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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신발은 인간 존재 자체이다.

3년전 오늘 글입니다.

와인 파는 인문학자의 인문 일기

아침에 일어나 <인문 일기>를 쓰다 가도 8시가 되면 무조건 책상에서 일어나 아침 운동을 하기로 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고도원의 아침 편지>를 알고 있었는데, 잊고 있다가, 최근에 페이스북으로 전달해 주는 페친이 있다. 오늘 아침도 그 글을 읽었다. 그래 8시에 무조건 아침 운동을 하는 원칙을 다시 기억하고 실천하려고 다짐했다. 구슬프게 봄비가 내리는데도 산책을 나갔다. 5월의 장미는 이때 뿐이라는 듯 빗 속에서도 자태를 잊지 않고 있었다. 오늘 사진이 그 모습이다. 선비는 비가 온다고 뛰지 않는다.

오늘 아침 고도원의 아침 편지 내용은 암을 이기는 세 가지 원칙을 말한다. (1) 암은 낫는다고 생각한다. (2) 현미, 채식을 한다. (3) 운동을 한다. 암을 이기는 첫 단계가 마음이다. "이길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마음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 그 다음은 음식이고, 그 다음은 운동이다. 여기까지 당연하다고 본다. 그러나 나를 움직에게 한 것은 그 다음 말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방이다. 평소에 마음 관리, 좋은 음식 습관, 꾸준한 운동이 필요하다.

오늘 아침 <인문 일기>의 화두는 "나의 신속에 신이 있다"로 시작되는 문정희 시인의 <먼 길> 첫 문장이다. 시의 첫 구절, "나의 신 속에 신이 있다"에서, 앞의 신은 신발이고 뒤의 신은 신(神)일 것 같다. 지난 삶을 돌이켜 보니 "처음 걷기를 배운 날부터/지상과 나 사이에 신이 있어/한 발자국 한 발자국 뒤뚱거리며/여기까지 왔"다. 실제로 처음 걷기를 배울 때는 맨발이었을 테니, 시 속의 처음 걷기는 집밖 세상으로의 걸음마일 게다. 신(신발)은 땅을 딛고 걷기 수월하게 발을 감싸는 물건이다. 그 신발처럼 신(神)이 세상을 딛고 걷는 고단함을 덜어줬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신발이 굴레처럼 느껴지는 순간도 있다. 새처럼, 바람처럼, 강물처럼, 신발이 없거나 신발이 가벼운 존재들이 무한 부러운 순간 말이다. 하지만 인간의 "삶이란 비상을 거부하는" 것이다. 멋진 표현이다. 그래 주말농장에서 만나는 달팽이를 나는 좋아한다. 그에게서 배웠다. "안의 뼈란 뼈 죄다 녹여서 몸 밖으로 빚어 낸 둥글고 아름다운 유골 한 채를 들쳐 업고 명부전이 올려 다 보인 뜨락을 슬몃슬몃 핥아 가는 온몸이 혓바닥 뿐인 生이 있었다."(서정춘, <달팽이 약전(略傳)> 전문) 달팽이는 옴 몸이 신발이고 신이다.

신발은 인간 존재 자체이다. 신발을 신고 살아야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 온 삶의 흔적을 한 장의 종이에다 기록하고 이것을 이력서(履歷書)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그렇다. 실재로 이력서라는 말의 한문을 풀어보면, ‘신발(履)’를 끌고 온 역사(歷)의 기록(書)’이다.

그리고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흔히 사용하는 말로 '고무신 거꾸로 신기'라는 말은 사랑하는 상대가 변심한 경우에 사용한다. 그리고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리운 사람의 신발 끄는 소리(예리성 曳履聲)가 들리면, 버선발로 뛰어나간다.” ‘신발을 신을 틈이 없이 달려 나가야만, 아니 자신의 온 존재를 벗어 놓은 채 달려 나가야만 완전하게 그리운 임의 품에 안길 수 있다’는 말일 것이다.

그리고 강물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사람들은 강가에 신발을 벗어 놓은 채 물 속으로 뛰어든다. 왜 그럴까? 신발은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신발의 고무 밑창 하나가 우리와 대지 사이를 갈라놓고 있다. 대지는 인간이 장차 돌아가야 할 곳이다. 더이상 신발을 신지 못하면 죽는 것이다. 오늘도 신발을 신고, 신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먼 길/문정희

나의 신 속에 신이 있다
이 먼 길을 내가 걸어오다니
어디에도 아는 길은 없었다
그냥 신을 신고 걸어왔을 뿐

처음 걷기를 배운 날부터
지상과 나 사이에는 신이 있어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뒤뚱거리며
여기까지 왔을 뿐

새들은 얼마나 가벼운 신을 신었을까
바람이나 강물은 또 무슨 신을 신었을까

아직도 나무 뿌리처럼 지혜롭고 든든하지 못한
나의 발이 살고 있는 신
이제 벗어도 될까 강가에 앉아
저 물살 같은 자유를 배울 수는 없을까
생각해보지만
삶이란 비상을 거부하는
가파른 계단
나 오늘 이 먼 곳에 와 비로소
두려운 이름 신이여!를 발음해본다

이리도 간절히 지상을 걷고 싶은
나의 신 속에 신이 살고 있다

"삶이란 비상을 거부하는/가파른 계단"이지만, "이리도 간절히 지상을 걷고 싶은/나의 신 속에 신이 살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한다. "먼 길"이지만, 우리는 "타자 되기"를 꿈꾸어야 한다. 그것으로 내가 끈 신발의 이력이 되어야 한다. 이런 문제에 대해, 나는 어제 저녁에 윤정구 교수님의 페북을 읽고 갈무리해 보았다. 레비나스의 <타자 윤리학>을 쉽게 설명하셨다. 공유한다. 이 시대에 우리에게 매우 필요한 것이 윤리의식이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도덕적 압력'이다. 이 윤리의식이  우리를 '선하게 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아침이다. 이 말은 레비나스의 '윤리적 주체'가 되라는 말과 같이 사용할 수 있다고 나는 본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윤리적 주체란 타자의 다름을 받아들이고, 타자 중심적으로 사유하는 것이다. 어쨌든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최고의 덕목은 선이다. 선이란 '나쁜 짓 하지 말고 살아라'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나만 생각하고, 나의 욕심에 따라 나 밖의 것을 내 것으로 자기화하지 말고, 타자에로의 초월로 타자가 보내는 호소에 응답하는 것이 선이다. 나쁜 사람은 '나 뿐만' 아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니까 사적인 욕망보다 이를 위해 도덕적 양심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양심의 압력을 키워야 한다. 윤정구 교수는 레비나스의 <타자 윤리학>을 다음과 같이 잘 요약했다.

(1) 'Il y a(일리야)"라는 존재의 심연(웅성거림만 존재하는 거기 있음의 세계) → (2) 향유를 통한 이기적이고 주체적 자아 (주체적인 동일성 세상에서의 향유를 통해 자신의 주체성을 찾아가는 초월) → (3) 타자에 대한 환대와 타자의 얼굴을 통한 관계적 만남 → (4) 타자 학습을 통한 타자 되기 (이를 통해 타자의 세상이 드러남) → (5) 많은 타자를 통한 무한의 경험 (무한의 세상을 목격)→ (6) 윤리적 주체로 거듭남.

(1)에서 (2)으로 초월: 그저 있음의 세상에서 초월해서 사랑도 해가며 삶을 향유도 해가며 내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노동도 해가며 미래를 대비해가며 집에 소유도 축적해가며 사는 삶으로부터 초월하여 자신의 주체적 자아를 찾는 일이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박노해 시인의 시(블로그에서 공유한다) 첫 연의 마지막 질문에 '아니오'라고 답한다. 향유를 통한 주체성과 동일성으로 쌓인 재현의 세상을 통해 내 영혼이 부르는 길을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이다.

(3)에서 (4)으로 무한의 세계로 확장: 자아실현을 넘어선 타자되기에 대한 이야기이다. 타자의 얼굴에 대한 환대가 제대로 자신의 주체성을 초월하여 윤리적 주체로 거듭나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한다. 타자의 세상은 능력이 있고, 재능이 있고, 부모를 잘 만나 세상의 행운을 다 향유해온 사람들이 자신의 몸을 낮춰 타자를 환대할 때 스스로 드러나는 세상이다. 재현(representation)이 아니라 현현(ephiphanie)된다. 타자의 세상이 그냥 모습이 드러난다. 이 때, 잘난 사람들이 자신을 낮출 때 타자는 그 잘난 이들에게 스승이 된다. 행운을 만끽해온 장본인인 나는, 타자를 환대해가며 타자되기를 공부하기 시작할 때, 재현에 의해 구성되었던 우주에 균열이 생기고 이 균열을 빠져나가, 무한의 세상을 목격하게 된다.

(5) 에서 (6)으로 윤리적 주체로 거듭 남: 환대를 통한 무한의 세계를 경험하면, 윤리적 주체로 거듭나다. 다시 말하면, 환대를 통해 향유하는 주체가 초월되어 윤리적 주체가 될 때 자아실현을 넘어서는 타아(윤리적 주체) 실현의 강한 무한 세계가 펼쳐진다는 이야기이다.

레비나스의 타자 윤리학에서 조심해야 할 것은 전제가 있다. 몇 차례의 초월을 통해서 타아(윤리적 주체) 실현의 세상에 도달한다는 점이다. "일리야"의 세상에서 벗어나지도 못한 현존재가 그냥 타아 실현할 수 있는 도약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레비나스는 공의 철학이다. 자아실현이라는 정신모형 1의 세상을 넘어서 타아실현이라는 정신모형 2의 세상을 플랫폼으로 구축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높은 곳에서 더 고르게 평평한 운동장을 만들어 변화를 실현시키려는 철학이다. 물론 자아실현이 안 된 사람은 타아실현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허구이다. 자신의 주체적 독립의 토대를 마련한 후 타자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시스템을 설계할 수 있는 자가 '위대한 개인'이다.

레비나스 철학이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남의 고통을 내 고통으로 내재화해 이를 위해 행동으로 나서는 긍휼감을 환대의 기반이라 보기 때문이다. 긍휼감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넘어져 피 흘리고 있는 타자의 얼굴을 통해서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 질문에 응답해 자신의 주체성, 동일성, 전체성의 가면을 벗고, 타자의 고통의 가면을 쓰는 것이다.

이런 타자되기를 실현하는 세상은 결핍의 해결을 추구하는 자아실현을 향한 욕구의 세상과는 다른 세상이다. 레비나스는 이 타자되기를 실현하는 세상을 여성성으로 설명한다. 자신의 고통에 대한 환대를 제대로 해 본 사람만이 타인의 고통의 얼굴에 대한 환대로 이어간다. 그게 여성성이다. 인간은 누구나 성장의 고통을 앓는다. 자신도 성장의 고통을 가지고 있고, 이 자신의 성장의 고통에 대한 직면이 레비나스가 말하는 여성성이다. 이 여성성은 내가 동일성의 집에 거주하고 있어도 나에 대한 환대를 느끼는 나의 얼굴이다.

소크라테스의 철학의 제 1원리는 "네 자신을 알라"이다. 자기 이해에 대한 정언 명령이고, 제 2 원리는 "길을 잃고 헤매는 내 자신을 제대로 돌보라며, 숙고하라는 자기 규율의 정언 명령이다. 자기와 세상에 대한 제대로 된 자기인식의 나침반으로 고전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 그 고전의 지도 위애서 나침반의 극성을 다시 점검하며 정신의 근육을 키워야 한다. 레비나스의 <타자 윤리학>은 제1의 철학이 윤리라고 주장한다. 이는 진정성 기득한 "타자 되기"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넘어지고 다쳐 피 흘리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환대"이다. "진실로 남이 될 수 있는 능력이/내가 가진 가장 큰 힘인 것을"(박노해, <남이 될 수 있는 능력> 일부) 잊지 말자. 박노해 시인의 시는 블로그로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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