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1년 8월 29일)
요즈음 읽고 있는 <<장자>>의 제6편 "대종사"는 맨 처음에 '진정한 앎'이란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자연이 아는 일과 사람이 아는 일을 아는 사람은 지극한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다. 지난 금요일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자연이 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자연과 함께 살아가고, 사람이 하는 일을 아는 사람은 그의 '앎이 아는 것'으로 그의 '앎이 알지 못하는 것'을 보완한다. 이리하여 자연이 내린 수명을 다하여 중도에 죽는 일이 없는 것, 이것이 앎의 완성이다.
내가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자연이 내린 수명을 다하여 중도에 죽지 않는 거다. 원문은 이 거다. "終其天年而不中道夭者(종기천년이부중도요자) 是知之盛也(시지지성야)" 이는 그 천수를 다하고 도중에 일찍 죽지 않는 것, 다르게 말하면, 하늘이 내린 수명을 다하여 중간에서 죽는 요절(夭折)이 없는 것이 앎의 풍성한 것, 아니 완성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사해경>>에 이런 문장을 만날 수 있다. "지상의 모든 공간, 온 세계는 해와 달로 빛을 삼고 별자리로 위치를 정하며 사계절로 한 해를 삼고 태세(그 해의 간지,干支)로 때를 바로잡는다. 신령[성령]이 낳은 바 모든 사물은 저마다 모습을 달리하여 어떤 것은 요절하기도 하고 어떤 것은 오래 살기도 하는 데 오직 성인 만이 이 방면의 원리에 통달할 수 있다." 요절이야기가 나오면, 앞에서 말했던, 장자의 이 문장이 떠오른다. “수준이 가장 높은 사람은 하늘이 하는 일을 알면서, 인간이 하는 일을 아는 사람이다(知天之所爲. 知人之所爲者. 至矣)."
원래 인간은 두 세계를 겹쳐 놓은 무대에서 사는데, 하나는 자연의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문명의 세계이다. 한 사람이 이 두 세계를 가장 높은 차원에서 알게 된다면, 그는 지적으로 가장 탁월한 능력자이다. 이 두 세계를 우리는 ‘문文’과 ‘이理’로 나눈다. 장자는 “하늘이 하는 일과 인간이 하는 일을 모두 아는” 비범한 높이의 인격을 가진 사람은 “천수를 누리고 중도에 요절하지 않는다. 이것이 지적으로 최고의 단계이다. (終其天年 而不中道夭者, 是知之盛也)”고 말했다. 그러니까 천수를 누리려면, 자연의 이치를 알고, 자연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말 같다. 그리고 사람이 하는 일을 아는 사람은 그의 '앎이 아는 것'으로 그의 '앎이 알지 못하는 것'을 보완한다.
그러나 여기에 어려운 점이 하나 있다. 앎은 무엇에 근거해야만 비로소 올바른 앎이 된다. 그런 그 근거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내가 자연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인위적인 것이고, 내가 인위적이라고 하는 것이 자연이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 보통 인간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 견해'에 사로잡혀 있다. 역사적으로도 그랬고, 우리 일생을 통해, 이런 저런 선입견에 한번 길들면 그것을 만고 불변하는 진리처럼 떠받들고 산다. 말하자면 세뇌된 상태이면서도, 이런 상태를 의식하지도 못하면서 살아가는 셈이다. 이러한 우리의 무지와 착각과 오류를 지적해서 우리를 일깨워 줄 사람이 누구인가? 여기에 대한 대답으로 '진인'이 등장한다. '진인'은 장자가 설정한 '참된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참 모습이다. 이는 추상적인 인물상이 아니라, 꾸준히 노력하면 누구나 얻을 수 있는 경지이다. 오늘의 시를 한 편 공유한 후, 그 진인, 아니 참된 인간의 모습을 내 방식대로 풀어본다. 나는 어떤 사람으로 끝날까?
사람/이생진
어떤 사람은 인형으로 끝난다
어떤 사람은 목마로 끝나고
어떤 사람은 생식으로 끝난다
어떤 사람은 무정란으로 끝나고
어떤 사람은 참 우습게 끝난다
제일 먼저 이렇게 시작한다. "有眞人 而後有眞知(유진인 이후유진지)" 이 말은 '참된 사람이 있고 난 다음 에야 참된 지식이 있다'는 것이다. 장자가 말하는 진인, 즉 진실한 사람은 참된 사람이고 '위대한 개인'이다. 즉 참된 사람이 되려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이 달라지면 세계를 보는 눈이 달라지고, 세계를 보는 눈이 달라지면 삶에 대한 관점도 달라지며, 그에 따라 사람의 태도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지식만으로는 완전한 것이 못 된다. 장자가 말하는 진인은 우주의 법칙에 따라 자연에 순응한 채 욕심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다. 자신의 삶을 주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 모습들을 열거해 본다. 우선 '8불(不)'이다.
(1) 불역과(不逆寡): 적다고 해서 거절하지 않는다. 이는 역경이나 실패에 처해서도 그것을 거스리지 않고 주어진 대로 받아들인다. 여기서 역은 '거절하다'란 뜻이다.
(2) 불웅성(不雄成): 꿈(功)을 이루어도 뽐내지 않는다. 여기서 웅은 '자랑하다, 뽐내다'이다.
(3) 불모사(不謨士): 인위적으로 일을 도모하지 않는다. 모든 일을 자연에 맡긴다. 여기서 사(士)는 사(事)와 같다.
(4) 과이불회(過而不悔): 일이 실패하여도 후회하지 않는다.
(5) 당이불자득(當而不自得): 일이 합당하게 이루어져도 우쭐거리지 않는다. 일의 성패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는다. 즉 일의 성패 때문에 후회하거나 좋아하지 않는다.
(6) 등고불률(登高不慄): 높은 데 올라가도 두려워 떨지 않는다.
(7) 입수불유(入水不濡): 물 속에 들어가도 젖지 아니한다.
(8) 입화불열(入火不熱): 불 속에 들어가도 뜨거워 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앎이 도(道)의 경지에 오른 사람과 같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장자가 말하는 진인이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변화하는 바깥 세계에는 관심이 없고, 집착하는 게 없으니 시비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는 외물에 구애받지 않으니 근심걱정을 모르며, 잠자리에서는 꿈조차 꾸지 않는다. 이처럼 우주의 법칙에 따라 자연에 순응한 채 욕심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다. 자신의 삶을 주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의 모습을 다시 또 열거해 본다. 다음과 같이 4가지 모습을 보인다.
(1) 기침불몽(基寢不夢): 잠잘 때에는 꿈을 꾸지 않는다. 마음과 몸이 외부 사물에 끌려 다니지 않기 때문에 잠잘 때 꿈을 꾸지 않는다.
(2) 기교무우(基覺無憂): 깨어 있을 때에는 근심이 없다. 만나는 모든 걸 합당하게 여기서 편안한 거다.
(3) 기식불감(基食不甘): 먹을 때에는 달게 여기지 않는다. 스스로 도를 즐기기 때문에 세속적인 맛을 추구하지 않는다.
(4) 기식심심(基息深深): 숨은 길고 길다. 마음이 안정되어 있기 있기 때문에 숨이 조급하지 않다. 숨이 깊다는 것은 숨이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는 말이다. 마음이 태연하여 외부 세계에 의해 동요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진인의 숨쉬기는 다르다. "진인지식이종, 중인지식이후(眞人之息以踵, 衆人之息以喉)"하여 "굴복자 기익언약와(屈服者, 基嗌言若哇), 기기욕심자(基耆欲深者), 기천기천(基天基淺)"하다. '진인의 숨은 발뒤꿈치까지 미치는데, 보통 사람의 숨은 목구멍까지 미칠 뿐이다. 남에게 굴복하는 사람은 목 메인 듯 아첨하는 말소리가 마치 토하는 것 같고, 욕망이 갚은 사람은 자연의 기틀이 얕다'는 말이다. 숨이 발뒤꿈치까지 미친다는 것은 숨이 길고 편안하다는 거다. 목구멍으로 숨을 쉰다는 것은 숨이 가쁘고 조급하여 목구멍까지 만 미친다는 거다. 여기서 천기(天機)는 자연의 기틀로 생명을 지속시키는 근본을 말한다. 그러니까 기욕(嗜欲)과 천기는 서로 반비례 관계에 있으므로 기욕을 줄이는 것이 천기를 지속시키는 방법이다.
이어지는 진인 이야기, 더 나아가 성인 이야기는 내일로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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