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1.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3년 8월 29일)
인생은 본래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긴 여정이다. 그런 시도를 '정신을 차렸다' 혹은 '제 정신 이다'라고 부른다. '제 정신'은 순수 한국어 '저의'의 준말 '제'와 '정신'의 합성어다. 우리가 자신의 정신으로 사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자기하고는 상관이 없는, 혹은 자신하고 연관된 타인들이 좋다고 제시한 세계관, 종교관, 삶의 철학을 수용하여 자기 삶의 문법을 구축하려 한다. 타인의 이념, 철학, 교리, 가르침은 아무리 훌륭하다 하더라도 허물어질 수밖에 없는 모래 위에서 세운 집이다.
인간의 마음은 두 가지다. 하나는 그런 외부의 유혹에 경도 된 '욕심'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되어야 하고 자신이 될 수 있는 그 마음인 '본심', 즉 '제 정신'이다. 본심은 성배와 같아서 아무 에게나 주어지는 선물이 아니다. 그 존재가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지 가만히 추적하고, 그것을 찾기 위해 매일매일 수련 할 때, 슬그머니 등장하는 밤하늘의 작은 별이다. 반면, '욕심'은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진리를 모르는 무식한 사람들의 처사다. 그것은 배가 부르면서도 자신 앞에 차려진 진수성찬을 게걸스럽게 먹으려는 식탐과 같다. 인간은 동물 중에서 자신이 배부른지 알면서도 과도한 음식으로 배를 채우는 유일한 동물이다.
욕심(慾)이란 한자가 그렇다. 깊은 골짜기(谷)에서 끝없이 흘러내려 오는 물을 자신의 작은 입을 벌려(欠)다 마셔보겠다는 마음(心)이다. 욕망이란 단어가 근사한 것 같지만, 사실은 자신을 매일 값싸게 만드는 마음의 마약이다. 이 욕심에서 벗어나 자신으로 돌아와야 자신에게 온전하고 타인에게 친절한 사람이 된다. 인간은 모두 그런 마음을 지니고 있다. 바로 '본심'이고 '제 정신'이다.
'제 정신', 즉 '본심'은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웅장한 나무의 뿌리와 같다. 저 큰 나무가 언제나 중력을 거슬러 저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를 수 있는 이유는, 그 높이와 너비에 어울리는 뿌리가 있기 때문이다. 본심은 모든 인간이 지니고 있는 원래의 마음, 참마음이다. 인간 마음속 깊은 곳에서 누군가의 발굴과 발견을 기다리고 있다. 교육은 이 본심을 정성스럽게 발굴하는 체계다. 이 본심은 이웃과 심지어는 원수와도 마음이 이심전심으로 통하기 때문에 인류, 자연, 그리고 우주처럼 보편적이다. 이 보편적인 마음을 힌두교 경전 '우파니샤드'는 '아함 브라흐마스미', 즉 '나는 우주다'라고 선언한다.
인간은 동물로 태어난다. 태어나서 하는 일이란, 배가 부르고 편하면 웃거나 자고 혹은 불편하거나 배고프면 우는 것이다. 동물은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거나 자신의 유전자 속에 장착된, 조상에게 물려받는 이기적인 유전자 프로그램대로 움직일 뿐이다.
그리스 비극 시인 소포클레스는 비극 <<필록텍테스>>에서 인간의 본성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여, 인간은 끊임없는 슬픔과 형용할 수 없는 고뇌의 운명을 타고났다." 자신의 욕심을 위해 싸우는 세상은 지옥이기 때문이다
여기 역경과 고통을 통해 자신으로 돌아온, 자신의 본심을 발견한 이야기가 있다. 신약 성서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소위 '탕자의 비유'라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에서 둘째 아들은 욕심에 사로잡혀 있다. 아버지에게 자신의 유산을 미리 요구하여, '먼 지방'에서 쾌락을 위해 산다. '먼 지방'은 자신이 원래 있어야 하는 '본향'과는 달리 무한 경쟁과 적자 생존을 통해 살아남는 장소다. 그곳은 또한 권력과 돈, 명예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약육강식의 치열한 싸움터다. 영적으로 고갈되어 있는 이곳에선 그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순간의 쾌락을 위한 유혹이 난무한다. 쾌락은 이곳에 존재하는 무시무시한 경쟁을 잠시 잊게 해주는 마약이다. 성서는 작은아들이 "거기에서 방탕하게 살면서, 그 재산을 낭비하였다"라고 기록한다.
여기서 '재산'이란 원래 자신의 모습이며 존재다. 인간은 언젠가 이와 유사한 과정을 밟는다. 가정이라는 위대한 공동체를 통해 사랑과 헌신이 가장 소중한 가치라는 것을 배웠지만, 학교에서는 경쟁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첨예하게 연마한다. 우리는 그 욕망의 소용돌이 안에서 영적으로 빈사 상태가 되고 끝없는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상대방을 경쟁과 극복의 대상으로 여긴다. '방탕하게 살았다'라는 표현은 육체적인 타락 뿐만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본심의 고사 상태이기도 하다. 본심에서 흘러나오는 '사랑과 용서'라는 가치가 고갈 되어 있는 상태이다. 배철현 교수의 글을 보고 배운 거다. 산책 길에서 만난 바람도 나에게 그렇게 전했다.
바람이 전하는/최서림
이제 그만 납작 엎드려 민들레로 살라 하네.
몸 안에 공기 주머니를 차고 방울새로 살라 하네.
부딪히지 말고 돌아서 가는 물로 살라 하네.
위벽을 할퀴고 쥐어짜듯 아픈 새벽
유리창을 두드리며 바람이 일러주는 말,
비우면 채워지고 비우면 채워지니 강물처럼 살라 하네.
물새 똥 앉은 조약돌처럼 구르고 구르면서 살라 하네.
중독으로 벗어나는 길을 나는 알고 있다. 돈과 자리에 중독되면 ‘제 정신 아닌’ 말과 행동을 하게 된다. 그 사례는 넘친다. 중독의 문제이다. 중독 되지 않은 생명은 근원적으로 '활동'과 '네트워크'의 순환으로 이루어진다. 다시 말하면, '관계'와 '활동'를 통한 순환이 생명의 원리이다. 소유와 성공, 곧 돈과 물질에 관련된 것만 매달리면 꼭 막히게 되고, 끝에서는 허무할 뿐이다. 살 맛이 나려면, 어떤 활동을 하고 관계를 맺는 게 중요하다. 계속 어딘 가로, 누군 가로 이어져야 한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길 위의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데 길 위에서 누군 가를 만난다고 할 때 그걸 연결해 주는 건 지성밖에 없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이 중독을 벗어나는 길이다. 그 길을 나는 몇 해 전에 고미숙의 책으로부터 배웠다. 그녀에 의하면, 우리가 자본의 공세에 맞서고, 상품의 유혹에 끌려 다니지 않으려면, 일상을 구성하는 힘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 일상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자산, 즉 생각, 말 그리고 행동을 지식에서 지성으로 그리고 지성에서 영성으로 전환하려는 생각, 말 그리고 행동을 하는 거다. 이 말은 우리들에게 "욕망의 재배치"를 요구하고 있는 거다. 다시 말하면, 욕망의 '건너 가기'를 해야 한다. 어떻게? "쾌락에서 지성으로, 중독에서 영성"으로 건너가야 한다고 했다.
지식, 지성 그리고 지혜 , '3 지(知)'에서, 지식은 주로 정보, 물질의 원리를 탐구하는 것, 그리고 그걸로 인간이 누리는 부를 확장하는 것이다. 고미숙은 이걸 '기술지(技術知)'라 부른다. 지성은 '문명지(文明知)'라고 정의한다. 물질을 알고 부를 확장하면 그걸 어떻게 나누고, 이걸 어떻게 인간 삶에 적용할까, 이 문제가 부각되는데, 그럴 때 관계에 대한 탐구를 하는 것이 지성이다. 기술지와 접속하는 것이다. 그 다음은 지혜이다. 인간은 천지를 연결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간 너머가 궁금하다. 그때 우리는 인간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니라 생명에 대해 묻게 된다. 그리고 지구를 묻는 것이 아니라 우주를 질문하는 것이 지혜이다. 이 영역으로 가면 기술지와 문명지처럼 손에 잡을 수 있는 게 없다. 거대한 무의 세계를 만나게 된다. 생명과 우주가 무엇인 가라고 묻게 되면 그 보이는 모든 것을 해체해 버린다. 그걸 지혜라고 부르는데, 동시에 영성(靈性)이라고도 한다. 그걸 인류학적 용어로 쓰면 '자연지(自然知)'이다.
고미숙에 의하면, 한 사회의 문명 수준을 알려면 이 지식, 지성 그리고 지혜의 인드라망 순환을 보아야 한다고 했다. 그 순환을 통해 그 사회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인식의 방향이 결정된다. 이때 가장 중요한 인간 다운 앎은 지혜, 영성이다. 그래 이것이 바탕이 되어야 기술지와 문명지도 그 활발한 역동성을 갖게 된다. 왜 그런 가? 지식은 계속 기술을 확대해서 인간 마음에 소유에 대한 증폭, 곧 욕망을 불어넣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너무 많은 것을 갖고 싶고 누리고 싶어지 게 하는 거다. 이 마음을 해체하는 게 지혜인데, 이 지혜가 개입하지 않으면 무조건 욕망을 향해 나아간다. 그래서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우리가 더 자유로워질 수 없는 거다. 한편 지성은 사회적 관계에 대한 많은 시행착오와 토론, 논쟁, 교육 등을 주도하는데, 이 지성이 지혜와 연결되지 않을 때, 그것은 엘리트와 대중의 차이가 강화되는 쪽으로, 그래서 엘리트가 대중을 지배하고 군림하는 식으로 나가게 된다.
이 말은 우리들에게 "욕망의 재배치"를 하라는 거다. 다시 말하면, 욕망의 '건너 가기'를 해야 한다는 거다. 어떻게? "쾌락에서 지성으로, 중독에서 영성"으로 건너가야 한다는 거다. 아무리 멋진 자동차나 명품 가방도,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시시해 진다. 더 좋은 자동차와 가방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 쾌락 적응은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꿈에 그리던 상대를 만나 관계를 맺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방의 장점이 아니라 약점에 대해 '깊이 숙고'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내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를 갈망한다. 우리는 쾌락 적응을 통해, 만족이 불가능한 쳇 바퀴 속에서 스스로를 소진한다. 인간은 실현이 불가능한 욕망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 불행하다. 우리는 한 가지 욕망을 실현 시켰을 때, 만족스러울 것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그 욕망이 실현되었을 때, 욕망은 진부한 일상이 되기 때문이다.
현 정권은 지성이 부족하다. 사업으로 사람을 만나는 건 교환 관계에 들어가는 거다. 그런데 지성을 통해 누군 가와 친해지면 그 공간이 바로 우리의 일상으로 들어 온다. 그 일상 속에서 소유보다는 사람, 즉 존재로 나가는 게 중요하다. 그러면 서로의 생각이 접속을 한다. 이런 접속을 통해 가치가 생성된다. 무에서 유가 나오는 것이지, 유에서 유가 나오는 것은 유통기한이 아주 짧다. 돈 놓고 돈 먹는 것은 굉장히 유용하고 효율적이지만, 그건 순식간에 다 거덜나는 경우가 많다. 보이지 않는 무에서 유가 나와야 가치가 되는 거다. 원래 보이지 않는 지혜에서 물질이 나온다. 이 무형의 자산 없이는 물질만 갖고 돌려 막기를 할 수 없다. 정신적인 자산을 가지고 있을 때는 설령 망해도 그 다음에 이 실패에서 뭔가 배우고 도약할 수 있는 베이스를 갖게 된다. 그런 사람은 새로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알면서도, 우리는 일상에서 활동이 아니라 노동을 하고, 접속을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이다. 화폐를 늘려야 하기 때문에 관계가 단절된다는 말이다. 다른 것들과 접속할 시간이 없다. 그러니까 생성이 이루어지지 않고, 감각의 차이만 만들어 낸다. 차이의 생성을 만들어 내는 것이 삶의 큰 즐거움이고 의미가 된다. 반대로 감각만이 늘어나는 게 중독이다.
물론 중독에는 좋은 중독도 있다. 예컨대, 공부에 중독되는 것은 좋은 중독이고, 마약이나 스마트폰에 중독되는 것은 나쁜 중독이다. 공부 같은 좋은 중독은 즐거움의 선순환 고리를 연결해 삶을 재생시키며 생명의 원리를 보이지만, 스마트폰이나 마약 중독은 즐거움은 악순환의 고리를 완성해 궁극적으로 삶을 죽음으로 이끈다.
좋은 중독의 예인 공부 중독은 자신을 지속적으로 해체하고 다시 해방시키는 즐거움을 가져다 준다. 공부는 해방의 도구이다. 공부를 통해 자신이 삶의 진실에 더 가까워지면 더 큰 자유로움을 느끼고 자신이 주체적으로 세상을 통제해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는다. 그래 공부는 해방되어 자유로워진다. 그리고 공부를 통해 탁월한 시선에 이르면 그만큼 세상을 통제하는 힘이 더 커진다. 그리고 주제적이고 독립적인 사람이 된다. 윤 정구교수의 말을 직접 들어본다.
"인간 의식의 본질은 자유로움이다. 공부에 대한 중독은 의식의 자유로움을 통해 몸을 해방시키는 과정이다. [그 해방된 만큼] 세상과 자신이 끊임없이 교감[소통]할 수 있고, 이 교감[소통]을 통해 삶의 에너지를 스스로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즐거움이 플로우처럼 의식의 과정으로 받아들여져 더 큰 즐거움을 낳게 하는 선순환이 완성된다." 그리고 "진짜 공부를 통한 선순환의 더 큰 즐거움은 자신과 교류하기 위해 멀리서도 찾아오는 친구들이 많아진다는 점이다. 좋은 중독과 나쁜 중독의 차이는 결국 자신과 진정으로 교류하는 친구들이 많아지는지 아니면 있던 친구도 점점 사라져가는지 로도 종결된다."
이제 공자가 <<논어>>에서 인간으로서 가장 큰 즐거움을 얻는 순간을 공부와 친구로 규정하는지를 잘 알게 되었다. "學而時習之 不亦說好(학이지습지 불역열호, 배우고 때맞춰 그것을 익힌다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 가>와 "有朋自遠方來 不亦樂浩(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온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 가)"를 <논어>의 제일 앞에 말한 이유를 잘 알았다. 학문의 즐거움과 친구가 멀리서 찾아오는 즐거움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결국 동아시아에서는 공부를 지속하여 학문적으로 깨달음을 얻고 이것을 친구와 같이 나눌 수 있는 것을 가장 큰 즐거움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다 보니 학문을 통해 더 큰 깨달음을 얻고 여기에서 즐거움을 얻는다면 우리는 이 즐거움을 또 다시 얻기 위해서 또 학문에 정진하게 된다. 이것도 일종의 중독이다. 즉 학문에 중독되는 거다.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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