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충'이란 글자 그대로 ‘마음의 한 가운데’를 뜻한다.

2377.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3년 6월 6일)
오늘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충성한 사람들을 기리는 날인 현충일(顯忠日)이고, 절기 상 망종(芒種)이다. '망(芒)'자가 벼, 보리 같이 수염이 있는 까끄라기(가시랭이) 곡식의 씨앗을 말한다. 그러니까 망종은 그런 씨앗을 뿌리기 알맞은 때라는 뜻이다. 이 이야기는 내일 한다. 오늘은 현충일이다. 현충일(顯忠日)은 '충렬을 드러내는 날'이라는 뜻으로, 매년 6월 6일 민족과 국가의 수호 및 발전에 기여하고 애국애족한 열사들의 애국심과 국토 방위에 목숨을 바친 모든 이들의 충성을 기념하기 위한 국가 추념일이자 법정공휴일이다. 후술하겠지만 국가 기념일일 뿐 국경일이 절대 아니다. 6월이 호국 보훈의 달이라 불리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며, 6월의 꽃이라 불린다.
 
오늘은 중점적 '현충일'라는 말에 들어 있는 '충(忠)' 이야기를 한다. 난 한문으로 '忠'자를 좋아한다. 한 마음을 먹는 일이다. 충(忠)은 가운데를 뜻하는 중(中)과 마음을 뜻하는 심(心)이 결합된 글자다. '충'이란 글자 그대로 ‘마음의 한 가운데’를 뜻한다. 가장자리나 변두리에서 헤매지 않고 마음의 한가운데에 머물 때 정성을 다할 수 있고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마음을 먹으면, '환患', 걱정이 된다. 현충일(顯忠日)은 '충렬을 드러내는 날'이라는 뜻으로, 매년 6월 6일 민족과 국가의 수호 및 발전에 기여하고 애국애족한 열사들의 애국심과 국토 방위에 목숨을 바친 모든 이들의 충성을 기념하기 위한 국가 추념일이자 법정공휴일이다. 후술하겠지만 국가 기념일일 뿐 국경일이 절대 아니다. 6월이 호국 보훈의 달이라 불리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며, 6월의 꽃이라 불린다.
 
공자가 말하길, “삼아! 나의 도는 하나로 관철되어 있다”고 하니 증자가 말하길, “네!” 하였다. 공자가 나가자 문인이 묻기를, “무슨 말입니까?” 하자 증자가 “선생님의 도는 충(忠)과 서(恕)일뿐이다”라고 하였다.
 
이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논어>> <이인(里仁)>편 제15장에 나온다.
子曰(자왈): 參乎! 吾道 一以貫之(삼호! 오도 일이관지)」
曾子曰(증자왈): 唯(유)
子出(자출) 門人問曰(문인문왈): 何謂也(하위야」
曾子曰(증자왈): 夫子之道, 忠恕而已矣(부자지도, 충서이이의)
 
'충(忠)'이란 '정성스럽고 진실한 마음가짐'을 의미한다. '충(忠)'은 가운데를 뜻하는 '중(中)'과 마음을 뜻하는 '심(心)'이 결합된 글자다. 충'이란 글자 그대로 ‘마음의 한 가운데'를 뜻한다. 가장자리나 변두리에서 헤매지 않고 마음의 한가운데에 머물 때 정성을 다할 수 있고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이다. '서(恕)'는 같음을 뜻하는 '여(如)'와 마음을 뜻하는 '심(心)'이 결합된 글자다. 나의 마음이 타인의 마음과 같다는, 혹은 같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내가 마음의 중심을 잡을 때(忠), 타인의 마음 또한 충(忠)하다고 믿을 수 있다. 충(忠)하지 못하면 서(恕)하지 못한다. 마음이 가장자리에 머물러 중심을 잡지 못한 사람은 타인의 마음 또한 변두리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파악하여 각박하고 옹졸해 진다. 그래 진정한 용서는 인내와 억누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타인 또한 나처럼 마음의 가운데를 잃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긍정적 태도에서 나온다.
 
'서(恕)'란 단순한 용서가 아니라 나의 마음과 타인의 마음을 통하게 하는 공감(sympathy)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니까 '충서'란 곧 ‘정성과 공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충'을 '서(恕)'와 짝을 지어 말하지 않고 '성(誠)'과 짝을 지어 '충성(忠誠, loyalty)'이라고 말한다. '충성'은 '국가에 대한 무조건적인 헌신'을 뜻하는 의미로 변질되었다. 이것은 이데올로기적 왜곡이다. '충성'에서 '성(誠)'이란 본래 '충(忠)'의 의미를 강조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충성'이 곧 '충'이다. 원래 '충'이라는 것은 타인, 혹은 외부의 권위와는 무관하게 자기 자신을 향해 선언하는 인간학적 다짐이다. '충'은 오히려 국가적 권위나 외부의 명령에 흔들리지 않는 자기 중심적인 확고한 믿음을 강조한다. 국가가 올바르지 않은 방향으로 나갈 때 과감히 반대할 수 있는 용기가 진정한 '충'이다. 따라서 ‘누구에게, 혹은 무엇에게 충성한다'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충'이란 대상이 필요 없이 자기 홀로 실천하는 것이다. ‘충성한다'는 타동사가 아니라 자동사이다. 스스로 마음의 중심에서 벗어나지 않을 때 국가에 대한 헌신이 가능하고, 타인에 대한 정성도 가능하다. '충'의 결과를 '충' 자체와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본래 마음의 중심을 잃지 말고 타인의 마음도 자신의 마음처럼 대해야 한다는 실천 강령을 의미했던 '충서' 개념은 이후 주희(朱熹)에 의해 형이상학적으로 강화된다. 주희에 의하면, '충'은 단순히 실천지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 차원에서까지 보장받는 인간의 본성(性)이 된다. 증자가 ‘인간은 누구나 마음의 중심을 잡아야 한다’라고 윤리적 측면에서 '충'을 강조했다면, 주희는 ‘모든 인간이 마음의 중심을 잡는 것은 하늘에 의해 법칙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라고 '충'을 규정함으로써 존재론적 측면에서 강조했다.
 
'충(忠)'하지 못한 사람을 윤리적으로 지탄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주희는 그런 사람을 존재론적 층위에서 우주의 법칙에 벗어난 사람으로 간주하여 단호하게 배척해 버린다. 윤리적 비난에는 인간적 끈끈함이 개입될 여지가 있다. 그러나 존재론적 배척에는 그러한 여지가 원천 봉쇄된다. 단죄는 엄하되 실천에 옮기도록 하는 힘은 미약하다. 주희는 '충서'를 형이상학적으로 강조함으로써 지나치게 각박하게 해석하여 오히려 충서(忠恕)스럽지 못한 결과를 빚고 있다. 여기서 나온 개념이 우리 동네에 있는 '현충원(顯忠園)'이다.
 
최근에는 '충서'를 일이관지(一以貫之)의 일로 이해하여 일원론적 해석을 하는 이가 더 많다. '충서'를 하나로 보는 것이 굳이 도치법을 써서, '일(一)'을 강조한 본래의 취지에 부합할 뿐만 아니라, '충서'를 공자의 '도(道)'로 설명한 증자의 설명에도 들어 맞는다. '충서'란 '서' 개념에 충실한 것, 즉 '서'로 일이관지 하는 것을 말한다. '서'에 충실한 것이 공자의 '도'란 말이다. 여기서 충은 '하나의 개념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충실을 기한다'는 뜻이지 '서'와 구분되는 또 다른 원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논어>>의 <위령공>편 제23장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자공이 물었다. "子貢問曰(자공문왈) 有一言可以從身行之者乎(유일언가이종신행지자호) 子曰(자왈) 其恕乎(기서호) 己所不欲(기소불욕) 勿施於人(물시어인). "한마디 말로 평생토록 지키고 행할 수 있는 말이 있겠습니까? 공자께서 말했다. '바로 서(恕)일 것이다.' '서(恕)'란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 강요하지 말라'는 것이다.
 
공자 철학의 '일이관지'하는 핵심 원리는 '서'이다. 위에서 이미 말했던 것 처럼, '충', '속마음을 다하는 것(中心), '서'를 '같은 마음(如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여기서 '같은 마음'이란 '공감, 교감'을 뜻한다. 공자는 '서'의 뜻을 "己所不欲 勿施於人(기소불욕 물시어인)",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서양에서 말하는 '황금률(Golden Rule)'과 같은 의미이다.
 
많은 연구자들이 공자 철학의 도를 '인(仁)'으로 본다. 여기서 '인'은 '사람 사랑'이다. 그러면 '서'는 '인'의 실천을 만드는 근거가 된다. '서'가 공자의 '일이관지'하는 개념이라면, '인'은 실천원리이다. '서'와 '인'이 완전히 대칭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서'가 공감적 감정 작용으로써 아직 '인'이 아니며, 그냥 감정으로 끝날 수도 있고, 아니면 '수신(修身)'을 통해 '인'의 덕성으로 발전할 수 있다. 그러니까 '서'에 항상 '인'이 따라다니는 것은 아니고, '서'의 감정을 갈고 닦아 습관화한 덕성이 곧 '인'이다. 반면 '인'에는 '서'가 항상 따라다닌다. '인'을 행할 때는 '서'의 감정작용이 받쳐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공자의 '인'은 맹자에게 가면 더 적극적이 된다. 맹자의 '四端之心(사단지심)' 중에 하나인 '인'은 남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보다 더 힘들어 하는 것을 넘어, 남의 기쁨을 나의 기쁨보다 더 즐거워하는 공감능력과 그 공감능력이 함양되는 정도에 따라 한 두 사람이 아니라 천하를 포괄할 수도 있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남에게 해줄 수 있는 적극적인 형태의 '거룩한 인', 즉 숭고한 도덕원리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 아침 시는 현충일에 바치는 시이다. 그리고 아침 사진은 호국 영령들에게 바치는 하얀 접시꽃이다.
 
 
6월의 간절한 기도/권정아
 
초록의 성성함 같이 마음속에
충만한 사랑이 솟아올라
나라 위해 청춘 바친 호국 영령들에게
고개 숙여 기도하는 마음 되게 하시고
남은 가족 잘 있는지 살피게 하소서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망초꽃/곽대근  (2) 2023.06.07
밥/정진규  (0) 2023.06.07
화살나무/손택수  (1) 2023.06.06
6월의 간절한 기도/권정아  (1) 2023.06.06
김치찌개 평화론/곽재구  (1) 2023.0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