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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늙는다는 것/김재진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1년 8월 31일)

어제에 이어, 장자가 말하는 인간의 참 모습, 진인(眞人) 이야기를 한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진인이라 하는가 그 모습들을 열거하고 있다. 장자는 사물에 지배당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사는 것이 진인이라 했다. 그러한 사람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1) 기심지(其心志): 마음이 한 곳에 머물러 있다. 오로지 도(道)에 집중함을 의미한다.
(2) 기용적(其容寂): 모습은 고요하다. 움직임이 고요하다는 말이다. 용모가 고요함이니 바로 내면은 담담하고 외모는 안정되어 있음이다.
(3) 기상규(其顙頯): 이마는 넓고 평평하다. 이맛살을 찌푸리지 않는다 말 같다.
(4) 처연사추(凄然似秋): 서늘함은 가을과 같다. 지기추상, 대인춘풍(持己秋霜, 待人春風, 자기 자신을 지키기는 가을 서리처럼 엄하게, 남을 대할 때는 봄바람처럼 너그럽게 하라)이 생각난다.
(5) 훤연사춘(煖然似春) :따스함은 봄과 같다. "여물위춘(與物爲春, 모든 존재하는 것에 접하여 항상 봄과 같은 따뜻한 정을 일으킨다는 의미, "덕충부")"이 생각난다. 다른 사람(상황)과 더불어 봄이 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과 소통하며 변화하고, 그것이 긍정적인 효과까지 기대된다는 말이다.
(6) 희노통사시, 여물유의, 이마지기극(喜怒通四時, 與物有宜, 而莫知其極): 희노(喜怒)의 감정이 사계절과 통하여 사물과 적절하게 어울려서 그 끝을 알지 못한다. 희로의 감정이 자연스러움을 뜻한다.  사물과 적절하게 어울린다는 말은 온갖 사물을 차별 없이 대하여 사물과 일체가 된다는 뜻이다. 그 끝을 알지 못한다는 말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진인이란 자유자재로 무심의 경지를 스스로의 심경(心境)으로 삼는 인간이다.

<<장자>> 그 다음 장은 결이 좀 다르다. 성인(聖人)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면 인(仁, 사랑), 현(賢, 어지름, 현명함), 군자(君子), 사(士, 선비), 역인(役人, 남을 부리는 사람)의 정의를 말한다.
(1) 락통물, 비성인야(樂物通, 非聖人也): 사물과 토하는 것을 즐기면, 성인이 아니다.  사물과 통하는 것을 즐거워해서 인위적으로 그것을 추구하는 것은 성인의 마음이 아니다. 이 문장은 이렇게 바꿀 수도 있다. 성인은 외부의 사물에서 오는 즐거움을 바라지 않는다.
(2) 유친, 비인야(有親, 非仁也): 친애함이 있으면 인자(仁者)이 아니다. 여기서 '친(親)'은 차별적인 사랑을 뜻한다. 편애하는 사람은 인자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진정한 사랑은 편애하지 않는 것이다.
(3) 천시, 비현야(天時, 非賢也): "천시"에 '일부러' 맞추려고 하면 현자(賢者)가 아니다. 여기서 천시는 '자연의 때'란 말이다. 자연, 즉 하늘을 시간으로 구분하는 사람은 현자가 아니다. 그러니까 현자는 자연을 일부러 시간으로 구분하지 않고, 일부러 자연을 거기에 맞추지 않는다.  
(4) 이해불통, 비군자야(利害不通, 非君子也): 이로움과 해로움을 하나로 여기지 않으면 군자가 아니다. 시비(是非)의 길을 하나로 여기지 못하여 이익을 추구하고, 해로움을 피하면(호리피해, 好利避害), 덕을 손상시키고 외물에 얽매이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군자는 이익을 추구하지 아니하며, 해로움을 피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군자는 이해관계를 뛰어넘는다.
(5) 행명실기, 비사야(行名失己, 非士也): 명예를 추구하여 자기를 잃어버리면, 선비가 아니다. 여기 '행명'을 '위명(爲名)'으로 볼 수 있다. '위명실기(爲名失己)'는 '명예를 위해서 자기를 버린다'라는 뜻이다.
(6) 망신부진, 비역인야(亡身不眞, 非役人也):자기 몸을 죽이고 참된 본성을 저버리면 남을 부리는 사람이 아니다. 곧 자신의 참된 본성을 지키지 못하면 세상 사람들을 부리는 진인(眞人)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세상 사람들의 부림을 받는 수동적인 존재가 된다는 뜻이다. 금방 와 닿지 않는 문장이다. <<장자>>를 함께 읽는 지인은 '남을 부리는 사람은 몸을 온전히 하여 참됨을 행한다'고 풀이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흔히 하는 말 "제 몸 하나 부리지 못하념서 무슨 조직을 이끌 수 있겠는가?"라는 문장을 예로 들었다. 어쨌든 어떤 조직을 이끄는 사람은 우선 제 몸과 제 본성을 참되게 하여야 한다는 말로 이해하고 넘어간다.

그러면서 장자는 "시역인지역, 적인지적, 이부자적기적자야(是役人之役, 適仁之適, 而不自適其適者也)"라고 했다. 이 말은 "다른 사람이 할 일을 대신 처리하고, 다른 사람의 즐거움을 자기의 즐거움으로 여겨 스스로 자기의 즐거움을 즐거워하지 못한 사람들의 열거했다. 여기서 '적'은 '즐거움'을 뜻한다. 장자가 열거한 사람들은 자신의 참된 본성을 지키지 못하고 명예를 얻기 위해 목숨을 버렸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을 부리는 진인(眞人=役人)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세상 사람들의 부림을 받는 수동적인 존재가 되었음을 비판한 내용이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내가 먼저 즐거워야 한다.

분위기를 바꾸어 '사(士)' 이야기를 좀 해 본다.
TMI인지 모르지만, '사'자로 끝나는 직업들을 한자(漢字)로 썼을 경우에는 판사(判事), 검사(檢事), 변호사(辯護士), 의사(醫師), 박사(博士), 대사(大使)등으로 '사'라는 글자가 각양각색(各樣各色)이다. 다시 정리하여 보면,
- 일 사(事) : 판사(判事), 검사(檢事), 도지사(道知事) 등이 있다. 변호사만을 제외하고 죄를 다루는 공공 영역에는 두루 일 사(事)를 쓴다. 사(事)에는 '다스리다.' 라는 뜻 같다.
- 선비 사(士) : 변호사(辯護士), 박사(博士), 간호사(看護士) 등이 있다. 여기서 '사(士)는 '전문 직업인'을 존중하는 뜻으로 쓰인다. 학위, 면허전문직, 보통 특정 분야 뒤에 붙는 상담사, 지도사에 사(士)가 붙는다.
- 보낼 (使) : 대사(大使), 칙사(勅使) 등이 있다. 사(使)에는 심부름꾼의 뜻이 내포되어 있다.
- 스승 사(師) : 의사(醫師), 약사(藥師), 교사(敎師), 법사(法師), 목사(牧師) 등이 있다.

사(師)에서는 우리에게 어떤 고귀한 가르침을 주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그래서 종교적인 단어와 깊은 연관이 있다. 그리고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 의사(醫師)와 약사(藥師)도 '스승 사'의 계열에 속하고 있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그냥 생각한다면 전문 직업인이니까 '선비 사(士)'의 계열에 들어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의사와 약사에 선비 사(士)를 쓰지 않고 스승 사(師)를 쓴다. 의사와 목사에게 스승 사자를 붙이는 이유는 생명을 다루고 공동체를 이끌어주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근래에 보여주는 우리 사회의 사(師) 직업의 일탈이 아쉽다.

오늘이 8월 말이다. 코로나-19 사회적 거리를 두라고 강요 받고, 숨죽이며 살지만, 세월은 철없이 잘도 흐른다.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을 깨니 비가 구슬프게 내린다. 여름비라고 하여야 하나, 아니면 가을비라고 하여야 하나? 적어도 이 비 그치면 가을이 좀 완연해질 듯하다. 내일은 9월 1일이다. 시간이 가는 것만큼 나는 늙는 거겠지만, 나는 늙는다는 것을 잘 모른다. 늙는다는 것에 초연해서 그럴까? 그냥 하루를 살기 때문이다. 오늘만 그리고 지금-여기에서만 살겠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우리의 감정과 생각을 쉽게 바뀌고 편안해 질 수 있다. 어떻게 생각을 바꾸는가? 내일이 없으니 오늘 있는 힘을 다 쓰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 때 나를 옭아매던 어떤 한계에 갇힐 이유가 없다는 생각과 감정을 다시 갖는 것이다. 그러면 훨씬 자유롭고, 일상이 귀찮지않다. 실제적으로는 가끔 게으름 피우고 싶은 마음을 각성하게 하게 한다. 그리고 어떤 상대가 나를 괴롭히면 내일은 내가 없을 테니 그가 원하는 대로 다 받아주어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럼 편안하다.

늙는다는 것/김재진

잘난 그대도 아파보지 않았으면 말을 말아라
도대체 뭣이 그리 중하다고 역설을 하는가
늙는다는 것은 차츰차츰 잃어가는 것이다.

평소에는 무덤덤하게 스쳐 가는 것들이
막다른 골목에서 폐부를 찔러올 때
회한의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볼 수 있고 걸을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먹을 수 있고
제대로 배설할 때 그것을 최고의 복이라 하거늘
뭐 하러 그리 한눈을 파는 것인가.

산다는 것은 말이지
평범한 일상이 최고의 행복이려니
더 바래 무엇하고 혹여 고통에 시작일 뿐이다.

참을 수 없도록 죽을 만치 아파보지 않았으면
세상을 탓하지도 말고 생긴 대로 어우러져 살자
너나 나나 잠시 머무른 여행자일 뿐이다.

나를 온전한 '나'로 인정해 주는 것은 둘이다. 하나는 ‘지금’이라는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여기’라는 장소다. ‘지금’과 ‘여기’가 없다면, 나로 존재할 수 없다. 이 둘은 만물을 현존하게 만드는 존재의 집이다. 과거를 삭제하고 미래를 앞당겨 이 순간을 종말론적으로 전환하는 것이 ‘지금’이라면, ‘여기’는 ‘나’라는 존재를 새롭게 인식하게 만들어 줄 뿐만 아니라, ‘나’를 생경한 나로 전환시켜주고 더 나은 나로 수련 시키는 혁명의 장소다.

이 '지금'은 과거와 미래가 하나 되는 시간이다. 내일은 가장 무서운 단어이다. 마귀가 내일이라는 영어 단어 tomarrow를 가장 즐겨 쓴다고 한다. 내일은 내 인생이 아니다. 그러니 할 일이 생각나거든 지금 해야 한다. 그런데 어떤 일이든지 가장 어려운 것이 시작이다. 시작은 늘 불안하다. 왜냐하면 시작이라는 단어는 다음과 같이 3 가지가 혼재해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3월의 본격적인 시작이 오늘이다. 어쩌면 올 한해의 시작일 수도 있다. 오늘 개학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말로는 '헝트레(rentrée)'라고 한다. 다시 입구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1) 과거와의 매정한 단절, (2) 미래에 대한 비전과 희망 (3) 지금-여기에 대한 확신과 집착이 필요하다.

이런 생각을 하며, 산책을 하다가 어제는 오늘 사진처럼 박게 핀 무궁화 꽃을 만났다. 고 신영복 교수님이 당신의 책, <<담론>>에 남긴 글을 소환시켰다. "꽃에 대해서도 노촌 선생은 둘만 방에 남았을 때 이야기했습니다. 무궁화는 덕이 있는 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벌레와 진드기까지 함께 살아가지 않느냐는 것이지요. 생각하면 꽃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이 틀렸습니다. 꽃은 사람들의 찬탄을 받기 위해서 피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자기의 아름다움을 위해서 피는 것도 아닙니다. 빛과 향기를 발하는 것은 나비를 부르기 위해서입니다. 오로지 열매를 위한 것입니다. 시들어서 더 이상 꽃이 아니라 하지만 그 자리에 남아서 자라는 열매를 조금이라도 더 보호하려는 모정입니다. 꽃으로서의 소명을 완수하고 있는 무궁화는 아름답습니다."

꽃처럼, "열매"를 위해, 내일부터 시작되는 9월 정진(精進)할 생각이다. 학문은  배움과 물음이다. 반드시 물음을 통하여 배워야 하고, 배움을 통하여 물어야 한다. 이어지는 <<장자>>의 진인, 참모습 이야기는 내일 한 번 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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