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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비 오는 날의 전화/박경자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6월 30일)

"구차하다." 1년 전 오늘 아침에 구차(苟且)란 말을 공유했다. 구차하게 살지 말자. 이는 '떳떳하지 못하고 답답하고 좀스러운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버젓하지 않거나 번듯하지 않은 것이다. 원래는 구저(苟菹)라는 말에서 나온 거라 한다. 세월이 지나면서 저(菹, 채소 절임 저)의 자에서 '풀 초'가 빠지고 차(且, 버금 차)로 바뀐 것이라 한다. '구저'란 신발 바닥에 까는 지푸라기를 말하는 것으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게 되는 의인을 살리기 위해 천리 길을 가는 그의 신발이 닮아서 발에 피가 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너무나 애처로워 볏짚을 모아 그의 신발에 깔아주었다. 이 일을 보고 사람들은 모멸을 감수하고 적은 동정을 받는다 뜻으로 "구저 구저" 하다가, 세월이 흘러 '구차'가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당장 굶어 죽어도 구차하게 살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어제 오늘 네 페북에 '구차한' 분의 사진이 도배되었다. "있는 그대로 보여주라(Just be yourself)!"(질 바이든) 한 세상 당당하게 살아가 야지 구차하게 살지 말아야 한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없이 하루 하루를 살아야 한다. 오늘 아침 내 머리를 맴도는 것은 '그릇 론'이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신영복 교수는 자신의 책,  <<담론>>에서 “자신의 자리가 아닌 곳에 처하는 경우 십중팔구 불행하게 된다. 제 한 몸만 불행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불행에 빠트리고 일을 그르친다”고 하시면서, 우리들에게 자기 자신보다 조금 모자라는 자리, ‘70%의 자리’를 권한다. 어떤 사람의 능력이 100이라면 70 정도의 능력을 요구하는 자리에 앉아야 적당하다는 것이다. 나는 이 주장을 '그릇 론'이라 한다. “30 정도의 여유, 30 정도의 여백이 창조의 공간이 된다.” 반대로 70 정도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 100의 능력을 요구 받는 자리에 가면 어떻게 될까? “그 경우 부족한 30을 함량 미달의 불량품으로 채우거나 권위로 채우거나 거짓으로 채울 수밖에 없다. 결국 자기도 파괴되고 그 자리도 파탄 난다.” 또한 그는 이런 말도 했다. “자리와 관련해 특히 주의해야 하는 것은 권력의 자리에 앉아서 그 자리의 권능을 자기 개인의 능력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주역>>은 효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경우를 ‘득위’라 하고, 잘못된 자리에 가 있는 경우를 ‘실위’라고 한다. 득위는 아름답지만 실위는 위태롭다. <<주역>>의 핵심은 관계론이다. '길흉화복'의 근원은 잘못된 자리에서 비롯된다고 봤다. 내가 있는 '자리', 즉 '난 누구, 여긴 어디'를 묵상하며 알아야 하는 것이다. 단순히 어떤 '직위(職位)'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우주 속에서 나의 위치까지 확장되는 용어이다. 한문으로 하면 '위(位)'이다. <<주역>>에 따르면, 제자리를 찾는 것을 득위(得位), 그렇지 못한 것을 '실위(失位)'라 했다. 득위는 만사형통이지만, 실위는 만사 불행의 근원이다. 잘못된 자리는 본인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불행하게 한다.

그리고 '진정성'이란 말이 소환되었다. '진정성'이란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와 남들에게 하는 이야기가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도 같은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사기꾼은 신뢰를 연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나 신뢰를 연기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진정한 신뢰는 아니다. 진정성을 지니려면, 소크라테스가 말했던 것처럼, 자신의 존재 이유인 목적의 실로 과거, 현재, 미래를 연결해서 자신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구성하고 이 정체성을 기반으로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숙고하고 성찰하며 반성하는 사람이다.

진정성이 부족한 사람은 자신에 대한 돌봄 부족으로 어려운 고비를 만났을 때 일관성이 있는 자신을 지탱할 수 있는 근력이 없다. 어려운 상황을 만나면 좋은 시절 주장했던 철학과 목적은 사라지고 탐욕스런 생존을 위한 본성을 드러낸다. 그 부부는 진정성이 의심된다. 건들 건들, 도리 도리, 우왕 좌왕. 언젠가 <<정민의 世說新語>>에서 다음 문장을 읽은 적이 있다. "무심한 동작 하나에도 정신이 깃든다." 그리고 정민 교수는 최원오 신부가 번역한 성 암브로시우스의 <<성직자의 의무>> 몇 대목을 소개하였다. "동작과 몸짓과 걸음걸이에서도 염치를 차려야 합니다. 정신 상태는 몸의 자세에서 식별됩니다. 몸동작은 영혼의 소리입니다." "훌륭한 걸음걸이도 있으니, 거기에는 권위 있는 모습과 듬직한 무게가 있고 고요한 발자취가 있습니다. 악착같고 탐욕스러운 모습이 없어야 하고, 움직임이 순수하고 단순해야 합니다."

오늘은 일년의 반인 6월의 마지막 날이다. 내일이면 '미끈유월(농사 일로 바빠 한 달이 미끄러지듯이 쉽게 지나간다)'이 가고 '어정칠월(칠월은 한가해 어정거린다)'이 시작된다. 어제 저녁부터 비가 하염없이 내린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비가 그칠 줄 모른다. 장마인가? 비가 아침엔 더 줄기차게 내린다. 서윤규 시인의 <눈물>이 생각난다. "또 다시/내 몸 속을 흐르던 물이/역류하듯 밖으로 흘러 넘치는구나/올 장마엔/어느 저수지에 가둔/슬픔의 둑이 무너져 내린 것이냐." 그러나, 최욱 시인의 <장마>처럼, "일년에 한 번은/실컷 울어버려야 했다/흐르지 못해 곪은 것들을/흘려 보내야 했다/부질없이 붙잡고 있던 것들을/놓아버려야 했다//눅눅한 벽에서/혼자 삭아가던 못도/한 번쯤 옮겨 앉고 싶다는/생각에 젖고//꽃들은 조용히/꽃 잎을 떨구어야 할 시간//울어서 무엇이 될 수 없듯이/채워서 될 것 또한 없으리//우리는 모두/일년에 한 번씩은 실컷/울어버려야 한다."

비 오는 날이면, 난 '어중간 중장' 김래호작가의 이 문장이 기억난다. "‘볼열갈결’(사계절) 비는 그 철을 돕거나 재촉하는 촉매제 같은 것이다. 봄비에 만물이 잘 보이고, 열비에 튼실한 열매 열리고, 갈비에 나뭇잎 보내고, 졸 가리 훤한 나목에 결비 내린다." 장마를 '열비'로 읽으니, 난 슬프지 않다. 아침에 다소 무거운 주제였으니, 좀 가벼운 시 한 편을 공유한다.

비 오는 날의 전화/박경자

쏟아지는 빗소리가 제 소리마저 지우더니 적막이 억수같이 쏟아지더니 요란한 전화벨 소리 울리더니 여보세요 439-8696 맞습니까 예 그런데요 아 예 그라믄요 저 혹시 대구에서 살다 오신 분 맞습니꺼 예 그런데요 아 그럼 너 성식이 아이가 성식이 맞제? 예? 아니 아닌데요 아이라꼬? 내 다 안다 니 성식이 맞데이 아 아닙니다 저는 성식이가 아닙니다 어허 니 사람이 그라믄 못쓴다 니 분명 성식이 맞는데 왜 자꾸 아이라카노 여보세요 전화 잘못 하셨습니다 저는 성식이가 아닙니다 전화 이만 끊습니다 니 참말 너무 한데이 니 성식이 맞데이 내는 못 속인다 아이가 여보세요 저는 성식이가 아니고 김경호입니다 전화 끊습니다 아 잠깐 잠깐만 니 정말 성식이가 아이라 이기가? 예 아닙니다 그럼 좋데이 니가 성식이가 아이고 니가 김경호라 카는 거 뭘로 증명할끼고 예? 니가 김경호라 카는 걸 증명해 보이라 이기야 하며 전화 끊어지더니 제 소리 마저 지운 빗소리 적막이더니 '니가 너라 카는 걸 증명해 보이라 이기야' 소리만 온종일 들려 오더니

이 장마 비를 보고, 물처럼 살기로 다시 다짐한다. 물은 항상 낮은 곳으로 흐른다. 그리고 물은 결국 바다로 흘러간다. 바다가 바다인 이유는 세상의 모든 물을 다 받아주기 때문이다. 물은 '내려감'이 결국 '올러감'임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물은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끊임없이 자기를 낮추며 낮은 곳을 향하여  흘러가는 물에게서 우리는 겸손을 배우고 싶다. 상선약수, 물같이 사는 것이 잘 사는 길이다. 봄비, 장마비, 이슬과 서리 그리고 눈, 물의 순환으로 자연은 우리에게 말없이 가르친다.

1993년에 초묘(楚墓)에서 발견된 죽간(竹簡)에 나오는 <<태일생수(太一生水)>>라는 말이 생각난다. ""태일(太一)은 물을 생한다. 생(生)하여진 물은 생하는 태일(太一)을 오히려 돕는다. 그리하여 하늘을 이룬다. 하늘 또한 자기를 생한 태일(太一)을 오히려 돕는다. 그리하여 땅을 이룬다. 이 하늘과 땅이 다시 서로 도와서 신명(神明)을 이룬다. 신(神)과 명(明)이 다시 서로 도와서 음양을 이룬다. 음과 양이 다시 서로 도와서 네 계절을 이룬다. 이 네 계절(춘하추동, 春夏秋冬)이 다시 서로 도와서 차가움과 뜨거움(창열, 凔熱)을 이룬다. 차가움과 뜨거움이 다시 서로 도와서 습함과 건조함(습조, 溼燥)을 이룬다. 습함과 건조함이 다시 서로 도와서 한 해(세, 歲)를 이루고 이로써 우주의 발생이 종료된다."

태일(太一)은 도(道)이고, 도는 시간이고 세월이다. 오늘 아침 고민들은 시간이 해결해 준다. 너무 걱정하지 말자. 오늘 아침 사진은 어제 오후 걷기 운동을 하면서 찍은 하늘이다. 하늘이 늘 그렇지는 않다. 난 그걸 믿는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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