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밥/정진규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6월 7일)

어제는 24절기의 9번째인 망종(芒種)이었다. '망'자가 벼, 보리 같이 수염이 있는 까끄라기 곡식의 씨앗을 말한다. 그러니까 망종은 그런 씨앗을 뿌리기 알맞은 때라는 뜻이지만, '밥'을 생각하는 날이다. '밥'하니까, 정진규 시인의 <밥>이라는 시가 생각난다. 오늘은 먼저 시를 한편 읽는다.

밥/정진규

이런 말씀이 다른 나라에도 있을까

이젠 겨우 밥이나 좀 먹게 되었다는 말씀, 그 겸허, 실은 쓸쓸한 安分, 그 밥, 우리나란 아직도 밥이다 밥을 먹는 게 살아가는 일의 모두, 조금 슬프다 돌아가신 나의 어머니, 어머니께서도 길 떠난 나를 위해 돌아오지 않는 나를 위해 언제나 한 그릇 나의 밥을 나의 밥그릇을 채워 놓고 계셨다 기다리셨다 저승에서도 그렇게 하고 계실 것이다 우리나란 사랑도 밥이다 이토록 밥이다 하얀 쌀밥이면 더욱 좋다 나도 이젠 밥이나 좀 먹게 되었다 어머니 제삿날이면 하얀 쌀밥 한 그릇 지어 올린다 오늘은 나의 사랑하는 부처님과 예수님께 나의 밥을 나누어 드리고 싶다 부처님과 예수님이 겸상으로 밥을 드시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분들은 자주 밥알을 흘리실 것 같다 숟가락질이 젓가락질이 서투르실 것 같다 다 내어 주시고 그분들의 쌀독은 늘 비어 있을 터이니까 늘 시장하셨을 터이니까 밥을 드신 지가 한참 되셨을 터이니까

정진규 시인의 시는 마침표가 없다. 만물은 이어지고 또 이어지는 이음의 관계라 시인은 보았던 것 같다. 우리 말은 중요한 사물일 수록  한 음절이다. 밥, 물, 술, 피, 돈, 해, 달, 별, 땅, 흙, 눈, 귀 코, 입, 손 발, 꽃, 말, 밤, 낮, 잠, 길, 빛, 불, 똥 등 진짜 많다. 집, 알, 뼈, 몸도 생각난다. 오늘 시의 <밥>은 상황에 따라 구차스럽게 때워야 하는 한 끼니에서부터 성찬식처럼 거룩한 한 숟갈까지 있다. 어느 경우나 밥은 곧 생명이다. 밥에서 부처님과 예수님을 만난다. 내가 좋아하는 말이 '다 먹고 살자는 짓'이라는 거다. 밥이 하늘이다. 여전히 이 땅은 마른논에 물들어가는 것과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게 세상에서 가장 보기 좋은 풍경이다.

망종 이야기를 하다가, 여기까지 왔다. 망종은 모내기와 보리 베기에 알맞은 때이기도 하다. 보리는 망종 전에 베라는 말이 있는데, 망종까지는 보리를 모두 베어야 빈 논에 벼도 심고 밭갈이도 할 수 있었다. 또 이때는 사마귀나 반딧불이 나타나기 시작하며 매화가 익기 시작하는 때이다. 그리고 보릿고개란 말이 있었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망종까지 먹을 것이 없어서 많은 이들이 굶었다고 한다. 보릿고개를 못 넘어 죽을 지경이라는 기사가 실제로 있었다 한다. 그리고 보리는 소화가 잘 안 돼 보리 방귀라는 말도 있었다. 그러나 보리 방위를 연신 뀔 정도로 보리를 배불리 먹어보는 것이 소원이기도 했다. 오죽하면 방귀 길 나자 보리 양식 떨어진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은 먹을 게 너무 많아, 살과의 전쟁 중인 사람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밥은 삶의 모두이면서 요구이자 희망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다른 무엇보다 밥은 누구에게나 평등해야 한다. 그리고 밥은 함께 먹을 때 더 맛있다. 좋은 친구와 식사를 하며 사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삶의 행복 중 하나이다. "안 아플 때, 많이 먹는 거지. 실컷 먹어"하면서 말이다. 나는 '사랑은 식탁을 타고 온다'는 말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식탁은 단순히 배고픔을 채워주는 물리적인 공간이지만, 동시에 함께 밥 먹는 사람들의 사랑과 정을 나누고 교육이 이루어지는 공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쉽게 분노하고, 폭력이 난무하는 이유는 사랑과 유대가 넘쳐흐르는 식사 공간의 증발과 식탁에서 부모와 자식 간의 정서적 접촉 기회가 부족한 결과라고 본다.

근본적으로,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는다는 것은 친근함을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다. 맛있고, 보기 좋은 요리로 배를 채우다 보면 쌍방 간에 여유가 생길 뿐만 아니라, 서로에게 열려 있는 ‘틈’을 발견할 수 있어, 서로가 서로를 잘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우리말에 ‘한솥밥 친구'라는 말이 있다. 이를 영어로 말하면 ‘companion’이고, 프랑스어로 말하면 ‘compagne’이다. 이 말들의 어원을 분석해 보면, ‘동무, 동반자'란 뜻이지만 ‘같이 빵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에서 나온 말이다. 다시 말하면, 이것들은 모두 다 ‘함께 먹는 즐거움을 나누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 먹는 즐거움을 공유하는 것은 곧 삶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래 공동체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이야기를 지난 6월 5일 아침에 <인문 일기>에 다 하지 못했다.

이런 이야기이다. '욕망이 허상임을 알아차리고 그 너머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내면의 힘을 길러야 한다.' 어떻게 하여야 하나? 내면의 힘, 아니 내적 든든함을 키워 나가려면 고된 훈련이 필요하다. 보통 사람들은  '인간 답게 살려면 이 정도는 누려야 해' 하고 얘기하면 다 넘어가기 때문이다. 그럴 때 '나 그거 없어도 돼' 얘기하면 욕망의 힘이 빠진다. 나를 사로잡거나 장악하지 못하는 데 말이다. 이런 탈주를 위해서는 공동체가 필요하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동행을 구하라는 말을 우리는 다 안다. 김기석 목사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 본다.

"자본주의라는 게 빚을 권장하죠. 신용카드라는 게 그런 거잖아요. 빚을 져서 소비할 때는 행복해요. 그 다음부터는 갚기 위해 스스로를 착취하죠. 행복하기 위해 자기 착취의 길로 접어드는 거예요. 예를 들어 '내가 40대 남성인데 중형 세단 정도는 타 줘야지' 생각하며 그 굴레 속으로 빠져 들어가면, 그걸 누릴 수 없을 때 불행하다고 느끼게 돼요. 누리는 사람을 보면 선망의 마음이 생기거나 적대감이 생기고요. 그런데 그냥 '난 걷는 게 더 좋아' 이러고 나면 그 욕망이 날 사로잡지 못해요. 그냥 그렇게 사는 거예요. 세상 문화는 우리를 소비에 익숙하게 만들어 가요. 거기에서 탈주하는 연습을 해야 하는데 혼자서는 어려워요. 공동체가 필요한 이유죠." 함께 탈주할 수 있는 공동체가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가 내면화의 힘을 기르려면, 세상과 다른 사람들을 조심스럽게 사뭇 존중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대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럴 때 나오는 태도가 '겸손'이고, 그 겸손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경탄'이다. 거꾸로 얘기하면, 자본주의가 우리에게서 빼앗아가는 가장 중요한 능력이 경탄의 능력이다. 그런 측면에서 대자연에 나가보는 것이 중요하다. 도시에서는 겸허해지기 어렵다. 도시는 사람이 만들고 통제하는 물건들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우리 이전에 얼마나 큰 생명의 힘이 있었는지 도시에서는 잊어버리기 십상이다. 넬슨 만데라는 자신의 자서전에 이렇게 말했다. "(27년동안 갇혀 있었던) 감옥에 다녀온 뒤로는 원할 때 산책할 수 있는 일, 가게에 가는 일, 신문을 사는 일, 말하거나 침묵할 수 있는 일 등 어떤 작은 일도 고맙게 생각했다. 자신을 통제할 수 있다는 느낌을 주는 단순한 일이었다." 인생의 작은 기쁨에 경탄하는 일이 행복의 토대이다. 신선한 야채를 먹는 일, 자연의 아름다움을 음미하며 산책하는 일 등이다. 행복한 삶은 본질적으로 가까운 사람들과 풍요로운 관계를 맺고 기쁨과 사랑의 순간을 한껏 즐기길 때 유지된다. 그러니까 주변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 그리고 충실하고 풍요롭고 애정 어린 환경을 가꾸기 위해 정성을 들이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과 좋은 관계는 우리를 더 행복하고 건강하게 만든다. 가족, 친구, 공동체에 사회적으로 더 강하게 연결될수록 더 행복하다. 또한 경탄의 능력이 있으면 아무것도 함부로 대할 수 없다. 사람을 대하는 방식, 역사를 대하는 방식도 달라진다. 여기서 멈추고 이어지는 사유는 블로그로 옮긴다.

#인문운동가_박한표 #우리마을대학 #사진하나_시하나 #정진규 #복합와인문화공방_뱅샾62 #망종 #밥 #공동체_회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