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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튀밥에 대하여/안도현

인문 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오늘 일요일 아침이다. 지난 한 주 동안 가장 뜨거운 감자는 일부 교회의 광화문 집회와 코로나-19의 재 창궐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내가 지난 주에 읽은 가장 흥미로웠던 칼럼은, "역사가 증명해주는 바, 지식과 가치에도 유통기한이 있다. 과연 한국 개신교의 유통기한은 남아있을까" 라는 질문을 한 장대익 교수의 것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나 자신을 되돌아 보면서, 내가 하는 생각이  망상이 아닌가 질문하게 했다.

장교수에 의하면, 지금 우리 사회는 망상에 사로잡힌 일부 종교 집단들 때문에 국가적 대혼란에 빠졌다는 것이다. 그래 나는 망상의 뜻에 대해 찾아 보았다. <나무위키>에 의하면, 망상은 '이치에 어그러진 생각' 혹은 '병적 원인에 의해 생기는 객관적으로 불합리한 그릇된 주관적 신념'으로 정의된다. 현실에 기인하지 않은 생각이나 이론, 세상을 보는 관점 등에 있어서 그것을 정확한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 경우를 이야기 한다. 전**이라는 목사의 이런 발언, “중국 우한 바이러스로 우리 교회에 테러를 했다. 집회에 참석하면 성령의 불이 떨어져 있던 병도 낫는다"는 그의 발언은 상상력과 ‘근자감’, 아니 망상의 결정판이다.

그런 의미에서 장대익 교수가 소개한 이 문장은 뼈를 때린다. “누군가 망상에 시달리면 정신이상이라고 한다. 다수가 망상에 시달리면 종교라고 한다.” (세계적 베스트셀러 <선(禪)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의 저자) 지금 우리 사회는 다수가 망상에 시달리고 있다. 망상 속에서 타인(타 집단)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자신의 신념을 관철해온 한국 개신교의 역사는 짧지 않다. 광화문집회에 참여한 사랑제일교회 신도들과 대면 예배를 고집하는 교인들의 행태도 같은 선상에 있다. 국가 전체에 피해를 주면서 자기 자신에게도 치명적일 수 있는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예배는 생명이기에 목숨 걸고라도 대면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강변하는 교인들에게 ‘당신 목숨이나 거세요. 타인에게 피해주지 말고’라고 소리치고 싶은 사람은 나 뿐만이 아닐 것이다. 대체 왜 한국의 개신교인들은 세상의 걱정거리가 되었을까? 자신의 목숨 마저도 가벼이 여기면서 말이다.

복잡하고,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가 계속된다. 이쯤해서 시를 한 편 읽으며, 머리를 식힌다. 주말 농장 가는 길에서 만난 메 꽃은 있는 듯, 없는 듯하다. 안도현 시인은  메 꽃과 나팔꽃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프랑스어에 'Non-lieu(농-리외)'라는 말이 있다. 우리 말로 하면 '자리 없는 자리'라는 개념이다. 그 반댓말이 우리가 흔히 쓰는 '미친 존재'이다. 몇몇 '미친 존재들이 우리 사회를 혼란스럽게 한다. 그래 오늘 아침은 아련한 어린시절의 추억을 불러오는 시 한 편을, 강요받는 '집꼭'의 시간에 읽고 싶다.

튀밥에 대하여/안도현

변두리 공터 부근
적막이며 개똥 무더기를 동무 삼아 지나가다 보면
난데없이 옆구리를 치는 뜨거운
튀밥 냄새 만날 때 있지

그 짓 하다 들킨 똥개처럼 놀라 돌아보면
망할 놈의 튀밥장수, 망하기는 커녕
한 이십 년 전부터 그저 그래 왔다는 듯이
뭉개 뭉개 단내 나는 김을 피워 올리고

생각나지, 햇볕처럼 하얀 튀밥을
하나라도 더 주워 먹으려고 우르르 몰리던
그때, 우리는 영락없는 송사리 떼였지
흑백사진 속으로 60년대며 70년대 다 들여보내고
세상에 뛰쳐나온 우리들

풍문으로 듣고 있지, 지금 누구는
나무를 타고 오른다는 가물치가 되었다 하고
누구는 팔뚝만한 메기기 되어 진흙탕에서 놀고
또 누구는 모래무지 되고 붕어도 잉어도 되었다는데

삶이 가르쳐 준 길을 따라 제대로
나는 가고 있는지, 가령
쌀 한 됫박에 감미료 조금 넣고
한없이 돌리다가 어느 순간 뻥, 튀밥을 한 자루나 만들어 내는 것처럼
순식간에 뒤집히는 삶을 기다려오지는 않았는지

튀밥으로 배 채우려는 욕심이 크면 클수록
입 안에는 혓바늘이 각성처럼 돋지
안 먹겠다고, 저녁밥 안 먹겠다고 떼쓰다
어머니한테 혼나고 매만 맞는 거지

믿음과 진실은 구별해야 하지만, 믿음은 인간이 구축한 문명화와 문화를 지탱하는 힘이다. 믿음은 내가 사는 사회가 정상적이어서, 나를 악이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이다. 믿음은 나의 신실함을 보았던 동료가 소문에 의거하여 나를 의심하고 배척하지 않을 것이라는 바램이다. 서로 믿는 믿음의 세계가 구축되려면, 중요한 것이 서로 간의 분명한 소통이 보장 되는 언어가 있어야 하고, 그 언어로 뒤에서 뒷담화를 할 수 있는 분위기가 보장되어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믿음의 신념 체계가 우연히 알게 된 것들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는 일이다. 자기가 믿는 신념 체계가 유일하고 정당하고 옳은 체계라고 착각하면 문제가 되기 시작한다. 우리 사회가 다소 그러한 점이 있다. 그런 착각을 하는 사람은 상대방의 신념을 고치려고 충고하고 질책하기까지 한다.

우리가 말하는 좌와 우의 문제도 그렇다. 자신에게 운명적으로 주어진 위치에 따라 자신의 세계관과 그 신념이 형성될 뿐이다. 예컨대, 1에서 10까지의 눈금이 있어, 내가 2에 있다면 1은 좌이고, 나머지 3-10은 우이다. 내가 9에 있다면, 1-8운 좌이고, 10은 우이다. 자신에게 운명적으로 주어진 위치에 따라 자신의 세계관과 그 신념이 형성된다. 그래서 우리는 공부하고 배워야 한다. 왜냐하면 공부나 배움은 자신의 눈금을 객관적으로 보려는 노력이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세계관이 형성된 눈금이 중요한 만큼, 상대방에게도 그의 눈금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깨달음이다.

깨달은 사람은 자신의 눈금을 깊이 파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에게 그 눈금이 구속시키는 프레임이라면, 그것을 벗어 버리고 상대방 눈금의 위치를 알아차리고 역지사지하는 공감을 지닌 사람이다. 세상에 제일 무서운 신념이 근본주의(根本主義)이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blogspot.com 을 누르시면 보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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