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7.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7월 31일)

7월의 마지막 날이다. 칠월은 한가해 어정거린다'는 '어정칠월'이 이렇게 지나간다. 정말 덥다. 오늘도 어제에 이어 <<장자>> 외편 <달생>에 나오는 '목공'이야기를 계속한다. 다음은 어제 못다한 이야기가 마지막 3단계이다
"[3단계] 이때가 되면 마음에는 이미 조정의 일은 아랑곳없고 오로지 자신의 기예에만 전념하며 외부로부터 방해가 사라집니다. 그런 다음에 숲으로 들어가 타고난 재질과 생김새가 빼어난 나무를 찾았습니다. 그런 다음 완성 될 종 틀을 머리에 그려보고 그러고 나서 비로소 일을 시작합니다. 그렇지 않으면[그 나무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만둡니다. 이렇게 하면 저의 천성과 나무의 천성이 하나가 되는데, 작품이 귀신의 솜씨로 의심되는 것은 이 때문인가 봅니다."
▪ 3단계: 좀 쉽게 번역한다. "그때쯤 왕과 궁중에 대한 모든 생각이 사라졌습니다. 그 일에 방해가 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저는 오로지 종 틀에만 생각을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숲으로 가서 자연 그대로의 나무를 살펴보았습니다. 바로 그 나무가 내 앞에 나타났을 때 분명 의심의 여지없이 그 안에 종 틀도 나타났습니다. 제가 해야 할 거라고는 단지 손을 내뻗어 일을 시작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그 나무를 만나지 못했다면 이 종 틀 또한 결코 없었을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었겠습니까? 저의 생각이 집중되어서 숲에 감춰진 가능성을 만났습니다. 이 생생한 만남에서 사람들이 귀신의 조화로 여기는 작품이 나온 것입니다.""
여기서 "왕과 궁중에 대한 모든 생각이 사라졌습니다. 그 일에 방해가 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는 말은 이렇게 바꿀 수 있다. '솔직히 말해 조직이 있다는 것조차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혼의 명령보다 상사나 회사의 관행을 따른다면 진실하고 아름다운 것을 창조할 수 없다.
그리고 "저는 오로지 종 틀에만 생각을 집중하게 되었습니다"는 목수 경은 우리가 종종 그렇게 하듯 '생각을 집중해서 종 틀을 만들기 위한 완벽한 계획을 짰습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목수 경은 자신이 어떤 의도도, 에고도 잊었다는 걸 암시하면서, 그 자신을 더 큰 진
실로 연결함으로써 자신의 작품에 형태를 부여하였다.
그리고 "숲으로 가서 자연 그대로의 나무를 살펴보았습니다. 바로 그 나무가 내 앞에 나타났을 때 분명 의심의 여지없이 그 안에 종 틀도 나타났습니다. 제가 해야 할 거라고는 단지 손을 내뻗어 일을 시작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충실하고 적절하게 수행한 내면의 여행은 늘 우리를 다시 행위의 세계로 데려간다. 그때는 자신이 내면의 여행을 하기 전과는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목수 경은 자신에게 진실하기에 숲 속으로 걸어가면서 각 나무의 참본성을 볼 수 있다.
모든 사람에게는 그 나무와 상응하는 게 있다. 부모에게는 아이, 교사에게는 학생, 관리자에게는 고용인, 작가에게는 언어, 정비공에는 기계가 그것이다. 우리가 자신을 투명하게 보지 못하면 다른 것들도 '유리를 통해 어렴풋하게만'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의 정체성을 좀 더 분명히 인식하면 다른 것들의 정체성도 좀 더 분명히 할 수 있다. 이처럼 참된 앎 안에서 참된 상호 창조가 이루어진다.
제가 그 나무를 만나지 못했다면 이 종 틀 또한 결코 없었을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었겠습니까? 저의 생각이 집중되어서 숲에 감춰진 가능성을 만났습니다. 이 생생한 만남에서 사람들이 귀신의 조화로 여기는 작품이 나온 것입니다."
여기서 "제가 그 나무를 만나지 못했다면 이 종 틀 또한 결코 없었을 것입니다"라는 말로 우리 프로 근성의 중심에 놓인 자만에 도전한다. 그 자만은 정교한 지식, 훌륭한 도구, 자신의 의지를 부과할 힘만 주어진다면 세상의 "원료"로부터 언제라도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목수 경은 다르게 알고 있다. 모든 훌륭한 정원사, 도공, 교사, 부모가 그렇듯, 그는 나무가 자신이 원하는 어떤 형태로든 바꿀 수 있는 단순한 원료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원하는 결과를 얻으려면 그것들과 더불어 상호 창조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훌륭한 작업은 상호 관계하는 것이고, 그 결과는 서로가 서로에게 무엇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는 거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종 틀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나무를 베어야 한다는 거다. 이 문제는 나비에게 억지로 생명을 주려 하는 카잔차키스의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과 다르지 않다. 그의 이야기를 다시 공유한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한 대목이다. "어느 날 아침, 나는 한 나무 등걸에서 나비가 나오기 위해 막 구멍을 뚫어놓은 듯한 번데기를 발견했다. 나는 한참 기다렸으나 어떠한 조짐도 보이지 않아 조바심이 났다. 나는 허리를 굽히고 그 위에 입김을 불어 번데기를 좀 더 따뜻하게 했다. 내가 열심히 입김을 불어넣은 덕택에 기적이 내 눈앞에서 빠르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집이 열리고, 나비가 천천히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날개가 뒤로 접히고 구겨져 있는 걸 본 그 순간의 공포를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그 가여운 나비는 날개를 펴려고 필사적으로 버둥거렸다. 나는 또 다시 몸을 숙야 열심히 입김을 불었다. 그러나 허사였다. 그 놈은 번데기에서 천천히 나와야 할 필요가 있었고, 날개의 펼침은 햇빛 속에서 점진적으로 일어나는 과정이어야 했다. 그러나 이제는 너무 늦었다. 내 입김 탓에 나비는 때가 되기 전에 날개가 완전히 구겨진 채 억지로 집에서 나오게 된 것이었다. 그 놈은 절망으로 파닥거렸고, 몇 초 후 내 손바닥에서 죽었다. 나는 그 나비의 시체만큼 내 양심에 무거운 짐은 없다고 믿는다. 자연의 위대한 법칙을 거스르는 게 얼마나 무서운 죄인지를 깨달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두르지 말아야 하고, 조바심 내지 말아야 하고, 영원한 리듬에 공손히 순응해야 한다."
그 훌륭한 일은 위험한 사업이다. 내가 실패할지 모른다는 위험을 인식하면, 우리는 두려움 때문에 쉽게 얼어붙을 수 있다. 그러나 목수 경은, 이 때, 제가 해야 할 거라고는 단지 손을 내뻗어 일을 시작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라 말한다. 이는 실패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즉시 자신의 손을 내뻗어 다시 시작하는 행위야 말로 진정으로 용기 있는 행위일 수 있다는 거다.
그러나 목수 경의 마지막 말, "이 생생한 만남에서 사람들이 귀신의 조화로 여기는 작품이 나온 것입니다"는 우리를 두려움 너머로, 다시 희망에 찬 문제의 중심으로 초대한다. 이러한 생생한 만남에서 둘 이상, 즉 목수와 나무, 끄는 자와 이끌리는 자의 충만한 힘이 협력해서 작용한다. 이러한 협력이 우리의 일상에서 자주 일어나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 생생한 만남은 예측할 수 없고, 도전적이고, 위험하다. 그것은 어떠한 보증도 없고, 따라서 서로를 대상으로만 다루는 저 '둔탁한 충돌'보다 주변에서 찾아보기가 훨씬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생생한 만남은 우리에게 둔탁한 충돌이 가져다 주지 못하는 어떤 것을 제공한다. 이런 생생한 만남이야 말로 삶을 살만하게 만드는 생명력으로 충만해 있고, 가치 있는 일을 할 가능성을 높여주는 것이다,
목수 경의 이야기는 삶과 내가 하는 일에 대해 많은 통찰을 주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장자가 주장하는 "오상아", "심재"등을 내 삶에 적용하려고 늘 다짐한다. <<장자>>는 여러 곳에서 말한다. '명(命)'은 피할 수 없는 것이므로 이를 억지로 거역하지 말고 편안한 마음으로 수용하라고 한다. 이른바 안명론(安命論)/순명론(順命論)이다. 이것은 우리의 운명이 모든 면에서 조금도 움직일 틈이 없이 꽉 짜여 있다는 것을 철학적으로 논증하고 그것을 꼼짝 없이 그대로 믿는 '운명론(運命論)'이나 '숙명론(宿命論)'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안명론은 니체가 말한 '운명을 사랑함(amor fati)'과 비슷하다. <<장자>>라는 책에 흐르는 중심은 다음과 같은 말들로 이해하고 있다.
(1) 망아(忘我): 자기 자신을 잊어 버리다.
(2) 승물유심(乘物遊心): 노니는 마음으로 세상의 파도를 타다. 사물이나 일의 변화에 맡겨 조화를 이룸으로써 마음을 노닐게 한다.
(3) 탁부득이(託不得已) 양중(養中): 어찌할 수 없음에 맡김으로써 중(中)을 기른다. '탁부득이'는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은 그냥 내버려 둠으로써 자신의 한계를 깨닫는 삶의 방식이다. 세상 일에 한계가 있음을 알고 내면의 세계를 어디에도 기울이지 않고 중(中)을 지켜 나가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세 가지를 한 마디로 말하면, '무위(無爲)의 가르침'이다. 모든 것을 억지로 하거나 꾸며서 하지 말고, 순리대로 자연스럽게 행동하라는 것이 '무위의 가르침'이다. 이는 억지로 꾸민 말, 과장한 말, 잔재주를 부리는 간사한 말, 남을 곤경에 몰아넣으려는 말, 남을 억지로 고치려는 말 등을 삼가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제시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1) 마음이 사물의 흐름을 타고 자유롭게 노닐도록(遊心, 유심) 하십시오.
(2) 부득이 한 일은 그대로 맡겨 두고(託不得已, 탁부득이),
(3) 중심을 기르는 데(養中, 양중) 전념하십시오,
(4) 그저 그대로 명을 받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명은 피할 수 없는 것이므로 이를 억지로 거역하지 말고 편안한 마음으로 수용하라는 말이다. 이를 우리는 '안명론(安名論)'이라 한다. 니버의 기도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주님 제가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화를 주시고,
제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주시며
이 둘을 구별하는 지혜를 주소서."
나는 작년에 이런 기도를 만들었다. 올해도 잘 기억할 생각이다.
주님 늘 '역경을 이기긴 쉬워도 풍요를 이기긴 어렵다'는 말을 기억하게 하소서.
주님 '우리가 가진 것을 사랑하면 행복하고 못 가진 것을 사랑하면 불행하다'는 말을 잊지 않게 하소서.”
주님 '사람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과 가질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여기서 머춘다. 오늘은 유성구 평생 학습관에 강의를 가야 한다. 그래도 꾸준히 강의가 들어 오니 참 행복하다. 내일이면, 벌써 8월이다. 오늘 화두처럼, 모든 것들과 "생생한 만남"을 하는 8월이었면 한다. 인간은 '만남'을 통해 자기 한계를 극복하는 초월적 존재가 된다. 그런데 어떻게 만나느냐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 만남의 방향에 따라 몸의 파동이, 삶의 동선이, 운명의 변곡점이 바뀔 수 있다. 오늘 사진처럼, 잘못된 만남이 없는 8월이었으면 한다.
만남/정채봉
가장 잘못된 만남은 생선과 같은 만남이다
만날수록 비린내가 묻어 오니까
가장 조심해야 할 만남은 꽃송이 같은 만남이다
피어 있을 때는 환호하다가 시들면 버리니까
가장 비천한 만남은 건전지와 같은 만남이다
힘이 있을 때는 간수하고 힘이 다 닳았을 때는 던져 버리니까
가장 시간이 아까운 만남은 지우개 같은 만남이다
금방의 만남이 순식간에 지워져 버리니까
가장 아름다운 만남은 손수건과 같은 만남이다
힘이 들 때는 땀을 닦아 주고 슬플 때는 눈물을 닦아 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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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글들은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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