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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우리 인생의 시간은 물의 시간일 뿐이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5월 23일)

요즈음 거리를 나가면, 오월의 초록 물, 신록이 마음을 깨끗하게 정화해 준다. 더 정확히는 연두와 초록이 햇살과 노닐며, 상큼한 바람이 사이사이 입맞춤을 하고, 바람 길 따라 달콤한 향기를 발산한다. 나는 단풍보다 신록에 더 끌린다. 5월이 신록의 달이란 이야긴 어려서 부터 들었지만 신록의 참된 의미를 따져본 적은 없었다. 어제 늦은 오후에 산책을 나가 신록을 만끽했다. 아침 사진은 목련 나무 밑에서 찍은 것이다.

"나무는 안다. 앙상한 겨울에서 신록의 봄을 지나고 무성한 여름을 거치면 단풍 드는 가을에 닿고, 그 다음은 다시 겨울인 것을. 이 흐름을 아는 사람 역시 신록 앞에서 봄의 싱그러움과 함께 여름과 가을과 겨울의 각기 다른 삶을 함께 떠올릴 것이다. 시간은 흐르지만 흐르지 않고, 사람은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다는 모순까지 받아들이는 순간이다." 김탁환 소설의 멋진 통찰이다. 나는 2020년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를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로 묶어 출판할 준비를 위해 전부 다 다시 읽고 있다. 그러면서 일년의 흐름을 만났다. 그런데 2020년의 신록은 2022년 올해의 신록과 변하지 안 했다.

일년 내내 나무는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다는 모순을 읽었다. 그 모순을 받아들이라는 소설가의 제언이 마음 깊숙하게 와 닿는다. 그 순간, 지난 3월에 알게 된, 1993년에 초묘(楚墓)에서 발견된 죽간(竹簡)에 나오는 <<태일생수(太一生水)>>라는 말이 생각난다. ""태일(太一)은 물을 생한다. 생(生)하여진 물은 생하는 태일(太一)을 오히려 돕는다. 그리하여 하늘을 이룬다. 하늘 또한 자기를 생한 태일(太一)을 오히려 돕는다. 그리하여 땅을 이룬다. 이 하늘과 땅이 다시 서로 도와서 신명(神明)을 이룬다. 신(神)과 명(明)이 다시 서로 도와서 음양을 이룬다. 음과 양이 다시 서로 도와서 네 계절을 이룬다. 이 네 계절(춘하추동, 春夏秋冬)이 다시 서로 도와서 차가움과 뜨거움(창열, 凔熱)을 이룬다. 차가움과 뜨거움이 다시 서로 도와서 습함과 건조함(습조, 溼燥)을 이룬다. 습함과 건조함이 다시 서로 도와서 한 해(세, 歲)를 이루고 이로써 우주의 발생이 종료된다." 여기서 "태일"은 "도"이다.

꼼꼼하게 여러 번 읽으면, 변하면서 변하지 않는 나무의 신록을 읽을 수 있다. 복잡한 것 같지만, 논리 정연하다. 그 진행 순서는 다음과 같다: 태일(太一) → 수(水) → 천(天) → 지(地) → 신명(神明) → 음양(陰陽) → 사시(四時) → 창열(凔熱) → 습조(溼燥) → 세(歲)

그렇지만 생의 과정은 모든 단계에서 동시적으로 상보(相輔) 관계를 이루고 이룬다. "생(生)"의 과정은 반드시 "복상보(復相輔)"라고 하는 역의 관계를 동시에 수반한다. 이 점을 간과하면 안 된다. 흥미롭다. '"복상보"의 논리'에 따르면 내가 나의 자식을 생한다면, 나의 자식은 동시에 나를 생하여야 한다는 거다. 태일이 물을 생한다면 물은 동시에 태일의 생성을 도와 하늘을 생한다. 하늘은 동시에 태일의 생성을 도와 땅을 생한다. 하늘과 땅은 서로가 서로의 생성을 도와 가믈한 신(神)을 생하고 밝은 명을 생한다. 이렇게 전개되어 나가는 전 과정의 특징은 아무런 항목도 실체화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올 김용옥이 강의에서 한 말이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본다. "태일이라는 실체가 물이라는 실체를 탄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태일과 물은 상호 교섭하는 관계일 뿐이며, 그 관계는 끊임없이 서로를 포섭하고 서로가 대자(對者)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항목, 즉 천과 지를 생성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천과 지도 실체가 아닌 교섭의 과정적 사건일 뿐이며 그것은 신명을 생성시키고, 신명은 다시 음양을 생성시키고, 음양은 다시 춘하추동을 생성시키고, 춘하추동은 다시 창열(차가움과 뜨거움)을 생성시키고, 창열은 다시 습조(습합과 건조함)를 생성시킨다. 이 모든 존재(Being)의 과정이 아닌 생성(Becoming)의 과정은 결국 무엇으로 귀결되는가? 그 귀결처를 <<태일생수>>의 저자는 '세(歲)'라고 보았다." 그러니 가는 세월을 걱정할 필요 없다. 이루어질 일은 다 이루어진다.

우리 인생의 시간은 물의 시간일 뿐이다. 우리는 물과 더불어 살고 물과 더불어 투쟁한다. 물이 없어도 죽지만, 물이 너무 많아도 죽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히 해야 할 것은, <<태일생수>>의 저자가 이 세계의 가장 보편적인 현상의 기조를 "물(水)"이라고 보았지만, 그 물은 태일(太一, 도의 다른 이름)과의 관계에서 천지만물의 모든 현상을 생성시키는 비실체적 사건일 뿐, 그 나름대로 원질을 형성하는 존재의 대상이 아니라고 보았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 물의 궁극적 귀결처가 '세월(歲月)'이다. 여기서 '세'라는 것은 일 년이지만, 농경사회에 있어서 일 년은 곧 영구한 시간을 의미한다. 계절로 이루어지는 세의 반복이 곧 시간이 것이다. 순환할 뿐이다.

소설가 김탁환은 신록의 또 다른 의미를 말하고 있다. "알리체 로르바케르 감독의 영화 <행복한 라짜로>를 보면서도 신록을 다시 생각했다. 주인공 라짜로가 안팎으로 행복한 까닭은 바삐 변하는 세상 속에서 신록과도 같은 성정을 지속하기 때문이다. 라짜로는 마을에서 누구보다도 많이 일하지만 불평 한마디 없다. 신분 높고 돈이 넉넉한 자들은 물론이고 가난한 농부들 사이에서도 라짜로는 바보 취급을 당한다. 그러나 나무가 바보가 아니듯 라짜로도 바보가 아니다. 신록에 이르는 과정과 짧다면 짧은 푸른빛을 즐기는 방법과 신록이 지나간 뒤 다시 올 때까지 참고 그리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누군가 번창하는 여름을 자랑할 때 라짜로는 봄을 지키며 머물고, 누군가 가을의 결실을 내보일 때 라짜로는 파종을 걱정하고, 누군가 고통스러운 겨울에 힘겨워할 때 라짜로는 산뜻한 봄바람을 닮은 표정을 짓는다. 그리하여 봄이 오면 라짜로는 네배 더 즐겁게 새로운 푸른빛에 물든다. 반복되는 새로움을 우리는 ‘불멸’이라고 불러왔는지도 모른다. 불멸 대신 ‘부활’을 넣어도 마찬가지겠다." 그 방법은 신록에 이르는 과정과 짧다면 짧은 푸른빛을 즐기는 법과 신록이 지나간 뒤 다시 올 때까지 참고 그리는 마음을 간직하는 거다.

그래서, 바쁜 한 주가 다시 시작되는 월요일이지만, 기쁘게 시작하는 선물 같은 하루의 아침이다. 주말 농장 가는 길의 찔레 꽃은 자연의 순환에 맞춰, 한 순간 피었다가 아랑곳하지 않고 시들어 버렸다. 잘은 모르지만 후회하지 않는 것 같다. 자연은 그 순간에 최선을 소진한다. 내 동네 탄동천의 물도 쉬지 않고 흘러간다. 자신이 가야할 곳, 바다를 향해 묵묵히 인내하고 흘러간다. 강물은 바다를 포기하지 않는다. 내가 오늘 하루도 어제와 같은 일상을 꾸준히 실천하며, 하루를 또 다시 최선으로 보내려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현실은 고달프다. 세상 돌아 가는 것이 나를 무겁게 한다. 그래 어제는 딸과 많이 걸었다. 큰 생각 없이 걸을 때 느껴지는 카타르시스는 종교 의식에 빠졌을 때와 닮았다. 걸음 속에 자성(自省)과 위무(慰撫)가 있다. 그래서 걷는 일을 일상의 종교라고 말하는,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인의 생각에 동의한다. 번잡함에 휩쓸리다가도 이래서는 안 되지, 하며 돌아설 수 있게 되는 것도 걸을 때이다. 더 고독해질 일이다. 내가 살 길은 거기에 있다.

내 일상의 종교/이재무

나이가 들면서 무서운 적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핸드폰에 기록된 여자들
전화번호를 지워버린 일이다
술이 과하면 전화하는 못된 버릇 때문에 얼마나 나는 나를
함부로 드러냈던가 하루에 두 시간 한강변 걷는 것을 생활의 지표로
삼은 것도 건강 때문만은 아니다 한 시대 내 인생의 나침반이었던
위대한 스승께서 사소하고 하찮은 외로움 때문에
자신이 아프게 걸어온 생을 스스로 부정한 것을 목도한 이후
나는 걷는 일에 더욱 열중하였다 외로움은 만인의 병 한가로우면
타락을 꿈꾸는 정신 발광하는 짐승을 몸 안에 가둬
순치시키기 위해 나는 오늘도 한강에 나가 걷는 일에 몰두한다
내 일상의 종교는 걷는 일이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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