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7월에게/고은영

와인 파는 인문학자의 인문 일기

벌써 7월이다. 목필균 시인의 <7월>이 생각난다. "한 해의 허리가 접힌 채/돌아선 반환점에/(…) 계절의 반도 접힌다//폭염 속으로 무성하게/피어난 잎새도 기울면/중년의 머리카락처럼/단풍 들겠지." 지난 반년을 되돌아 보고, 남은 반년을 어떻게 살까 고민해본다. 지난 해 7월 1일 <인문 일기>의 화두는 '대나무의 삶은 두꺼워지는 삶이 아니라, 단단해 지는 삶이다"였다. 대나무는 두꺼워지려면 옆 누군가의 공간을 빼앗아야 할지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듯하다. 그래 대나무는 나이테가 없다. 나이테가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 있다. 대나무는 단단하기 위해서 어쩌면 비움을 선택했는지 모른다. 위로 곧기 위해, 그리고 다른 이와 함께 하기 위해 단단함과 비움을 선택한 대나무를 본받고 싶은 아침이다.

대나무가 속을 비우는 데는 다 생각 있었던 것이다. 바로 제 몸을 단단하게 하기 위해 속을 비웠던 것이다. 우리의 삶도 대나무에게서 배워야 한다. 살만 찌우고, 더 많이 소유하면, 단단하지 못하다. 대나무는 자기 속을 비웠기 때문에, 어떠한 강풍에도 흔들리지 언정 쉬이 부러지지 않는다. 대나무처럼 산다는 것은 끊임 없이 쌓이는 먼지를 비우는 것일지 모른다. 대나무는 휘어지지만 꺾이지는 않는다.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유연성을 대처하는 태도이다.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이기는 것이다.

다시 한번, 지난 4월에 내 가슴에 깊게 새긴 다음의 세 문장을 소환한다.
(1) "역경을 이기긴 쉬워도 풍요를 이기긴 어렵다."
(2)  “자기가 가진 것을 사랑하면 행복하고, 못 가진 것을 사랑하면 불행하다.”
(3) "사람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과 가질 수 없는 것이 있다."

이 세 문장을 문학적으로 승화시킨 소설이 <그리스인 조르바>이다. 6년 전 오늘 아침에 이런 생각을 했었다. 다시 시작하는 7월 1일 아침에, 내 삶이 흔들리지 않도록 다시 정리해 본다. 벌써 일년의 반이 지나갔다는 아쉬움 보다는 아직도 반년이 남았다는 설레임으로 디테일 하게 적어 본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 “나는 아무 것도 두렵지 않다"를 다시 기억해 낸다. 나는 두렵지 않다. 최근에 이유 없는 어떤 불안이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데, 무엇 때문일까? 아마 욕심이 그렇게 만드는 것 같다. 더 내려놓고, 두려워하지 말고, 지금 그리고 여기서 현재를 웃으며 즐겁게 살자고 또 다짐한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조르바가 살던 삶에서 답을 찾는다.

(1) ‘지금 가진 것’과 ‘앞으로 가져야 할 것’을 구분하지 않는 삶을 산다. 지금 가진 것에 감사해 하며, 최대한 그것에 만족해 한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으로 살다가 죽으면 된다. 무엇이 두려운가? ‘앞으로 가져야 할 것’에 욕망하지 않는다. 지금 가지지 못한 것을 사랑하면 불행하다.

(2) 남이 가진 것과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비교하지 않는 삶을 산다. 비교하면 나를 주눅들게 한다. 나는 나이고, 나만 가지고 있는 것이 많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에 주눅들 필요 없다. 사람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과 가질 수 없는 것이 있다.

(3) 어떤 일을 할 때는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뒤에서 잡아 줄 끈을 끊어야 한다. “가진 걸 다 걸어 볼 생각은 않고 꼭 예비금을 남겨 두니까, 줄(끈)을 자를 수 없다. (...) 그 줄을 잘라야 인생을 제대로 보게 된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걸지 않으면 살 맛이 없다. 어떤 곳에서, 어떤 일을 하던 간에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거는 삶은 멋지다. 그러다 죽는 것이다. 죽을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 아닌가!

(4) “확대경으로 보면 물속에 벌레가 우글우글 하대요.. 자 갈증을 참을 거요. 아니면 확대경을 확 부숴버리고 물을 마시겠 소?” 조르바가 말한다. 너무 많이 따지고, 계산하면 아무 일도 못한다.

(5) 조르바는 육체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어떤 일이든 몸으로 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 다만 우리가 자신의 몸을 두려워한다. 죽으면 그만인데. 몸이 약하다고, 힘이 없다고 주저하지 말고, 육체에 대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많이 걷고 산에 가고 주말 농장에서 몸으로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처럼 서생들에게는. 체력을 잃으면 안 된다. 많이 걷고, 위생에 신경을 쓴다. 그리고 좀 덜 마시고, 덜 먹었으면 하는데 잘 안 된다. 조르바에게는 지금 이 순간 살아 움직이는 몸뚱이, 그 자체로 충분하다. 지금 여기서 하고 있는 그 일에만 집중한다. 무엇을 하던지 간에.

(6) 조르바의 우정은 서로를 향한 조건 없는 존중 속에 꽃을 피운다. 상대방을 ‘내가 아닌 모든 것'이라고 보고 대한다. 상대방을 존중하는 일이 최고의 우정이다. 다시 새겨본다.

(7) 조르바에게서 이것도 배웠다. 인간(특히 우리 시대의 인간)에게 부족한 것은 지성 아니 지식이 아니라 감성이고, 관념이나 정신이 아니라 육체이고, 경건함이 아니라 관능이다. 시스템(이성)의 통제에 길들여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폴론의 합리성이 아니라, 디오니소스의 광란이다. 가끔씩 디오니소스(박카스)를 모시고, 이성으로부터 해방감을 느껴보아야 한다. 조르바는 세상의 논리로 보면, ‘나쁜 남자’이다. 그러나 그의 위대함은 ‘선행 밖에 모르는 완전함’에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는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마음 깊은 곳의 선의(善意)에서 우러나온다.

(8) 조르바는 사람을, 그리고 예술과 자연을 사랑한다. 특히 사람을 사랑한다. 어느 누구나, 나와 같이,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두려워한다. 나도 그렇다. 사람은 다 똑같다. 그래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누구나 때가 되면 죽어 땅에 묻히고 구더기 밥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한 형제이다. 모두가 구더기 밥이 된다.

(9) 조르바는 모든 것을 마치 ‘태어나 처음'인 것처럼 느끼고 바라본다. 불교 식으로 말하면,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감동한다. 물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처럼, 우리도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면 훨씬 더 자유로워진다. 고요한 물처럼, 마음을 비우고 고요하게 하면, '세상이 다 돌아간다(반환)'는 이치를 깨닫는다. 잘 나간다고 좋아할 것 없다. 곧 내려가야 할 테니. 일이 잘 안된다고 걱정할 일 없다. 떨어지면 반드시 올라가는 것이 우주의 진리이니까. 문제는 이 진리, 즉 반대의 힘으로 끌려간다는, 어려운 말로 "반자도지동"은 심란하거나 정신없이 바쁘게 살면 그걸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10) 조르바는 광산 사업의 파국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춤을 춘다. 그 춤은 무게를 극복하려는 인간의 처절한 노력으로 비친다. 그리고 그 춤속에는 해방이 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판단한 순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 가가 시작되는 느낌의 해방을 엿볼 수 있다. 억압이나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해방이 아니다. 지나치게 믿고 기대하고 희망하는 마음으로부터 벗어남 이야말로 진정한 해방이다.

이렇게 열가지를 나열해 보니, 마음이 처분해진다. 좋은 7월의 시작이다. "만일 당신이 어떤 일에 스트레스를 받았다면, 그 아픔은 그 일 자체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당신의 생각에서 옵니다. 당신은 당장 그것을 무효화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언제나 깊은 명상에서 나온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말은 힘을 준다.

7월에게/고은영

계절의 속살거리는 신비로움
그것들은 거리에서 들판에서
혹은 바다에서 시골에서 도심에서
세상의 모든 사랑들을 깨우고 있다
어느 절정을 향해 치닫는 계절의 소명 앞에
그 미세한 숨결 앞에 눈물로 떨리는 영혼

바람, 공기, 그리고 사랑, 사랑
무형의 얼굴로 현존하는 그것들은
때때로 묵시적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
나는 그것들에게 안부를 묻는다

"안녕, 잘 있었니?"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인상적인 속보가 나왔다. 유튜브와 페이스북을 이용해 영상으로 출마선언을 했다는 것이다. '이재명다운' 방식이다. 쓸데없이 패거리를 이루어 세를 보이는 것보다 내가 꿈꾸는 세상을 조목조목 말하고, 그 원고를 내 보내는 것이었다.

"오늘의 대한민국 국민의 삶은 불공정과 양극화로 위기를 맞고 있다." "풀 수 없는 매듭은 자르고 길이 없는 광야에는 길을 내야 한다." “불평등과 양극화는 성장동력을 훼손하고 경기침체와 저성장을 부른다." “공정성 확보가 희망과 성장을 가능하게 한다,” “특권과 반칙에 기반한 강자의 욕망을 절제 시키고 약자의 삶을 보듬는 억강부약 정치로 모두 함께 잘 사는 대동 세상을 향해 가야 한다.” “규칙을 지켜도 손해가 없고 억울한 사람도 억울한 지역도 없는 나라, 기회는 공평하고 공정한 경쟁의 결과로 합당한 보상이 주어지는 사회여야 미래가 있다.” 희망한다.

인문운동가가 원하는 사회가 대동(大同) 사회이다.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대통령은 일상의 고통을 해결하는 디테일의 끝판 왕이자, 미래를 내다보고 준비하는 커다란 비전의 설계자여야 한다."(경향신문, 김민아) 잘 정리된 문장이다.

도나 개나 공정을 말한다. 잘 구분해야 한다. 이준석 식의 공정은 '능력'에 따른 공정이다. '시험(성적)'을 잣대로 삼는 공정이다. 능력을 시험하는 과정과 절차가 공정하면 사회,경제적 약자와 소수자도 정당한 기회를 누릴 수 있다는 주장이다. 좀 더 고민해야 할 내용이다. 국가 지도자는 열정을 갖고 강하게, 동시에 균형감각을 갖고 서서히 널빤지를 뚫어야 한다. 막스 베버의 말처럼 말이다. "정치란 열정과 균형감각 둘 다를 가지고 단단한 널빤지를 강하게 그리고 서서히 뚫는 작업이다."(<소명으로서의 정치>) 열정 하나만으로는 안 된다. 개개인의 삶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몇 일전부터 "자기 구원의 가이드 맵"을 그리고 있다. 지금까지 내가 생각 했던 유교는 관념적이고, 공자의 "극기복례(克己復禮)" 주장처럼, 어떤 기준이 있어 우리를 옥죄인다고 봤다. 그러나 이황의 <성학십도>를 꼼꼼하게 읽다 보니, 유학(儒學)은 감화(感化)의 철학이었다. 말로 하는 감화가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내가 '도(道)'를 지키면, 그 도는 자연스럽게 주변으로 확산된다는 말이다. 오늘 이 점에 대해 '자기 구원'의 지도를 더 그려본다.

<성학십도> 제2도 <서명>의 하도(下圖) 두 번째 문장이다.
違曰悖德, 害仁曰賊. 濟惡者不才, 其踐形惟肖者也. (위왈패덕, 해인왈적. 제악자부재, 기천형유초자야)
어길 위, 어그러질 패, 헤칠 해, 도둑 적, 건널 제, 재주 재, 밟을 천, 닮을 초

이 소명의 위배(違)를 '패덕(悖德)'이라 부르고(曰), 인(仁, 사랑)을 해치는(害) 것을 범죄(賊, 도둑질)라 일컫는다. 악(惡)을 저지르는(濟) 것(자)은 제 본성(才)의 일탈(不)이다. 오직(惟) 하늘을 달음(肖) 자(者)만이(也), 그 타고난 것(形)을 온전히 실현(踐)한다.

천천히 읽어 보면 기본중의 기본인 삶의 지도이다. 이 문장은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 욕심에 골몰하여 우주적 가족 공동체의 책임과 의무를 져버리지 말자는 말이다. 일종의 경고이다.
① 違曰悖德(위왈패덕): '우주적 가족 공동체의 소명', 의무와 책임을 저버리는 것을 패덕(悖德)이라 부른다는 말이다.
② 害仁曰賊(해인왈적): 공자와 맹자에게 인(仁)은 완전한 인간성을 의미한다. 仁은 우주적 가족 공동체의 사랑과 질서, 조화와 평화(仁義禮智)를 총체적으로 의미한다. 그리고 仁은 동시에 인간이 자기 수련(수양 修養)을 통해 지향해야할 최고의 이상적 경지이다. 그러니 인간은 타인과 사회만이 아니라 우주적 공동체의 책임을 어깨에 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책임을 방기하고, 그 우주적 공동체의 책임을 훼손하는 자는 도적, 즉 도둑이다.
③ 濟惡者不才(제악자부재): 악을 저지르는 것은 자신의 본성을 훼손하는 자이다. 여기서 재(才)는 타고난 자질을 의미한다.  인간은 우주 건곤(乾坤, 하늘과 땅)의 자식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우주적 자질과 능력을 공유하고 있고, 그것의 발휘를 통해 우주의 창조적 과정에 동참하여야 하는 존재이다. 이를 자각하지 못하고, 내키는 대로 나쁜 짓만 일삼는 자들은 자기 생명의 의미와 가치를 훼손하는 것이다.
④ 其踐形惟肖者也(기천형유초자야): 여기서 '천형(踐形)'은 맹자의 용어란다. 말 그대로 하면, "형체(形)를 구현한다(踐)"는 것이지만, 각자 부단한 노력을 통해 자신을 낳아준 우주의 자랑스런 아들임을 입증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리고 초자(肖者)란 아버지를 닮은 자란 말이다. 그 아버지가 크게는 우주이고, 작게는 부모이다. 우리가 '불초(不肖)'라고 말하는데, 이는 '아버지를 닮지 못한 못난 자식'이란 의미이다.

지난 글들은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을 누르시면 보실 수 있다.

#인문운동가_박한표 #우리마을대학_디지털_인문운동연구소 #사진하나_시하나 #고은영 #복합와인문화공방_뱅샾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