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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쓸쓸/문정희

와인 파는 인문학자의 인문 일기

세월이 정말 잘 간다. 벌써 오월도 오늘과 내일 이틀 남았다. 허심(虛心)의 세계, 마음을 비우자고 늘 다짐하지만, 조급하다. 코로나-19는 계속 기승을 부리고, 원하는 일들이 잘 안 풀리고, 게다가 사람들을 마음대로 만나지 못하니 더 답답하다. 생각을 비우면 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겠는데, 마음이 허락하지 않는다. 오늘 아침에 "보정(補正)"이라는 말이 눈에 들어 왔다. 보정은 “부족한 부분을 보태어 바르게 하다”라는 뜻이다. 사람은 자신이 살아온 경험을 통해 가치를 판단하고 행동한다. 하지만 소위 꼰대가 되지 않으려면 지나온 세월을 보정할 필요가 있다.

오늘 아침은 내 마음을 알아주는 시를 먼저 공유한다. 이 시를 [먼. 산. 바. 라. 기.]님의 덧붙임이 위로를 해준다. 그리고 오전내내 답담하게 막혔던 컴퓨터 코딩을 이젠 이해하게 되었다. 문정희 시인이 '쓸'을 조형적으로 바라보는 눈이 흥미롭다. 위로는 산 두 개가 겹쳐 있고, 아래로는 구불구불 강물이 흐르는 형상을 하고 있는 글자다. 산과 강물만 있는 적막강산의 구도, 그래서 쓸쓸인가?  [먼. 산. 바. 라. 기.]님의 소개글을 공유한다. "인생의 반쪽만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런 때는 쓸쓸을 찾아 나서고 싶어 진다. 외로움과 쓸쓸함은 미묘한 어감 차이가 있다. 외로움이 물리적 고독이라면, 쓸쓸함에는 발효된 고독의 뉘앙스가 풍긴다. 외로움이라는 칼로 삶의 껍데기를 벗겨 내면 쓸쓸이 얼굴을 내민다. 모든 인생은 쓸쓸하다. 사랑 속에도 쓸쓸함이 숨어 있다. 설익은 감을 씹으면 처음에는 떫지만 자꾸 씹으면 단맛이 나듯이, 쓸쓸도 그럴 것 같다. 감히 쓸쓸함을 사랑하고 싶어 진다. 빛보다는 그늘에 들고 싶다. 거기에는 세상이 주지 못하는 미지의 선물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쓸쓸/문정희

요즘 내가 즐겨 입는 옷은 쓸쓸이네
아침에 일어나 이 옷을 입으면
소름처럼 전신을 에워싸는 삭풍의 감촉
더 깊어질 수 없을 만큼 처연한 겨울 빗소리
사방을 크게 둘러보아도 내 허리를 감싸주는 것은

오직 이것뿐이네
우적우적 혼자 밥을 먹을 때에도
식어버린 커피를 괜히 홀짝거릴 때에도
목구멍으로 오롯이 넘어가는 쓸쓸!
손 글씨로 써보네. 산이 두 개나 위로 겹쳐 있고
그 아래 구불구불 강물이 흐르는
단아한 적막강산의 구도
길을 걸으면 마른 가지 흔들리듯 다가드는
수많은 쓸쓸을 만나네
사람들의 옷깃에 검불처럼 얹혀 있는 쓸쓸을
손으로 살며시 떼어주기도 하네
지상에 밤이 오면 그에게 술 한 잔을 권할 때도 있네
이윽고 옷을 벗고 무념(無念)의 이불 속에
알몸을 넣으면
거기 기다렸다는 듯이
와락, 나를 끌어안는 뜨거운 쓸쓸


그런 의미에서 오늘 아침 다시 허심에 이르는 길을 소환한다. (1) 장자는 ‘피차’(彼此)라는 말 대신에 ‘피시’(彼是)라는 말을 사용했다. ‘시’(是)는 ‘이것'이라는 뜻과 함께 ‘옳다'는 의미도 있다. 즉 피시 속에는 이미 ‘나의 쪽'이 옳다는 판단이 들어 있다. 이는 ‘자아’ 문제와 뿌리 깊게 연관되어 있으며, 우리 인식의 기본적인 틀을 보여주는 것이다. 요컨대 누구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 거다. 그러나 이런 의식 자체는 비난 받을 일도 비난할 일도 아니다. 모두가 거의 그러니까. 따라서 ‘누구나 자신이 옳다'는 사실을 전제하면, 시비가 훨씬 더 줄고 평화로워질 가능성이 높다.

피차는 이쪽(차,此=이것)과 저쪽(피,彼=저것)인데, 이것과 저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각이나 입장에 따라 다르게 정해지면서 동시적으로 발생하는 사태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피차의 이분법적 의식을 걷어내는 일이다. 나의 경우를 보면, 시비가 벌어지며 갈등이 고조되는 상황에서는 성심(成心)을 사심(師心)으로 삼는다. 이미 정해진 마음으로 가르치려 든다. 따라서 시비를 없애려면 허심으로 상대해야 한다. 장자는 ‘어리석은 자는 성심을 스승으로 삼는다. 성심이 없는데도 시비가 붙었다는 것은 오늘 월나라로 간 자가 어제 도착했다는 것과 같다"고 했다. 이는 없는 것을 있다고 여긴 것과 마찬가지이다. 장자에 따르면,  이것과 저것, 옳음과 그름만이 동시적인 사태로 생기하는 것이 아니다. 생과 사, 가와 불가처럼 짝을 짓는 것은 모두 그렇다는 것이다. 장자는 ‘바야흐로 생이 있으니 바야흐로 죽음이 있고, 바야흐로 죽음이 있으니 바야흐로 삶이 있다’고 했다.  마음 편하게 먹고, 즐겁게 순간을 보내고, 희망을 갖자.

(2) 우리가 ‘나’만 ‘자신이 옳다’는 의식을 갖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그렇다. 그렇다면 누가 옳은가. 아무도 옳지 않다. 그러면 누가 그른가. 아무도 그르지 않다는 것. 각기 각자의 방식으로 옳은 것이다. 장자는 이것을 ‘각자의 옳음에서 비롯하여 각기(各其, 저마다의 사람)의 근거로 시비하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그렇다면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하는 인식의 기초인 ‘우리의 앎’은 과연 신뢰할만한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지각과 지성은 부분성과 편파성으로 인해 사물의 전체를 한꺼번에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것은 볼 수 없고, 들리지 않는 것은 들을 수 없다. 그러나 볼 수 없거나 들을 수 없다고 존재하지 않거나 변화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를 볼 때에 그 사람의 이마와 뒤통수를 동시에 볼 수 없고, 숲과 나무를 동시에 볼 수 없다. 우리의 감성과 지성은 태생적으로 편파적이고 부분적이다. 한계가 있다. 서 있는 건물을 보면서 동시에 무너지는 건물을 볼 수 없다. 양면을 모두 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서로 의지해 있고, 이웃해 있다. 밤과 낮은 연속되어 있으나 동시에 볼 수 없다. 이처럼 제한적인 지식에 근거하여 시비가 발생하는데, 장자는 이를 원숭이들의 조삼모사(朝三暮四)에 비유한다. 때문에 모든 시비와 갈등의 고조는 ‘자신만이 옳다’고 여기는 생각에서 발생한다. 그렇다고 장자는 시비를 중단하라거나 소멸시키라고 하지 않고, 화(和)하라고 한다. 단(斷)도 멸(滅)도 아니고, 시비의 긍정도 부정도 아닌 화를 주장한다. '화하라'는 것은 시비를 잠재워버리거나 잘라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서로 ‘자기 앎'에 기초한 시비의 근거가 서로 허구적인 것임을 깨달어서 스스로 풀어지도록(해소되도록)하라는 것이다. 그 말을 줄여서 ‘화시비’(和是非')라 한다. 시비하지만 시비가 없는 것이고, 시비가 없으면서도 각자의 시비가 모두 인정되는 것, 즉 양행(兩行)이다.

이런 '화시비'를 위해서는 자아의 판단을 최소화하고, 자연의 조화에 맡겨 분별지를 쉬게 해야 하는데 이것이 자연의 균형에 맡기는 것, 즉 ‘휴천균(休天鈞)'이다. '천균'은 자연 상태에서 유지되는 균형감각을 지닌 조화로운 마음이다. '천균에 머문다'는 것은 옳다 그르다는 지식의 작용을 그치고, 저절로 그러한 자연의 경지에서 마음을 쉬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시비는 사라지고 마음은 지극히 조화를 얻게 된다.  비슷한 말이 '양행'이다. 대립되는 두 가지 입장을 모두 바라보고 두 입장을 모두 인정하고 수용하는 태도를 말한다.  양쪽을 모두 수용하는 전체적 사고라 할 수 있다. 둘 다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마음이다.

(3) 허심(虛心)에 세 번째 길은 ‘도추(道樞)에 서서 조지어천(照之於天)하라’는 것이다. 생사, 가와 불가, 시비는 모두 상대를 전제해야 성립할 수 있는 관계의 네트워크인데, 결국 상대하여 발생하는 것은 연관에 의하여 성립하는 것이고, 이 연관 역시 고정적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자는 피차와 시비의 이분법적 대립의 근거를 해체한 도추(道樞)에 서서 '조지어천하라'고 권한다.

여기서 도추는 문을 여닫는 ‘지도리'이다. 지도리는 열림과 닫힘에 모두 다 관계 하나 어느 하나 만을 옹호하지 않는다. 열림과 닫힘의 근원이면서도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는다.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나 모든 움직임을 그 안에 담고 있으면서 여 닫히는 문의 움직임에 제한 없이 반응하나 열림이나 닫힘에 매이지 않는다.  도추는 텅 비어 있으면서 모든 것에 응하는 허심의 은유이다. 도추에 서면 시비를 가르는 기준점이 해소되기 때문에 개별자의 무궁한 시비에 자유롭게 응할 수 있다. 시비에 대한 ‘자아’의 편중이 없기 때문에 상황에 따른 시비를 ‘부득이’라는 상황의 원리에 따라 판단할 수 있다. 즉 시비하려는 마음이 없이 ‘시비의 근거가 없는 시비’를 천균에 따라 정할 수 있다. 이것과 저것도 동시적이고, 시비 역시 동시적으로 이 둘 모두를 상관적으로 포용하면서 보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이것과 저것, 가와 불가, 생과 사를 함께 보아야 한다. 이것이 도추의 관점이고, 조지어천이며, 밝게 비추는 허심이다.

이 세 가지 길을 다시 소환하고, 마음을 고요하게 했더니 "쓸쓸"이 좀 물러나는 오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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