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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망초꽃/곽대근

와인 파는 인문학자의 인문 일기

"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에서 처럼, 자유로우려면 욕망의 재배치가 필요하다. 다음 문장이 짧지만 강력하게 필요한 문장이다. "쾌락과 물질을 행복으로 착각하지 말라."

우리들의 욕망은 대개 명사이다. 그 욕망에 어떤 형용사가 붙느냐 에 따라 지켜야 할 욕망과 버려야 할 욕망으로 나뉜다. 그 기준은 얻고자 하는 행위의 의도가 중요하다. 생명을 살리려는 욕망인가 아니면 생명을 죽이려는 욕망인가 그 기준이 중요하다. 내가 하려는 행위가 '왜'와 그 결과를 먼저 생각하면 그 기준의 답이 나온다. 옳지 않은 의도로 행위를 하면, 생명을 괴롭히고 죽이는 결과가 오고, 옳은 의도로 행위를 하면 생명을 기쁘게 하고 살리는 결과가 온다. 그래 인문정신은 한 마디로 '내가 당해서 싫은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다'로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고 해서 나의 선택이고, 자유라고 해서, 의미 없고, 가치 없는 것들에 몰두하는 삶의 방식은 옳지 않다. 불교에서는 그것을 "무기無記"라고 한다. 그것은 소중하고 엄숙한 자기생명을 무익하게 만드는 것이다. 생명은 살아 있는 유기체이다. 생명은 그 자체로 주체이다. 주체적인 생명은 남의 삶을 엿보거나 자기 삶을 헛되게 소비하지 않는다. 가치 있는 것, 의미 있는 것을 찾아 자기만의 느낌과 감동으로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생명이다.

"닮아 없어지는 것이 녹슬어 없어지는 것보다 낫다." 나는 요즘 눈코 뜰 사이 없이 하루를 보낸다. 아무 것도 안하고 빈둥거리며 녹스는 삶이 싫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인생을 마무리하고 죽음을 준비하는 활동을 '종활(終活)'이라 한다. 장례식을 미리 준비하거나 주변을 정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여기서 '생전 장례식이 이루어지곤 한다. 이와 비슷한 것 임사체험(臨死體驗)이 있다. 예를 들어 인생 말기에 맞는 죽음에 대비해 자신의 희망을 적어 두는 엔딩 노트를 쓰거나, 젊은 층에선 관에 들어가 보는 식으로 죽음을 간접적으로 체험해 보는 것이다. 인간은 죽음이 있기에 겸허할 수 있다. 그리고 살아 있는 동안 보다 알참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죽음의 무거움을 모르면 삶은 가벼워질 수밖에 없다. 세계일보 배연국 논설위원의 칼럼을 보고 얻어 온 생각이다.

다음은 지난 주에 읽은 <장자>이야기이다. <장자> 제5편 "덕충부(德充符, 덕의 가득함의 표시)" 초반에 물과 거울에 대한 이야기이다. "人莫鑑於流水(인막감어류수) 而鑑於止水(이감어지수) 唯止能止衆止(유지능지중지)" 사람은 흐르는 물에,  자신을 비쳐보지 않고 멈춰 있는 물에 바쳐본다. 이처럼 멈춰 있는 것만이 능히 다른 것을 멈추게 할 수 있다. 이를 오감남 교수는 이렇게 해석했다. "사람이 흐르는 물에 제 모습을 비춰 볼 수 없고, 고요한 물에서만 비쳐 볼 수 있다. 고요함만이 고요함을 찾는 뭇 사람의 발길을 멈추게 할 수 있다."

장자 생각은 마음이 '명경지수(明鏡止水, 맑은 거울과 고요한 물처럼 잡념과 허욕이 없는 깨끗한 마음)'와 같다면, 그런 사람은 남의 눈치나 칭찬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자기 실현만을 위해(爲己, 자기 자신이기 위해)', 차분하고 조용히 정진할 뿐이다. 그런 사람 주위에 사람이 모여드는 것은 이런 거울같이 맑은 마음에 자기들의 참모습을 비추어 보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우선 자신의 마음을 맑게 만들 일이다. 흐르거나, 탁한 물이 아니라 고요하고 맑은 물처럼 마음을 닦으라는 말이다.

그 다음 문단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鑑明則塵垢不止(감명즉진구부지) 止則不明也(지즉불명야) 久與賢人處(구여현인처) 則無過(즉무과)" 거울이 맑음은 먼지가 끼지 않았기 때문이고, 먼지가 끼면 흐려진다고 했네. 또한 어진이와 오래 사귀면 허물이 없어진다고도 했지. 그러니까 거울이 맑으면 먼지가 끼지 않고, 먼지가 끼면 정말로 맑은 거울이 아니다. 현인과 오래 지내면 잘못이 없어진다는 말이다. 거울이 맑으면 먼지가 끼지 않는 것처럼, 마음이 거울같이 맑으면 '나'라는 의식이 끼어 있을 곳이 없는 법이라는 말이다.

오늘 아침은 모처럼 동네 탄동천 산책을 길게 하였다. 금계국이 곳곳에 뽐내고 있고, 개망초 꽃이 지천이djT다. 개망초는 나라를 망하게 하는 풀이란 나쁜 이름이지만, 내가 어린 시절에는 꽃 모양 덕택에 '계란 꽃'이라고도 불렀다. 번식력이 대단하다. 이와 관련된 시를 한편 공유한다. 농부들이 그랬다지. '망할 놈의 개망초'라고, 뽑아도 뽑아도 돌아서면 돋아나고, 밑둥 바짝 잘라도 자고 나면 다시 돋는 풀. 북한에서는 순 우리말로 '돌잔꽃'이라 부른다고 한다. 꽃말은 이름과 다르다. 가까이 있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고 멀리 있는 사람은 가까이 다가오게 해준다.

망초꽃/곽대근

그대 기다리는 빈 들녘에 초록비 하얗게 내린다
쭉정이 몇 알 남은 들녘 모퉁이에도
그리움의 햇살 저만치 다가오고
가시지 않는 미련 속탄 몸부림친다

바람도 잠을 자던 이른 봄 서러운 눈물
다 토해내지 못하고 희망 없는 척박한 땅에 묻혀
하얀 웃음 그리워 했다.
내 빈자리 앙금남아 홀로 떠났지만

그리움은 죄가 아니라며
너그러운 속마음 보인 체 지천에 핀 망초꽃
한낮 뙤약볕 밀려올 땐 흔한 웃음 보이며
내면의 그늘 숨기려 한다.

오늘도 토요일에 있었던 인문학 강의, <인문학의 시대적 가치-왜 '인문학'인가?>에 못한 이야기를 좀 더 해본다.
객관적인 진리 속에서 정답을 찾는 자연과학적 사유와는 달리, 인문학적 사유는 주관성이 개입되어 정답이 없다. 대신 각자의 견해를 다 존중해 준다. 그러나 그 견해가 풍요로운지, 나름대로 정교한 논리와 증거를 가지고 있는지 따진다. 풍요롭고, 다양하며 정교한 논리가 있어야 내 삶을 주체적으로 독립적으로 주인공으로 살 수 있다. 그래 인문학적 사유가 중요하다. 그게 기본이다.

그런 인문학을 딱 잡아 말하면, 인문학은 우리들에게 '건너가기'를 부추긴다. 늘 행복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자주 변해야 한다. 내 방식으로 말하면, '건너가기'를 위해 늘 도전해야 한다. 지적인 상승과 확장은 아는 것을 바탕으로 하여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고 건너가려고 발버둥 치는 일에서 이루어진다.

<반야심경>의 핵심정신인 '바라밀'이 ‘건너 가기’를 뜻한다. '바라밀'이라는 말은 '파라미타'에서 온 것으로, 파라미타는 '파람(저 멀리)+이타(도달하다)'의 합성어이니, 저 멀리 로 건너 가기를 하는 것이 '6 바라밀'인 것이다. 바라밀의 뜻이 궁극, 즉 멀고 험하게 보이는 부처가 되는 길을 꿋꿋하게 걸어서 이른다는 것이니 말이다. 이런 이야기를 강의에서 할 시간이 없었다.

그래 오늘은 '6바라밀'에 대해 오래 전에 적어 두었던 내용을 소환해 다시 내 일상을 검토해 본다. 우리의 마음 안에 들어온 생각, 감정, 오감을 6바라밀로 성실하게 대면하고 처리하는 것이 불교에서는 '보살의 길'이라 한다. 중력의 법칙만큼, 6바라밀을 어기면 악이 되고, 지키면 선이 된다. 이는 카르마의 경영법이고, 선업을 쌓는 길이라 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내 삶의 '건너가기'이다. 유교에서 말하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도 마찬가지 같다. 한 마디로 하면, 우리의 마음의 법칙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이 우주의 모든 생명체가 살아가는 법칙이다.

나는  '거인욕, 존천리(去人欲, 存天理)'를 말하고 싶었다. '거인욕, 존천리'라는 말은 '인간의 욕심을 버리고, 하늘의 이치를 따르라'는 뜻이다. 에고의 욕심(호리피해, 好利避害)을 버리고, '참나'가 지니고 있는 양심(良心=인성人性), 아니면 다음과 같이 우주의 원리인 "6바라밀(세상을 건너는 일, 세상을 사는 일, 6 가지 인격의 기둥)"에 머물라는 것이다. 우리가 건너가야 할 수준을 다음과 6 가지로 말하고 있다.

▫ 보시 바라밀: 욕심을 버리는 것이다. 유교식으로 말하면, 인(仁)에서 나오는 측은지심(惻隱之心-남을 나와 다르게 보지 않고, 나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예컨대, 네가 갖고 싶은 것을 상대도 갖고 싶어한다는 것을 우리 양심으로 안다. 그러니 '자랑질' 하지 말라, 그것도 보시이다.

▫ 지계 바라밀: 계율을 지키는 것, 아니 유혹으로부터 좀 더 자유로워 지는 것이다. 유교식으로 말하면, 의(義)에서 나오는 수오지심(羞惡之心-내가 당해서 싫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뿌린 대로 거두리라"라는 마음이다.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는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논어』) 정신이다.

▫ 인욕 바라밀: 수용(受容), 즉 온갖 모욕에도 원한을 품지 않는 것, '욱'하거나 분노하지 않고 참아내는 것이다. 단 자명한 것 앞에서 참는다. '인욕'이란 무조건 참아내는 것이 아니라, 양심에 따라 진리를 인가(수용)하며 참아내는 것이다. 이 때 참아내게 하는 힘은 지혜에서 나온다. 자명한 상황을 받아들이며 참아내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욕심에 나오는 화는 참고, 양심에서 나오는 분노는 일으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진리를 인가, 수용하는 것이다. 자명을 인정하는 것이다. 지혜(양심=진리)에서 나오는 것을 참는 것이 인욕이다. 유교식으로 말하면, 예(禮)에서 나오는 사양지심(辭讓之心)이다. 타인을 배려하면서, 매너를 지킨다는 말이다.

▫ 정진 바라밀: 악을 제거하려고 치열하게 노력으로 나태하지 않는 것이다. 유교식으로 말하면, 신(信)에서 나오는 성실지심(誠實之心)이다. 성실하게 일상을 잘 살아내는 것이다.

▫ 선정 바라밀:마음을 응시하며, 심난한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다. 유교식으로 말하면, 경(敬)에서 나오는 몰입이다. 현재 하는 일을 제외하고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 것으로, "깨어 있으라"는 말이다.

▫ 반야=지혜 바라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미래에 대해 불안해 하지 않고, 자명한 것만 받아들이는 현명한 판단을 하는 것이다. 유교식으로 말하면, 지(智)에서 나오는 시비지심(是非之心)이다.

그러니까 이 6 가지 바라밀은 우리가 세상을 건너는 일, 세상을 사는 일이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는 일이다. 궁극에 이르는 것이다. 인문학의 결론이기도 하다. 사랑(나눔), 정의(절제), 예절(수용), 성실, 몰입, 지혜(통찰-'탁!'하면 아는 것). 이 6가지가 인문학의 핵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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