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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9월의 기도/박화목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원래는 김누리 교수의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에서 문제가 되는 몇 가지 주제를 공유하는 중인데, 9월이 시작하는 날이어서, 우리 사회의 '불편한 진실'은 내일로 미루었다. 오늘 아침은 내 안에 있는 시기와 질투를 들여 다 보는 시간을 가졌다. 마음을 비우고, 나를 장례 시키고, 하늘의 퉁소 소리를 듣고 싶다.

시기는 남이 잘 되는 것을 샘하며 미워하는 마음이다. 비슷한 말로 '시새움'이 있다. 자기보다 잘되거나 나은 사람을 공연히 미워하고 싫어하는 마음이다. 줄여서 '시샘'이라고도 한다. 질투는 다른 사람이 잘되거나 좋은 처지에 있는 것 따위를 공연히 미워하고 깎아 내리려 하는 행위이다. 시기와 질투에 대한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게 된 것은 지난 주에 소설가 백영옥의 칼럼을 읽었기 때문이다. 소설가는 러시아 민화를 소개했다.

"운 좋게 마술램프를 발견한 농부가 있었다. 램프를 문지르자 램프 속 지니가 나타나 소원을 말하라고 했다. 농부는 옆집에 젖소가 있는데 온 가족을 다 먹이고도 남아서 그들이 우유를 팔아 큰 부자가 되었다고 말했다. 농부의 얘길 듣던 지니가 "옆집처럼 우유가 잘 나오는 젖소를 구해드릴까요?"라고 물으니 농부가 대답했다. "아니, 옆집 젖소를 죽여줘!"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속 깊은 질투와 시기심을 말해 버린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런 시기와 질투로 가득한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왜 그럴까? 첫 번째 원인은 지나친 경쟁 속에서 살고, 거기서 발생하는 불평등이 문제라고 본다. 게다가 우리의 교육문법이 잘 못되어 깊이 사유하는 훈련을 시키지 않고, 경쟁 속에서 지식만을 암기하는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경쟁 속에서 패배감을 느끼면, 우리는 자존감을 잃게 된다.

남의 불행과 고통을 보며 느끼는 기쁨을 독일어로 '샤덴프로이데'라고 한다. 고통을 뜻하는 Schaden과 기쁨을 뜻하는 Freude의 합성어이다. 사람에게는 타인의 고통을 은밀히 즐기는 심리가 있다.  사람은 악하고 선한 본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한 속성에 좀 더 초점을 맞추고, 악한 속성을 최대한 멀리하는 것이 행복해 지는 길이라 나는 믿는다. 그건 자존감에서 나온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오랜 속담은 이런 인간 심리를 잘 드러낸다.

소설가 백영옥은 미국 소설가 고어 비달의 이야기도 소개했다. "친구가 성공할 때마다 나는 조금씩 죽는다." 이처럼 축구에서 골을 넣은 선수는 기쁨에 환호하지만 상대편의 골키퍼는 고통으로 얼굴을 감싼다. 극심한 경쟁 사회에서 시기와 질투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기회와 과정이 공정하다면 입시와 승진, 사업의 성공을 보며 사람들이 느끼는 샤덴프로이데의 심리를 누구도 손가락질할 수 없다. 원래 인간 세계가 야박하고 비정하다.  

반면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 왜냐하면 타인의 슬픔은 아무리 나눠도 마음이 무거울 뿐 진짜 내 것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이웃의 기쁨을 진심으로 나누는 경우는 좀 더 힘들다. 시기와 질투 때문이다. 나의 경우는 시기와 질투가 생기려 하면, 이런 식으로 심리 상태를 바꾼다. 이를 나는 '풍요의 심리'라 한다. 세상에 좋은 것은 많고, 풍요로워서 남이 성공하고 인정받아도 내 몫은 남아 있다고 보는 심리이다. 그 반대 가  '빈곤의 심리'이다. 이 세상 좋은 것은 매우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남이 가져가면 그만큼 내 몫이 줄어든다고 느끼는 심리이다. 백영옥 소설가는 불교의 무디타(Mudita)의 지혜와 제퍼슨이 한 말을 소개했다. 무디타는 타인의 행복을 즐기는 기쁨을 뜻한다. 미국의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이 한 말은 이 거다. "누가 내 등잔의 심지에서 불을 붙여가도 불은 줄어들지 않는다." 나는 '송무백열(松茂柏悅)'이라는 사자성어를 좋아한다. '소나무가 무성하면, 잣나무도 기뻐한다. 사촌이 땅을 사야 나도 잘된다'는 말이다. 제2의 기계시대, 디지털트랜스포메이션 시대, 혁신의 길목에서 필요한 우리의 자세이다.

글이 길어진다. 여기서 멈추고 박화목 시인의 <9월의 기도>를 공유한다. 오늘 아침 사진도 조금 더 높아진 하늘을 어제 찍은 것이다. 빨리 코로나-19가 사라진 가을을 만나고 싶다고 기도했다.

9월의 기도/박화목

가을 하늘은 크낙한 수정 함지박
가을 파란 햇살이 은혜처럼 쏟아지네
저 맑은 빗줄기 속에 하마 그리운
님의 형상을 찾을 때, 그러할 때
너도밤나무 숲 스쳐오는 바람소린 양
문득 들려오는 그윽한 음성
너는 나를 찾으라!

우연한 들판은 정녕 황금물결
훠어이 훠어이 새떼를 쫓는
초동의 목소리 차라리 한가로워
감사하는 마음 저마다 뿌듯하여
저녁놀 바라보면 어느 교회당의 저녁 종소리
네 이웃을 사랑했느냐?

이제 소슬한 가을밤은 깊어
섬돌 아래 귀뚜라미도 한밤내 울어예리
내일 새벽에는 찬 서리 내리려는 듯
내 마음 터전에도 소리 없이 낙엽 질 텐데
이 가을에는 이 가을에는
진실로 기도하게 하소서

가까이 있듯 멀리
멀리 있듯 가까이 있는
아픔의 형제를 위해 또 나를 위해......

우리는 주변 사람을 부러워한다. 눈앞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가까이 있는 이웃사촌이 먼 친척보다 낫다'는 말도 같은 맥락이다. 미국에서 불평등의 대상은 억만장자가 아니라 페이스북에 자랑 질 하는 친구이며, 자신보다 임금을 더 많이 받는 동료다. 우리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말과 서양 속담 '부자란 자신보다 더 많이 버는 동서다'라는 말은 서로 같다. 솔직히 말해 친한 친구나 가까운 동료가 잘 나갈 때 내 안의 그 무엇이 조금씩 무너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만큼 잘사는 사람에 대한 시기와 질투는 무섭고 끈질기다. 그 유혹에 무너지면 진짜 무너지고, 그 유혹에 탈출하면 행복해질 수 있다.

붓다는 인간 심리의 가장 숭고한 상태를 산스크리트어로 "브라흐마비하라"라 했다. '숭고함'이란 해탈의 경지에 도달해 인간의 선과 악을 넘어 자기 자신이 소멸되고 한없는 경외심이 넘치는 단계다.  숭고함의 의미는 '셀 수 없는/경계가 없는' 이다. 이것이 중국으로 넘어오면서 '사무량심(四無量心)', 즉 다음과 같이 네 가지 셀 수 없는 마음'이 된다. 나는 이것을 '사랑의 4단계'라고 본다. 계단을 오를수록 그런 마음을 갖기가 더 어렵다. 코로나-19와 왜곡된 우리 사회의 모습에서 괴로워하지 말고, 나부터 이 가을에는 사무량심을 키울 생각이다.

이어지는 "사무량심"의 이야기는 내 블로그 https://pakhanpyo.blogspot.com 을 누르시면 보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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