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죽편(竹編)1-여행/서정춘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하나

대나무의 삶은 두꺼워지는 삶이 아니라, 단단해 지는 삶이다.

오늘은 7월 1일이다. 옛 어른들은 "미끈유월(농사 일로 바빠 한 달이 미끄러지듯이 쉽게 지나간다)이 가고 어정칠월(칠월은 한가해 어정거린다)이 왔다"고 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 택한 시는 서정춘 시인의 <죽편1-여행>이라는 짧은 시이다. 5줄 37자이다. 지난 글들은 https://pakhanpyo.blogspot.com 을 누르시면 보실 수 있다.

오늘 아침 고유하는 시의 "칸칸마다 밤이 깊은/푸른 기차"는 우리들의 인생의 여정을 비유한 것이다. 그리고 시인은 "여기서부터,’라는 시귀에 쉼표를 찍어 반 박자 쉰 다음, 다시 하이픈을 그어 또 호흡을 조절하면서 "대 꽃이 피는 마을까지"가 얼마나 먼지를 절묘하게 표현했다. 그는 이 시를 4년 동안 80번 이상 고쳐 쓰는 퇴고를 거쳐 대나무의 수직 이미지와 기차의 수평 이미지, 시간과 공간, 인생과 여행의 의미를 짧게 응축했다. 읽으면 읽을수록 맛이 난다. 시를 공유한 다음, 대나무를 통한 사유를 전개해 보겠다.

오늘은 7월 1일이다. 목필균 시인의 <7월>이 생각난다. "한 해의 허리가 접힌 채/돌아선 반환점에/무리 지어 핀 개망초//(…) 계절의 반도 접힌다//폭염 속으로 무성하게/피어난 잎새도 기울면/중년의 머리카락처럼/단풍 들겠지"

오늘은 7월 1일이다. 내가 좋아하는 철학자 최진석 교수가 펼치기로 약속한 "책 읽고 건너가기"의 첫 책으로 스페인 작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선정했다. 인문운동가로 두 손 높이 들고, 힘차게 박수를 치며, 동참할 생각이다. 다시 이어지는 '생활 속 거리두기'로 의기소침해진 나에게, 『돈키호테』를 또 한 번 더 읽으며, "마법의 양탄자"에 올라 탈 생각이다.

프랑스에서 유학하던 시절, 어느 교수가 나에게 힘들면 『돈키호테』를 읽으라고 권했던 적이 있다. 그리고 작년에 문체부에서 지원해 준 <길 위의 인문학> 프로그램에서 동네 분들과 『돈키호테』를 함께 읽었다. 세르반테스가 자신의 소설 속에서 창조한 인물이기도 한 돈키호테는 400년이 흐른 지금도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친숙하게 화제에 오르는 인물이다. 돈키호테는 과대망상에 빠져 어이 없는 소동을 일삼는 충동적인 몽상가로 회자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꿈과 이상을 위해 행동을 아끼지 않는 불굴의 인간형으로 받아들여진다. 어쨌든 그는 우스꽝스럽기는 하지만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한번쯤은 그처럼 살아보고 싶게 만드는 인물이다.

최진석 교수의 <새말 새 몸짓>이 펼치는 "책 읽고 건너가기"의 첫 책인 7월의 책을 다시 과학동네 분들과 같이 읽자고 제안할 계획이다. 몇몇 분들과 온라인 또는 오프 라인으로 서로 독려하며 함께 읽을 생각이다. 그리고 7월 내내 틈나는 대로, 아침 글쓰기에서 돈키호테 이야기를 할 생각이다. 이젠 100년 인생을 푸른 대나무로 비유한 <죽편1-여행>을 읽을 차례이다.

죽편(竹編)1-여행/서정춘

여기서부터, 멀-다
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를 타고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 년이 걸린다

우리들의 100년 인생을 푸른 대나무에 비유하여 노래하고 있다. "푸른 기차"가 푸른 대나무이다. 대나무의 수명은 약 100년이므로 우리 인간의 최대 수명과 비슷하다. 대나무의 가지 한 마디 한 마디가 인생사의 한 고개이다. 10년, 20년, 30년, 10년 단위로 인생의 단계를 나누어 볼 수도 있다. 그리고 대꽃이 피면 대나무는 죽는다. 그러니까 "대꽃이 피는 마을"은 '피안의 마을', '열반의 마을'이다. 우리의 인생도 칸칸이 밤이 깊다. 한 고개 넘으면 또 언덕이고, 어두운 터널이고, 밤의 연속이다. 인생의 길은 아주 멀다. “피곤한 나그네에게 길이 멀듯이 어리석은 사람에게 인생의 길은 길고도 멀다"는 말이 <법구경>에 나온다.

오늘 아침 사유는, '그렇다면 이 100년의 인생을 어떻게 살까'하는 문제이다. 그러니까 '이 100년동안 나는 누구이고, 무엇을 알고,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 인생이 아닐까? 주어진 시간은 100년이다. 이 실타래같은 질문들을 푸는 만큼, 아마도 자기 인생이 될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이듯이, 그 실타래를 푼 양이 곧 내 삶의 양일 것이다. 그러니까 무엇을 느끼고 아는 만큼이 우리들의 인생의 영역이고 한계일 것이다. 사실 주변 사람들은 나에게 말한다. 인문학은 골치 아프다. 인문학을 몰라도 사는 데는 불편하지 않고, 지장 없다. 틀린 말은 아니다. 왜 아침마다 장문의 글을 쓰느냐? 내 딸은 지금은 적응했지만, 전에는 같이 산책하려 하지 안했다. 내가 너무 주변을 관찰하다는 이유이다. 왜 그랬냐 면, 나는 느끼고 아는 만큼이 내 삶의 크기라고 믿기 때문이다. 인문학이 어쩌고 저쩌고, 말하면서, 주변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그만한 삶의 크기로 살다가 "대꽃이 피는 마을"로 건너가는 것이다.

대꽃은 백 년 만에 핀다고 한다. 그리고 죽는다고 한다. 우리 인간들의 백 년 인생과 같다. 대나무는 사람이 청소년기에 성장하듯이 한때 우후죽순으로 자란다. 대나무는 4-5년 동안은 뿌리를 내리는 데 몰입하므로 이 기간에는 자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뿌리가 넓고 깊게 퍼져 나가고 있는데도, 뿌리가 다 자라면 하루 아침에 갑자기 자라기 시작한다. 그래 '우후죽순(雨後竹筍)'이란 말이 있다. 여기서 두 가지 사유가 이어진다.

하나는 대나무는 뿌리가 사방으로 퍼져 있어 웬만한 가뭄이나 비바람에는 전혀 문제 없다. 대나무는 우리에게 말한다. 더디게 자란다고 낙담하지 마라. 뿌리를 내리고 있는 중이니. 지금 우리들의 삶이 팍팍하고 고단한데, 우리들의 발검음이 더딘 것은 사회 체질을 바꾸고 뿌리를 깊이 내리는 중이기 때문이다. 위기이지만 오히려 이것이 기회가 될 수 있다.

또 하나는 다른 나무와 다르게, 대나무는 평생 자라지 않는다. 죽순이 솟아나면 그 종자를 알 수 있다. 잘 될 성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대나무도 왕대는 죽순이 처음부터 크고 굵다. 졸대는 처음 죽순이 가늘다. 우리 인간도 될 성싶은 아이는 어릴 때부터 싹수가 있고, 안될 성싶은 아이는 싹수가 노랗다고 하지 않는가?

말이 나온 김에 대나무 이야기를 좀 더 이어가 본다. 대나무는 다른 나무와 다른 특성이 마디마디가 있다. 마치 우리의 인생과 같다. 그리고 대나무의 삶은 두꺼워지는 삶이 아니라, 단단해 지는 삶이다. 대나무는 두꺼워지려면 옆 누군가의 공간을 빼앗아야 할지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듯하다. 그래 대나무는 나이테가 없다. 나이테가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 있다. 대나무는 단단하기 위해서 어쩌면 비움을 선택했는지 모른다. 위로 곧기 위해, 그리고 다른 이와 함께 하기 위해 단단함과 비움을 선택한 대나무를 본받고 싶은 아침이다.

대나무가 속을 비우는 데는 다 생각 있었던 것이다. 바로 제 몸을 단단하게 위해 속을 비웠던 것이다. 우리의 삶도 대나무에게서 배워야 한다. 살만 찌우고, 더 많이 소유하면, 단단하지 못하다. 대나무는 자기 속을 비웠기 때문에, 어떠한 강풍에도 흔들리지 언정 쉬이 부러지지 않는다. 대나무처럼, 산다는 것은 끊임 없이 쌓이는 먼지를 비우는 것일지 모른다.

대나무는 휘어지지만 꺾이지는 않는다.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유연성을 대처하는 태도이다.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이기는 것이다. 『도덕경』에서 말하는 물처럼 되는 것이다. 물은 동그란 그릇에 들어가면 동그렇게 되고 길쭉한 그릇에 들어가면 길쭉해 지고, 뜨거우면 김이 되어 날아가고, 차가워지면 얼음으로 굳고, 이렇게 어떤 환경,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물이 '물임'과 '물됨'을 잃는 일이 없어 그렇게 여러가지로 적응하는 것 그 자체가 물의 정체성이다.

올 2020년도 "푸른 기차"를 타고 어디가 내려야 할 종착역인지도 모르면서 급히 달려왔다. 벌써 한 해의 절반이 흘렀다. 다시 내 삶을 단단하게 다지는 아침이다. "푸른 기차를 타고/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비우고, 느리게 삶의 실타래를 풀며 걸어가는 것이다. 그 풀어 놓은 실타래가 내가 살아낸 '멋진' "죽편"같은 그림이 될 것이다.

#인문운동가_박한표 #우리마을대학_인문운동연구소 #사진하나_시하나 #서정춘 #복합와인문화공간_뱅샾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