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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산속에서/나희덕

인문 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2019년의 9월은 나에게 "멀리서 밝혀져 오는 불빛의 따뜻함"이었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길을 찾고 싶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공유하고 있는 나희덕 시인의 시처럼, "먼 곳의 불빛은/나그네를 쉬게 하는 것이 아니라/계속 걸어갈 수 있게 해준다."

9월에는 잃어버린 '반쪽이'가 "먼 곳의 불빛"이었으면 좋겠다. 오늘날 우리가 ‘학술대회’라고 부르는 심포지엄(symposium)은 그리스 어 ‘심포시온(symposion)’에서 나온 말이다. 이 말은 우리말로 해석하면 ‘향연(饗宴)’이다. 즉 ‘함께 먹고 마신다’는 의미이다. 그리스인들의 향연은 단순히 먹고 마시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푸짐한 식사와 와인을 곁들이면서 주제를 정해 철학적 토론을 즐겼다.

플라톤의 『향연』은 토론을 대화 형식으로 정리한 책이다. 그 때의 주제는 '사랑'이었다. 그래서 그 책의 부제가 ‘사랑에 관하여’이다. 이 중 잃어버린 ‘반쪽이’ 이야기는 심포지엄에서 네 번째 발언권을 가진 아리스토파네스의 이야기이다. 그에 의하면, 원래 인간은 두 사람 씩 등이 붙어있었다고 한다. 남성은 남성 둘이, 여성은 여성 둘이, '자웅동체'인 남녀성은 남자와 여자가 등을 맞대고 붙어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해서 태초에는 인간의 성이 남성과 여성 그리고 제3의 성인 자웅동성이 있었다고 한다. 제 3의 성, 즉 양성인이 지금은 없다. 다만 안드로기노스(Androgynos), 즉 ‘어지자지’라는 남성과 여성을 한 몸에 두루 가진 사람을 지칭하는 순수한 우리말이 남아 있을 뿐이다.

어쨌든 원래 인간은 둥글었다. 등도 둥글고, 옆구리도 둥글었다. 팔도 넷, 다리도 넷, 귀도 넷, 수치스러운 부분인 ‘거시기’도 둘이었다. 다만 머리는 하나였지만 얼굴은 둘이었다. 두 얼굴은 서로 반대 방향을 보고 있었다. 걸을 때는 이들 역시 우리처럼 똑바로 서서 걸었다. 하지만 빨리 뛰고 싶을 때는 곡예사가 공중제비를 넘듯이, 여덟 개의 손발로 땅을 짚어가면서 아주 빠른 속도로 공처럼 굴러갈 수 있었다.

왜 둥글었냐 하면, 인간은 조상들의 모습을 이어받아 원형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성은 태양, 여성은 지구, 남녀성은 달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 인들은 태양과 지구와 달이 둥글둥글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듯하다. 그리고 인간들은 지금보다 더 대단한 힘과 능력을 갖고 있었다. 네 개의 손발을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머리는 하나지만 현재보다 용량이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점점 오만해 지더니 급기야 신들의 자리를 넘보고 위협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어느 날 제우스는 신들을 집합시켰다. 제우스는 오만해진 인간들을 벼락으로 전멸시키고 싶지만 앞으로 받아먹을 제물이 아깝고, 그대로 두 자니 신들에게 기어오르는 게 눈꼴사나워 못 보겠다는 것이다. 모여 회의를 하던 중에 제우스는 좋은 아이디어를 얻었다.

“나는 인간들이 지금보다 약해져서 더 이상 오만해 하지 않도록, 인간들 각각을 둘로 나누겠다. 그러면 인간들은 더 약해질 것이고 또한 동시에 섬기는 인간 숫자가 늘어나니 우리 신들에게는 더 유익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에 인간들이 또 건방지게 굴고 소요를 일으키려 할 때에는 나는 그들을 다시 둘로 나누어서 한 발로 걸어 다닐 수밖에 없도록 하겠다.”

제우스는 이렇게 말하며 삶은 달걀의 껍데기를 벗기고는 머리카락을 가지고 두 토막으로 자르듯이, 번개로 인간들을 둘로 나누었다. 그리고 의술의 신 아폴론을 시켜 얼굴과 목의 반쪽을 잘려 나간 쪽으로 돌려놓게 한 다음 잘린 부분도 치료하도록 했다. 아폴론은 목과 얼굴을 돌려놓고 잘라진 피부를 모아 배 중앙에 묶어 배꼽을 만들었다. 배꼽이 이렇게 나온 것이다. 그리고 더 재미난 것은 아폴론이 목과 얼굴을 돌려놓은 것은 상처를 기억하고 다시는 오만을 떨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였다.

오늘은 쉬는 일요일이니까, 아리스토파네스의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자. “반쪽들이 다른 반쪽들을 목마르게 그리워하고 다시 한 몸이 되려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반쪽이 된 우리는 각각 옛날의 온전했던 한 인간의 부절(符節)이다.” 이때부터 인간은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또 다른 반쪽을 끊임없이 찾게 되었다. 자웅 동성인인 양성인은 잃어버린 이성을, 여성은 잃어버린 또 다른 여성을, 남성은 잃어버린 또 다른 남성을 찾는다. 이렇게 인간은 지금과 같은 반쪽 모습을 갖게 됐고, 나머지 반쪽을 찾아가는 과정이 사랑이라고 한다.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는 사랑을 ‘잃어버린 반쪽에 대한 이끌림'이라고 정의했다. 사랑은 깨진 도자기를 다시 맞춰보듯 하나로 원상을 회복하려는 갈망이다.

올 9월은 힘차게 출발한다. 그만큼 할 일이 많이 기다리고, 또 꿈꿀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산 속"에 있지만, "먼 곳의 불빛"이 보인다. 그 불빛은 나를 쉬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걸어갈 수 있게 해준다.

산속에서/나희덕

길을 잃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리라
터덜거리며 걸어간 길 끝에
멀리서 밝혀져 오는 불빛의 따뜻함을

막무가내의 어둠 속에서
누군가 맞잡을 손이 있다는 것이
인간에 대한 얼마나 새로운 발견인지
산속에서 밤을 맞아본 사람은 알리라
그 산에 갇힌 작은 지붕들이
거대한 산줄기보다
얼마나 큰 힘으로 어깨를 감싸주는지

먼 곳의 불빛은
나그네를 쉬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걸어갈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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