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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사실 아프다.

4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사실 아프다. 살아 있는 모든 사람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상처를 하나씩 다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서로에게 친절해야 하는 이유이다.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삶을 여행하고 있으니까, 함부로 판단을 해서는 안 된다. 류시화 시인의 말이다.

나는 인사를 할 때 얼마나 일이 많고, 얼마나 벌고, 얼마나 넉넉한 가를 묻지 않는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잘 못산다고 하면, 가난한 것으로 이해한다. 잘 사는 것이 돈이 많은 것만은 아니다. 그러니까 사람을 만나 인사할 때, 너의 영혼은 살아있는가?  또는 너의 가슴은 기쁨으로 충만한가? 이런 것들을 묻는 것이다. 이 말을 인도어로 "카 할 헤?"라고 한다. 여기서 '할'이 상태를 의미하지만, 본래는 현재 가슴의 상태를 가리킨다. 세상과 다른 이들을 사랑하고 있는가?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사실 아프다. 그런데 고통은 한계를 넘을 때 스스로 치유제가 된다. 우리가 신의 존재를 믿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 의지하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세상의 슬픔은 얼마나 많은가! 내 슬픔은 얼마나 작은가!" 다른 이의 슬픔을 알고 나면, 나의 슬픔이 작게 느껴진다. 누구든지 고난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음을 알 때, 우리는 자신의 행복과 불행에 크게 동요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면 태풍이 멈췄는데도 계속 흔들리는 나무처럼 된다.

류시인이 이런 우화를 소개했다. 신이 "그대들 각자가 겪은 불행한 일들을 보자기에 싸서 사원 마당으로 가지고 오라"고 했더니, 모두 큰 보자기를 어깨에 지고 왔다. 그러자 신은 "그대들의 보자기를 모두 펼쳐 놓으라" 했다. 그러자, 다시 "각자 원하는 보자기를 선택하라" 했더니, 모두가 자신의 보자기를 행해 달려갔다고 한다. 다른 사람이 삶에 고통이 있는지 알 수 없으며, 적어도 자신의 불행에는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후 사람들은 불평하는 기도를 멈추었다 한다.

어제 저녁은 내 모든 형제가 함께 식사를 했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제일 큰 누나가 82세이고, 막내의 딸이 올 11월 결혼을 한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형제는 한 명도 이 세상을 떠나지 않고 살아 있다.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즐거웠지만, 흘러간 세월이 안타까웠다.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은 지나간 길이 아니라, 지금 다가오는 길이다. 이젠 과거를 잊고, 지금_여기서 각자 행복했으면 한다. 우리가 전체 그림을 보고, 전체 이야기를 알게 되면, 지금 우리를 힘들게 하며 막힌 길이 언젠가는 선물이 되어 돌아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게 삶의 비밀이다. 어떤 일이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알겠는가?  

길이 막힌다면, 내면에서 그 길을 진정으로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삶이 때로 우리의 계획과 다른 길로 우리를 데려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길이 우리 가슴이 원하는 길이다.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으나 가슴은 안다. 난 가슴이 가르쳐 준 길을 따라 살고 있다. 파도는 그냥 치지 않는다. 어떤 파도는 축복이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의 "소금인형"은 바다를 너무 사랑해서 바다를 이해하려고 바닷속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연거푸 파도에 휩쓸려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원래 자신이 누군지도 잊고 바다가 되었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 아닌가? 살다가 그냥 무(無, nothing)이 되는 게 인생 아닌가? 너무 힘들어 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냥 세상에 나를 내 맡길 테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 생각하면, 모든 일이 풀린다. "소금인형처럼/흔적도 없이/녹아 버리면" 된다. 그게 예수님이 늘 말씀하시는 '사랑'이다. 사진은 소나무에 달린 고통의 무게가 더 멋진 나무가 된다고 생각해, 찍은 것이다. 그리고 그늘을 꼭 넣고 싶었다. 멀리 보이는 산이 서대산이다.

소금인형/류시화

바다의 깊이를 재기 위해
바다로 내려간
소금인형처럼
당신의 깊이를 재기 위해
당신의 피 속으로
뛰어든
나는
소금인형처럼
흔적도 없이
녹아버렸네

배철현 선생의 <오늘의 묵상>에서 배운 삶의 지혜 하나를 공유한다. 노예였다가 스토아 철학자가 된 에픽테토스는 남다른 고통과 고생을 통해 하루를 행복하게 살기 위해 필요한 세 가지 훈련을 말했다. 그의 철학은 추상적이 개념에 대한 논쟁이 아니라, 일상을 개선하기 위한 실천 가능한 조언들이다. 예를 들면, "너희들은 간절히 원하는 것을 반드시 얻으며, 너희들이 피하고 싶은 상황에 절대 빠지 말아라!" 쉽고도 어려운 조언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간절하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 것을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 '인문 운동'이 필요한 것이다. 인문 정신이란 자신에 주어진, 자신에게  알맞은 인생의 과업을 심사숙고하여 찾아내는 여정이다. 만일 그가 인생의 과업을 발견했다면, 자신답지 않은 것, 즉 자신이 피하고 싶은 상황을 미리 감지하고 피할 것이다. 간절히 원하는 것을 알아야, 우리가 피하고 싶은 상황을 피할 수 있다. 이젠 그의 조언을 이해했다. 교육도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것을 찾도록 유도하는 과정이다. 인간은 이 과정을 통해, 누구를 시기하거나 부러워하지 않는 자아상을 구축하고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지금' 즐길 수 있다.

에픽테토스는 우리가 일상의 훈련을 통해, 일상을 지배하기 위한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음 세 분야를 훈련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 욕망(慾望)
- 선택(選擇)
- 승복(承服)

(1) 욕망은 나 자신만의 개성을 드러내고 잠재된 천재성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에서 탁월한 성과를 내겠다는 의지로 정의된다. 에틱테토스는  욕망을 '오렉시스'로 표현했다. 이 말은 '뻗을 수 있는 곳까지 팔을 최대한으로 뻗다'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 그러니까 에픽테토스가 말하는 욕망은 팔을 움츠리지 말고 최대한으로 펴는 연습을 하라는 조언인 것이다. 세상에는 내가 팔로 획득할 수 있는 것과 획득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걸 구별하는 것이다. 내 팔로 획득할 수 없는 것을 욕망하는 것은 탐욕이라고 본다. 그러니 내가 잘 할 수 있는 한 가지에 몰입하여 최고의 성과를 내려는 마음이 바로 '오렉시스', 에픽테토스가 말하는 욕망이다. 이 오렉시스를 매일 훈련하라는 것이다.

(1) 선택은 나의 최선을 집약 시킬 대상을 선별하는 능력이다. 나에게 주어진 오늘 하루를 훌륭하게 마칠 수 있게 하는 내 일은 심사숙고를 통해, 내가 사적으로 한 선택의 결과이다. 또한 선택은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것을 과감하게 거절할 수 있는 단호함도 포함한다.

(2) 승복은 자신이 선택한 대상에 완전히 몰입하여 완수하려는 결심이다.

에픽테토스는 매일 아침 자기 안에서 이 세가지 원칙을 찾으라고 조언했다. 배철현 선생은 우리에게 말한다. 매일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가지를 발견하고, 그것을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집중하여 그것을 즐기는 것이다. 너무 힘들게 살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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