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2년 9월 1일)
코로나로 못 보던 지인들이 어제 복합와인문화공간 < #뱅샾62(Vin#62) >를 찾아 주셨다. 그 일행 중에는 윤동환이라는 배우도 있었다. 난 솔직히 그를 모른다. 나는 평소 TV를 보지 않고, 또 그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프랑스 유학 중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에 인터넷으로 그가 누구인지를 찾아 보았다.
그의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그는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브라운관과 충무로를 주름잡던 배우였다. 그는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주목받는 연기자의 길을 걸어왔다. 그러던 어느 날 갑상선 암 진단을 받고 배우의 생명과도 같은 목소리를 잃어버렸다. 이제는 TV와 스크린에서 더 이상 윤 배우를 찾아보기 힘들지만, 절망 속에서 그는 자연치유의 길을 선택해 요가와 명상 수행으로 기적적으로 목소리를 조금씩 되찾아가고 있는 중이라 했다. 명상과 요가지도사로서 새로운 희망을 찾아 인생 2막을 살고 있는 탤런트 윤동환을 알게 되어 기쁘다.
그리고 다른 분들은 불편했다. 그래 오늘 아침 생각한 화두가 "습명(襲明)"이다. 마침 그 일행 중에 노자 <<도덕경>>을 같이 읽는 지인도 있었다. 그가 어제 "습명"을 말했다.
일상에서 수행할 수 있는 득도(得道)의 길은 보이고 만져지는 것에 가까운 것과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것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할 때,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영역에 가까운 쪽의 것을 선택하면 된다. 한 마디로 말하면 '도'에 가까운 쪽을 선택하면 된다. 예컨대, 구체적인 것보다 추상적인 것을 선택하여야 한다. 모순적인 상황에서 도에 먼 쪽의 것이 보내는 유혹을 이겨내고, 가까운 쪽을 선택할 때 우리는 항상 용기가 필요하다. 이 용기를 발휘하여 도에 가까운 쪽을 선택하는 승리를 한 번 경험하면서 우리는 점점 우주적 삶의 경지로 이동하게 된다. 결국 우주적 삶은 모순적 상황에 처한 매우 미미하고 고독한 주체가 용기를 발휘하는 그 찰나적 순간에서만 피어난다. 이 용기가 여기 멈춰 있는 나를 저기로 건너가게 한다. 이것이 깨달음이다. 노자는 이런 상황을 "습명(襲明)"이라 했다. 그러면서 기존의 자기는 여지없이 깨지고 알지 못했던 곳으로 도달해간다. 여기 있는 자기를 아직 알려지지 않은 저곳으로 이동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우주적 삶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미미한 자신에게 '그렇다면 나는?'이라는 질문을 계속 해대면서 일상에서 작은 승리를 경험 시키는 일이 바로 우주적 삶이다.
그런 '도'에 따른 행동의 완벽성을 제27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잘하는 사람들은 잘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서 잘한다. 도를 아는 사람은 그저 무위(無爲)의 행을 하기에 전혀 스스럼없이 세상 일을 행한다. 시끄럽고 요란하게 하는 사람들은 결국에는 성과없이 끝나는 경우가 많은데, 진정 잘 준비된 사람은 그저 흐름에 따라서 세상 일을 처리한다. 도를 아는 사람의 삶은 물 흐르듯 바람에 흔들리듯 그저 가장 자연스러운 삶을 산다. 노자 이렇게 말했다.
善行無轍迹(선행무철적) : 잘 걷는(잘 가는) 사람은 자취를 남기지 않고
善言無瑕謫(선언무하적) : 잘 하는 말에는 흠이 없으며
善數不用籌策(선수불용주책) : 셈을 잘하는 사람은 계산기를 쓰지 않는다.
善閉無關楗而不可開(선폐무관건이불가개) : 잘 닫힌 문은 빗장을 걸어 놓지 않아도 열 수 없고
(관건-關楗-은 '어떤 문제 해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란 말로 쓰인다)
善結無繩約而不可解(선결무승약이불가해) : 잘 된 매듭은 꽉 졸라매지 않아도 풀 수 없다.
是以聖人常善求人(시이성인상선구인) 故無棄人(고무기인): 그러므로 성인은 언제나 사람을 잘 구하고, 아무도 버리지 않는다.
常善救物(상선구물) 故無棄物(고무기물): 물건을 잘 구하고, 아무것도 버리지 않는다.
是謂襲明(시위습명) : 이를 일러 '습명(밝음을 잇는다)'이라 한다.
도통한, 아니 득도한 사람은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행동만을 하기 때문에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좋은 물건, 나쁜 물건으로 사람이나 사물을 차별하지 않는다. 어제 저녁 나는 마음 속으로 사람들을 차별했다. 늘 <<도덕경>>을 읽으면 무엇 하는가? 일상에서 무너지는데 말이다.
도통한, 아니 득도한 사람은 모든 사람, 모든 사물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대하고, 어느 누구도, 어느 것도 무시하거나 버리는 일이 없어야 한다. 선한 사람에게는 잘 해주고, 선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등을 돌린다 거나, 좋은 물건은 아끼고, 좋지 못한 물건은 버리는 사람은 아직 경지에 이르지 못한 사람이다. 아직도 일상적, 상식적 차원에서 분별과 차별을 가지고 우리가 세워 놓은 기준에 따라 행동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보통인의 차별주의적 단계를 넘어 모든 사람, 모든 사물을 한결같이 대하는 성인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노자는 "습명(襲明)"이라 했다. 어제 그 "습명"이 나에게 왔다.
"습명"은 자연스러운 깨달음, 직관적으로 사물의 본질을 깨우치는 것이다. 습자는 '엄습할 습'자로 어떤 깨달음이 부지불식간에 훅 하고 다가온다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다. 한밤중 소리 없이 안방으로 엄습해 들어오는 고양이처럼 말이다. 화두를 붙들고 낑낑거린다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머리를 비우면 자연스럽게 깨달음이 찾아온다. 그래서 모든 깨달음은 본질적으로 "습명"이다. 보리수 밑에서 석가모니가 얻은 깨달음도 "습명"이고, 광야에서 예수가 찾은 깨달음도 "습명"이다.
그런 깨달음으로 밝음(明)을 물려받아서 사람을 함부로 버리지 않고, 물건도 함부로 버리지 않아서 꼭 필요한 곳에서 사용한다. 이해 관계에 따라서 쳐내고 새로 맞아들이고, 또 쳐내고 하면서 아주 능력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사람을 필요한 곳에 적절히 활용하는 것이다. 어제 저녁의 일을 보면 난 아직 더 노력해야 한다. 우선 사람을 구분한다.
이 장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故善人者(고선인자) 不善人之師(불선인지사): 그러므로 선한 사람은 선하지 못한 사람의 스승이요
不善人者(불선인자) 善人之資(선인지자): 선하지 못한 사람은 선한 사람의 감 또는 바탕(資, 물자, 도올은 거울로 해석)이다.
不貴其師(불귀기사) 不愛其資(불애기자) 雖智大迷(수지대미): 스승을 귀히 여기지 못하는 사람이나 바탕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그 거울을 아끼지 아니하면) 비록 지혜롭다 해도 크게 미혹(정신을 차리지 못함)될 것이다.
是謂要妙(시위요묘) : 이것이 바로 도의 요체이면서 오묘함이다.
오늘 아침 또 주목한 단어는 "요묘(要妙)"이다. 일반적인 해석과 달리, 여기서 "요"는, 여러가지 뜻이 있지만, '얻었다'는 의미로도 읽을 수 있다. 그러니까 "묘'를 얻었다는 것은 열심히 노력해서 최고의 기술을 익힘을 넘어서는 거다. 나는 박문호 박사의 유튜브 강의에서 경력자와 전문가의 차이를 배웠다. 경력자는 그냥 기술적인 달인(達人)이다. 최고의 달인이 되는 것은 수많은 연습과 반복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그 너머의 보이지 않는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그것 이상이 필요하다. 이게 "묘"의 세계일 것이다.
결국 <<도덕경>> 제27장에서 노자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밝음(明)"과 "묘함(妙)"을 얻는 거라고 보자는 거다. 그건 세상에서 남들이 모르는 것을 얻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남들이 나누고 분별하고 판단하는 것의 훨씬 너머를 보는 것이다. <<행복한 비움>>의 저자 김선국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선인과 불선인은 그 그릇이나 역할이 다르다. 하나는 스승(師)이요. 하나는 자산(資)이다. 스승은 자산이 어딘 가에 쓸모 있음을 보는 이다. 세상에서 아무 짝에도 쓸모 없음조차 어떤 쓰임새를 보는 것이 묘(妙)이다." 묘의 세계를 보아야한다. 선인인 스승은 다른 안목과 맥락으로 세상을 보고 읽는다. 나에게 필요한 거다. 그저 눈에 보이는 좋고 나쁨 너머에 있는 각 존재의 고유한 가치를 보는 것이다. 9월에는 좀 더 수련을 해야 겠다. 9월이 오면 늘 기억하는 시이다.
9월이 오면/안도현
그대 구월이 오면 구월의 강가에 나가
강물이 여물어 가는 소리를 듣는지요
뒤따르는 강물이 앞서가는
강물에게 가만히 등을 토닥이며 밀어주면
앞서가는 강물이 알았다는 듯 한 번 더 몸을 뒤척이며
물결로 출렁 걸음을 옮기는 것을
그때 강둑 위로 지아비가 끌고 지어미가
미는 손수레가 저무는 인간의 마을을 향해 가는 것을
그대 구월의 강가에서 생각하는지요
강물이 저희끼리만 속삭이며 바다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젖은 손이 닿는 곳마다
골고루 숨결을 나누어 주는 것을 그리하여
들꽃들이 피어나 가을이 아름다워지고
우리 사랑도 강물처럼 익어가는 것을
그대 사랑이란 어찌 우리 둘만의 사랑이겠는지요
그대가 바라보는 강물이
구월 들판을 금빛으로 만들고 가듯이
사람이 사는 마을에서 사람과 더불어 몸을 부비며
우리도 모르는 남에게 남겨줄
그 무엇이 되어야 하는 것을
구월이 오면 구월의 강가에 나가
우리가 따뜻한 피로 흐르는 강물이 되어
세상을 적셔야 하는 것을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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