', 죽는 길로 가는 무리가 열에 셋, 사는 길로 가다 죽는 길로 가는 무리가 또한 열에 셋이다. 무슨 이유로 죽음의 길로 가는 사람이 많을까? 자기 생에 대한 집착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열명 중 여섯 명은 죽음의 길로 가는 꼴이다. 인간은 모두 살고 싶어하는 데 왜 죽음의 길로 가는 사람이 더 많을까? 자기 삶에 대한 욕망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오히려 죽음의 길로 가는 것이다.
"생생지후"는 '생에 대한 욕망이 강한 것'이다. 경쟁에서 이기려 하고, 더 많이 가지려 하고, 더 높이 올라가려 하는 탐욕이 결국 사람을 죽음의 길로 가게 한다는 거다. 소박한 삶을 버리고 욕망과 탐욕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결국 죽음의 길로 가는 사람이다. 물론 인간은 생에 대한 본능, 즉 생존 본능에 충실하다. 그러나 문제는 과잉 욕구이다. 우리 주변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돈을 통장에 과도하게 쌓아야 성공이라고 착각하고, 사치와 방탕을 욕망의 실현이라고 생각하며 죽음의 길로 가는 사람이 많다. 노자는 당시 지도자가 전쟁을 통해 땅을 넓히고, 세금을 걷어 궁전을 짓고, 부역을 동원하여 성을 쌓는 일이 모두 자기 생명에 대한 집착이 강해서 그렇다고 생각한 것 같다.
도올 김용옥은 좀 다르게 풀이를 한다. 그는 우선 <<장자>>의 <지북유>에 나오는 말로 시작한다. 나도 좋아하는 말이다. "人之生, 氣之聚也, 聚則爲生, 散則爲死(인지생, 기지취야, 취즉위생, 산즉위사)." '사람의 생명은 기의 모임일 뿐이다. 지가 모이면 생(生)이 되고, 기가 흩어지면 사(死)가 된다'는 말이다. 이는 생과 죽음이 실체화되지 않고, "미세한 가루와 같은 기의 뭉침과 흩어짐으로 설명"(김용옥)되는 거다. 쉽게 말해, 삶과 죽음은 실제적으로 허명일 뿐이고 실제로는 기의 뭉침과 흩어짐만 있는 것이다.
"출생입사(出生入死, 삶의 자리에서 나오면, 죽음의 자리로 들어가게 마련이다)를 왕필은 "출생지입사지(出生地入死地)"로 주석을 달았다. 생(生)과 사(死)는 생지(生地, 삶의 자리)와 사지(死地, 죽음의 자리)로 이해하는 거다. 그러니까 생과 사는 단절적인 시간의 사태가 아니라, 그것은 기의 상태로써 서로 얽혀 있는 과정인 것이다. 도올에 의하면, 노자에게 있어서 죽음은 관념이 아니라, 삶을 구성하는 기(氣)의 한 방식일 뿐이라는 거다. 그러니까 우리가 살아 있는 것 자체에도 삶의 무리가 한 30% 되고, 죽음의 무리가 한 30% 된다고 하는 거다. 기의 취(聚)와 산(散)은 전체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역의 효상(爻相)처럼 부분적으로 얽혀 있는 것이다. '취'쪽으로 기의 움직임이 활발하면 우리는 건강한 것이고, '산'쪽으로 기의 쏠림이 일어나면 우리는 건강치 못한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은 기의 취와 건강한 조화를 유지하려는 노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거다. 나이가 들때까지 기취(氣聚)의 삶의 자리를 최대한 조화롭게 유지하다가 죽음의 자리에 바톤을 넘겨주는 자가 성인(聖人)이고 도를 깨우친 도인(道人)이라는 거다.
그러니 삶과 죽음에 구애 받지 않고 초연한 태도를 취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다고 본다. 사실 비이분법적으로 볼 때 삶과 죽음은 모두 '하나'에서 만나는 것으로서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한 가지 사물의 양면 정도에 불과하다. 물론 그렇다고 죽음을 찬양하거나 권장하는 것은 아니다. 죽음이든 삶이든 어느 하나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蓋聞善攝生者(개문선섭생자) 陸行不遇虎兕(육행불우호시) 入軍不被甲兵(입군불피갑병) 兕無所投其角(시무소투기각) 虎無所措其爪(호무소조기조) 兵無所容其刃(병무소용기인) 夫何故(부하고) 以其無死地(이기무사지): 대체로 볼 때 섭생을 잘하는 사람은 육지에서 다녀도 호랑이나 코뿔소를 만나지 않고, 군대에 들어가서도 상대편의 습격을 당하지 않는다. 코뿔소는 그 뿔로 들이받을 곳이 없고, 호랑이는 그 발톱으로 할퀼 곳이 없고, 병사는 그 칼로 찌를 데가 없다. 왜 그러한 가? 그에게는 죽음의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박재희 교수의 번역을 공유한다. '내가 알기로, 생을 보존하는 자는 산길에 다녀도 코뿔소와 호랑이를 만나지 않고, 전쟁에 참전해도 무기를 들지 않는다. 코뿔소는 그 뿔을 들이받을 곳이 없고, 호랑이는 그 발톱을 할퀼 곳이 없다. 무슨 이유인가? 죽음의 땅에 애초부터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사는 길로 가는 사람은 호랑이(虎)나 코뿔소(兕)의 공격을 받지 않는다. 애초부터 호랑이나 코뿔소가 나오는 사지로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호랑이 발톱이 할퀼 수 있는 상황이 없고, 코뿔소 뿔이 들이받을 일이 없는 것이다. 사지(死地)에 들어가지 않으니 죽을 일이 없는 거다. 이런 사람을 소국적인 삶을 살아간다고 비난할 수도 있다. 노자는 강하면 부러지고, 강한 사람은 제 명에 죽지 못한다고 했다. 부드러움과 유연함만이 생지(生地)로 들어가는 방법이다. 노자의 '반(反) 철학'이다.
그리고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생과 사, 삶과 죽음에 관계되는 모든 욕심이나 집착의 줄을 끊고 초연해진 사람만이 욱지에 다니든 전쟁터에 나가든 해를 두려워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거다. 자신의 소아(소아)를 먼저 죽이는 거다. 그럴 때 우리의 작은 자아, 작은 목숨에서 해발될 때 큰 자아, 큰 목숨과 하나가 되고, 이렇게 하나된 상태에서는 해받을 곳이 없다. 이런 상태에서는 '죽음의 자리'가 별도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의 일생은 태어나서 살다가 죽음을 맞는다. 이 세 단계를 단순 삼등분 하면 탄생이 삼분의 일, 삶이 삼분의 일, 죽음이 삼분의 일이다. 세 사람 중 한 사람은 태어나고, 한 사람은 살아가고 있고, 한 사람은 죽음의 문턱에 이른다. 탄생과 죽음이 각각 삼분의 일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숙명적으로 정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내 안에도 탄생과 죽음 그리고 그 사이에 삶이 공존한다.
문제는 탄생과 죽음의 가운데에 있는 삶의 시기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시기는 바로 이 시기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간 과정의 이 삶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하루하루 죽음의 문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을 뿐인지 모른다. 그래서 죽을 자리로 움직이고 있는 사람 역시 삼분의 일이라고 한 것 아닐까? 그 이유와 해결 방법이 제50장의 주된 메시지다. 노자는 사람들이 삶을 제대로 향유하지 못하고 하루하루 죽을 자리로 나아가고 있는 이유를 삶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서 찾은 것 같다. <<도덕경>> 전편에 흐르는 역설의 미학이 삶과 죽음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삶을 누리려면 삶에 집착하는 것이 마땅한데, 노자는 거꾸로 삶에 대한 집착을 끊는 것이 삶을 제대로 향유하는 길이라고 말한다.
어느 의미에서 우리의 삶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기간을 소비하면서 죽어가는 것이다. 살아가는 연습도 중요하지만 죽어 가는 연습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주어진 사람을 성실하고 아름답게 살지만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 의연함을 가져야 한다. 그게 삶을 제대로 향유하는 길일 것이다.
삶에 대한 집착은 생명에 대한 집착과는 그 의미가 다르다. 노자가 말하는 집착은 재물이나 권력에 대한 과도한 욕심을 말한다. 내 몸에 금은보화를 지니고 있지 않으면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날 일도 없고, 권세 있는 자리에 있지 않으면 비방 받을 일도 없다. 호랑이나 코뿔소를 만나도 들이받을 곳이 없다 거나 상대편 병사가 칼로 찌를 곳이 없다는 문장은 이런 의미로 쓰였다. 욕심을 내려놓으면 화를 당할 일도 없고 그런 사람에게는 죽음의 자리가 없다.
지난 달에 이미 했던 이야기이다. <<도덕경>>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 "덜어내고 덜어내면 무위에 이르고, 무위하면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다." "損之又損(손지우손) 以至於無爲(이지어무위) 無爲而無不爲(무위이무불위)"이다. 여기서 '무위'를 아무 것도 하지 않거나 무슨 일이건 그냥 되어가는 대로 내버려주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노자가 하고 싶었던 말은 '무위'가 아니라 '무불위(되지 않는 일이 없음)'라는 효과를 기대하는 거였다. 어쨌든 비우고 덜어내 텅 빈 고요함에 이르면, 늘 물 흐르듯 일상이 자연스러워진다. 그런 사람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뿐 포장하지 않으며, 순리에 따를 뿐 자기 주관이나 욕심을 고집하지 않는다. 그 결과 그의 모든 행위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항상 자유롭고 여유롭다. 샘이 자꾸 비워야 맑고 깨끗한 물이 샘 솟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만약 비우지 않고, 가득 채우고 있으면 그 샘은 썩어간다. 그러다 결국은 더 이상 맑은 물이 샘솟지 않게 된다.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마음을 자꾸 비워야 영혼이 맑아진다.
그 맑은 영혼으로, 나는 남들과 다른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을 테다. 나는 남들보다 더 똑똑하거나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지금 있는 이 곳에서 느리게, 편안하게, 천천히 생을 만끽하며 그냥 시시하게 살고 싶을 뿐이다. 멋진 시를 만났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이 시를 소개한 반칠환 시인의 덧붙임 명품이다. "사치의 감각". 사치(奢侈)라는 말의 사(奢)는 물건을 많이(大) 모은다(者)는 뜻이고, 치(侈) 역시 물건을 많이(多) 모은 사람(人)을 뜻한다. 시를 끝까지 읽어본다. 결국 진정한 사치는 자기가 빛나는 것이라 한다. 진정한 멋은 최고의 단순함이다.
진정한 멋/박노해
사람은 자신만의
어떤 사치의 감각이 있어야 한다
자신이 정말로 좋아하는 것을 위해
나머지를 기꺼이 포기하는 것
제대로 된 사치는 최고의 절약이고
최고의 자기 절제니까
사람은 자신만의
어떤 멋을 간직해야 한다
비할 데 없는 고유한 그 무엇을 위해
나머지를 과감히 비워내는 것
진정한 멋은 궁극의 자기 비움이고
인간 그 자신이 빛나는 것이니까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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