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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어떤 상황에서도 절제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참 멋진 태도이다.

2728.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2024년 5월 23일)

나를 소모하지 않는 현명한 태도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게 겸손이라는 거다. 이는 사람들의 태도만이 아니라, 소비 상품에도 적용된다. '강제성이 없는 것', 신뢰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소중한 것'이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 쉽사리 드러나지 않는 것을 좋아한다. 사실 진정한 의미의 겸손은 바로 그 과소평가라는 것에 무게를 두고 있다.  나서지 않고 늘 소박하고 겸손하게 행동하는 사람은, 자기가 할 일을 끝내면, '별 것 아닙니다'라고 말을 한다.

노자가 말한 "功成而不居(공성이불거)(<<도덕경>> 제2장)"가 생각난다. 이 말은 "공이 이루어져도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한다"는 거다. 자신이 공을 쌓고 그 공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거다. 쉽게 말하면, 무엇을 해 놓고도 뽐내지 않는다는 거다. 내가 무엇을 성취한다 할지라도 그 열매를 독차지하고, 그 성과를 따먹으면서, 그 성과 속에서 안주하는 삶의 태도를 근원적으로 벗어 내버리는 거다. 이는 공(功)을 이룬 다음에 바로 다음 공(功)을 향해 나아 가는 동사적 태도이다.

그 다음 내가 좋아하는 말이 "생이불유(生而不有)"(<<도덕경>> 제2장)이다. 이 세상의 모든 부모들은 기억해야 할 말이다. 자식을 낳았지만, 그 자식을 소유하려 하지 말아야 그게 도(道)라는 말이다. 내가 자식을 생하였다고 해서 소유할 수 없는 것이다. 최초로 부모의 생식 세포 염색체의 결합으로 접합체가 이루어지고 세포분열이 계속되어 엠브리오(싹)가 형성되어 태아로 발달해가는 과정을 거치지만 그 모든 생성과정이 고정된 실체의 연속태가 아니며, 수없이 다양한 이견을 파지(把持)해가면서 전개되어 가는 것이다. "생이불유"는 자연의 철칙이고, 만물의 생성 과정의 자연태(自然態)이다.

지난 주말에 읽은 마티아스 뉠케의 <나를 소모하지 않는 현명한 태도에 관하여>>는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품고 있는' 태도 이야기를 하였다. 사실 살면서 태도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기분은 선택할 수 없어도 태도는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는, 그것을 마주한 인간의 역량을 측정하는 시험(試驗)이다.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은 가치중립적이다. 그것들은 행운이고 동시에 불행이다. 그것들은 희망이며 절망이다. 그러나 내가 그 사건-사고에 대하는 태도에 따라, 그것이 행운이 되기도 하고 불행이 되기도 할 것이다. 태도(態度)는 곰(熊)의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헤아리는 마음이다. 내가 보는 모든 것은 내가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 있다. 태도(attitude)의 문제이다. 사람은 태도이다. 한 순간 한 순간 살아가느냐, 죽음으로 밀려가느냐는 건 태도의 문제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절제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참 멋진 태도이다. 조용하고 소박하게 느껴지지만 결국 이 태도는 스스로의 가치를 소모하지 않고 현명하게 높이는 길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자기도취에 빠져 허우적대는 시끄러운 사람들의 반대 편에서, 조용히 자신의 존재감을 빛내며 능력을 발휘하고 신뢰감을 얻는 현명한 길에 대해 살펴 볼 생각이다. 이러한 현명함은 말로만 요란하게 떠드는 사람들의 허울보다 더 필요하고 중요하기 때문이다.

드러내지 않아도 빛나는 현명한 삶의 방식으로 우선 보여주기 위한 것들과 결별하라고 한다.  자신의 생각이 분명하고 내면의 힘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명함을 금박으로 치장하려는 생각 따위를 하지 않는다는 거다.

지금 세상은 과하게 포장된 차량들이 넘쳐나고, 무례함이 솔직함으로 둔갑되어 있다. 쌀 한 톨도 손해 안 보려고 가장 먼저 앞자리를 차지하고 앉는 사람들이 주목 받고 있다. 이 땅에 사는 인구수보다 더 많은 스마트폰이 생겨났지만, 그걸로 나누는 대화는 위로가 되지 않는다. 변화가 도처에서 떠들썩하다. 그러면 긍정 환상을 찍어대는 공장이 되었다. 모든 걸 다음과 같이 단순화시킨다. 그리고 그걸 사유하지 않고 떠벌리며 다른 이에게 충고한다. 자신은 행동하지 않고 말로만. "돈 걱정이 많다고요? 그럼 부동산, 원자재, 유가증권을 사세요, 백만 장자가 될 수 있습니다." "아프다 고요? 그럼 습관을 바꾸고, 하루에 물 3리터를 마시고, 아름다운 것만 생각하세요." "아직 결혼 상대를 못 찾았다고요? 그럼 마법 같은 문장들을 외우세요. 반드시 결혼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을 쓰다 보니, 다음 시가 소환된다. "더 빨리 흐르라고/강물의 등을 떠밀지 말라./강물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사진은 감 꽃이다. 나는 세상에서 희생이라는 말을 몸으로 실천하는 것이 감나무라고 본다. 자기 것을 다 쏟아내고, 비우면서 저 붉은 열매, 감을 세상에 보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붉은 열매를 맺을 꽃이다. 꽃이 소박하다.


또 다른 충고들/장 루슬로(프랑스 영화감독이자 시인)

다친 달팽이를 보거든
도우려 들지 말라.
스스로 궁지에서 벗어날 것이다.
성급한 도움이 그를 화나게 하거나
다치게 할 수 있다.

하늘의 여러 별자리 가운데서
제자리를 벗어난 별을 보거든
별에게 충고하지 말고 참아라.
별에겐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라.

더 빨리 흐르라고
강물의 등을 떠밀지 말라.
강물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1990년대부터 아직까지 '긍정적인 사고'를 우리는 중요시 한다. 특히 미국의 윌리엄 제임스는 '긍정'을 '마인드 치료 운동'이라고 불렀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해악과 질병의 원인은 정신적인 문제에 있다고 생각했다. 부정적인 사고는 신을 부정하는 것이며, 곧 죄악이라고 여겼고, 반대로 항상 긍정적인 면을 바라보는 사람은 편해질 수 잇고, 신체적으로도 건강해 진다고 믿었다. 나 자신도  "명비긍채"라는 말을 사용했다. 명상으로 비우고, 긍정의 마음을 채운다는 말이다. ‘긍정심리학’(positive psychology)은, 이제까지 인간의 약점과 부정적 측면에 초점을 맞춰 연구해왔던 심리학의 접근방식에 대한 반성이다. 인간의 약점을 고치기보다는 각 개인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자꾸 키워 나가는 편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이야기다. 누구에게나 약점 또는 상처가 있는 것처럼 누구에게나 장점이 있다. 이 장점을 끌어올리면 약점은 저절로 개선된다는 것이다. 

이런 태도에 대해 윌리엄 제임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당신이 건강, 권력, 성공 등 무엇이든 그에 대해 생각을 한다면 그 책임은 곧 당신에게 부여된다." 이 말대로라면, 아픈 것은 그 사람 잘못이 된다. 이러한 일에 실패한 사람은 그 일이 성공하리라 확고하게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어려움 속에서도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미래를 낙관하는' 긍정 심리학으로 모든 고통이 해결되지 않는다. 한계가 있다. 예컨대, 프랭클에 따르면, 나치 수용소에서 1944년 크리스마스부터 이듬해 새해까지 사망률이 급격히 증가했다고 한다. 크리스마스에는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막연히 낙관했던 사람들이 기대가 깨지자 삶의 의지가 꺾인 탓이다. 고통은 그저 통과해 지나가는 것이다. 인생의 고통은 극복하고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그저 견뎌내는 것이다. 고통은 의미를 모를 때 만큼이나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것 때문에 고통스럽다. 프랭클은 삶에서 마주치는 각각의 상황 속에서 우리가 의미가 뭐냐고 던지는 질문이, 실은 삶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며, 우리는 삶에 '책임을 짊으로써'만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고통은 삶이 내게 던지는 질문이고, 나는 삶을 책임감 있게 살아 냄으로써 그 질문에 답할 뿐이다. 그렇게 고통을 지나다 보면 고통이 가라앉을 때가 오고, 고통이 더 이상 고통이 아니게 되는 순간이 온다. 그 뿐이다.

그러니까 제동 장치 없는 긍정적 사고는 추락한다. 우리의 머리 속에 어떤 생각이 차지하고 있든 우주의 질서는 달라지지 않는다. 긍정적 사고는 단지 성공을 위한 방식 중 하나일 뿐이다. 문제는 이 사고가 영혼 없는 성공지향형 로봇으로 탈바꿈될 때 불거진다. 그렇다 성공지향형 사람들은 거창하게 보이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주의를 끌어야 한다. 게다가 그들은 다름 사람들도 자기처럼 성공할 수 있는 비밀을 알려주고 싶다고 말한다. 물론 그들의 성공 노하우를  궁금해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원하는 이가 없는 데도 성공에 대해 떠든다면, 그는 성공한 사람이 아니라 인정받고 싶은 욕구만 거대한 수다쟁이에 불과하다. 성공을 전파자들이 이용하는 승자와 패자라는 이분법에 속지 말자. 우리 삶은 그렇게 간단한 대립 구도로 설명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삶의 방식은 매우 다양하고, 모순 투성이기도 하며, 그래서 흥미롭다. 무엇보다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성공한 인생을 살아간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이다. 인생은 승패를 나누는 경쟁이 아니다. 앞에서 말했지만, 자기 생각이 분명하고, 내면의 힘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명함을 금박으로 치장하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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