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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성령을 받아라."

2370.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3년 5월 29일)
히브리어로 인간을 말하는 '아담(adam)'이라는 말은 '붉은 흙(테라 로사, terra rosa)'이라는 의미이다. 이 '테라 로사'는 우리에게 최고의 곡식과 와인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최상의 흙이다. 그런 '나'는 잠시 생명을 부여 받아 들숨-멈춤-날숨을 반복하는 살아가는 인간이다. 다르게 말하면, 나는 흙으로부터 와서 잠시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이다. 지금까지 지내온 세월을 되돌아 보면, 나에게 남은 시간도 순간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간은 오래전부터 이 순간을 영원으로 만들기 위해 문화와 문명을 구축하였다. 오늘 아침 사진도, 내가 틈나는 대로 맨발 걷기를 하는, 황토길이다. 붉은 흙, 테라 로사이다. 거기서 나를 만난다.
 
그런 나는 누구인가? "인간의 육체와 정신은 내가 소유한 자동차와 같다"고 배철현 교수는 멋지게 설명한 적이 있다. 나는 자동차를 타고 이동한다. 자동차가 나를 운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동차 시동을 걸어, 목적지로 향하도록 운전하는 사람은 나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나를 증명하는 서류가 아니다. 나는 '나'일 수밖에 없다. 나는 내가 되어야 한다. 우리 대부분은 자동차인 줄 아는 내가, 운전자인줄 모르고 인생을 살아간다. 우리의 교육의 목적은 남들 보기에 경쟁력이 있고 이윤을 많이 남기는 자동차를 만들기이다. 우리의 교육이 최고의 운전자를 만드는 데 소홀하다면, 그 자동차는 고물이다. 그러니 우리는 자동차가 아니라, 운전자이어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존재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만의 영적인 도구를 가지고 태어났다. 히브리어는 인간을 말하는 아담 말고, 네페쉬(nepesh)라는 말로 '특별한' 인간을 표시하였다. 신이 진흙으로 만든 인간의 코에 숨을 불어 넣으니, 인간(아담)이 살아 있는 영적인 존재(네페쉬)가 되었다고 히브리 시인은 노래한다. 인간은 매 순간이 생동하는 영적인 존재이다. 인간은 단순히 육체적인 존재인 아담이 아니라, 매순간 살아 움직이는 네페쉬이다. 네페쉬는 우리가 가진 언어의 구분을 초월하는 단어로 "존재, 영혼, 생명'이란 의미이다.
 
더 정확하게 ‘생명체’란 히브리어 표현은 ‘네페쉬 하야(nepesh hayyah)'이다. ‘네페쉬’란 단어는 영어나 한국어로 번역하기 힘든 단어다. ‘네페쉬’는 생명체로서의 인간을 구성하는 신체, 정신, 그리고 영혼을 총체적으로 이르는 용어다. ‘하야’는 ‘살아 움직이는’이란 뜻이다. 이 글을 쓴 유대인 저자는 인간이 살아 숨 쉬고 사고하고 행동하는 주체로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숨’이라 간파하였다. 숨은 생명을 유지하는 실질적이면서도 총체적인 힘이다. 의식적인 숨쉬기는 자신이 지금 살아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첩경이다. 요가수련에서 호흡에 관한 이해는 근본이다. 의식적이며 훈련된 호흡은 요가수련자의 온 몸을 열어, 호흡을 통해 전달되는 생명의 에너지를 신체 구석구석으로 전달한다. 의식적인 호흡은 수련의 몸의 균형을 잡아 척추를 곧게 세운다.
 
오늘 아침, 좌정하여, 내 코를 통해 드나드는 숨을 가만히 본다. 보이지 않고 느낄 수 없는 공기가 내 코를 통해 몸 안으로 들어와 오장육부를 살아있게 만든다. 날숨은 나의 구태의연한 잡념을 제거하는 행위이며, 들숨은 새로운 생각으로 오늘을 시작하겠다는 결심이다. 오늘은 내 앞에서 어떻게 펼쳐질 것인가? 나를 한순간도 버리지 않는 들숨과 날숨에 감사드린다.
 
숨에 관한 흥미로운 시 하나를 공유한다. 시골 약국에 노인 손님이 찾아와 약사에게 말한다. "숨쉬기가 힘드오." 약사가 말한다. "게으름 피우지 말고 부지런히 쉬면 되지 무슨 엄살이오." 약사와 손님은 오랜 구면같다. 위아래 집에 사는지도 모른다. 사실 손님은 꼭 약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마음의 폭폭증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같다. 약사는 그 내력을 안다. 그래서 손님의 이야기를 다 받아 주는 것이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다 받아 주는 것. 그보다 더 좋은 약이 있을 것인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때, 소중한 줄 모를 때라고 숨쉬기 힘든 손님은 이야기한다
 
 
젤로 좋은 때는, 숨/김청미
 
게으름 피지 말고 부지런히 내쉬면 되지라
그것이 뭣이 어렵다고 그라고 엄살이오
워메 이 양반이 어째 말을 이라고 험하게 해부까
나라고 그리 안 해봤겄소
그것이 암상토 안 할 때는 식은 죽 먹기보다 쉽지라
가슴이 쑤시고 씀벅거림서부터 요상시럽게 안 되야
시상사가 다 그렇지만
소중헌 줄 모를 때가 질로 좋은 때여라
그때 챙기고 생각허고 애껴줘야 해
한번 상하면 돌리기가 만만치 않다는 걸
넘치고 썽썽할 땐 모다 모른단 말이오
요로케 되고 본께
숨 한번 지대로 쉬는 것이
시상에 질로 가볍고 무거운 것이여
 
 
어제는 성령강림 대축일이었다. 복음 말씀이 요한 복음 20장 19절-25절이 었다. 그중 21-23장은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남아 있을 것이다"라 말한다. "성령을 받아라." 그렇게 우리는 '숨'을 얻었다. 그것은 동시에 우리들의 '사명(使命)'이기도 하다.
 
인도경전 <<우파니사드>>도 우리가 누구인지 아는 기쁨은 이 세상의 모든 육체적인 그리고 정신적인 쾌락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하였다. "당신은 당신의 깊은, 그리고 당신을 인도하는 열망입니다. 당신의 열망이 있는 곳에, 당신의 의지가 있습니다. 당신의 의지가 있는 곳에 당신의 행위가 있습니다. 당신의 행위가 있는 곳에, 당신의 운명이 존재합니다." <<우파니사드, 브리하다린야가, IV 4,5)>>
 
'열망→의지→행위→운명', 이런 순서이다. 인간의 심연에 존재하는 열망, 그것이 인간이고 사명이다. 그 열망을 잃는 순간, 인간은 그냥 흙이며 곡식의 껍데기 일 뿐이다. 인간은 그 사람의 생각이다. 건강은 내가 내 육체에 투입하는 생각의 양이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인간으로 우리 자신에게 바라고 훈련하는 열망 만큼의 결과이다. 우리는 자신을 멋진 집으로 착각한다. 훌륭한 거주지가 없는 집엔 거미줄만 가득하다.
 
인간은 자신에게만 유일하고, 그러기 때문에 위대한 인생의 과업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이다. 보통 우리는 스스로 두려움과 불안으로 혹은 가족적이며 사회적인 제약과 책임으로, 자신의 열망(熱望), 아니 사명을 찾지 않으며, 그 결과 자신을 가장 자신 답게 만드는 잠재력을 실현시키지 못한다. 그게 어쩌면 '네페쉬', 즉 성령이 아닐까?
 
쇼펜하우어는 그 '네페쉬'를 찾지 못하도록 우리를 방해하는 내적인 그리고 외적인 장애물을 극복하길 촉구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장점과 단점을 완벽하게 이해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소유하지 않은 힘을 발휘하려고 시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위조 동전을 가지고 놀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남을 흉내 내는 거울 놀이는 결국 목적을 달성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아닌 것을 자신인양 시도하는 것처럼 인생에 있어서 왜곡되고 사악한 것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장점을 흉내를 내는 것처럼 개탄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맞지도 않고 어울리지도 않는 다른 사람의 옷을 입는 것보다 더 우스꽝스럽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쓸데없음을 온 천하에 선포하는 것입니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잠재력을 이끌어 내는 인간이 '현대'라는 새로운 세계를 열 것이라고 말하였다.
 
자신이 열망하는 모습을 상상하여 일상에서 매순간 구현을 시도하는 사람은, 이미 자신이 원하는 인간이 된 것이다. 열망하는 자신의 모습은, 숙고를 통해, 그런 모습을 매일 새롭게 상정하고, 그것을 위해 진심으로 노력할 때,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런 자신을 이루었다고 자만하는 순간, 사라지는 신기루이기도 하다. 신기루는 잡힐 수 없고, 잡히지 말아야 한다. 여기서 열망이란 자신이 열렬히 바라는 희망이란 말이다. 우리가 바라는 이상적인 자신의 모습이다. 동양 철학에서 말하는 군자(君子), 성인(聖人), 선비일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내가 열망하는 그것일 수밖에 없다. 그래야 인생이 살맛 난다. 내게 그런 열망이 없다면, 나는 바람에 나부끼는 겨와 같다. 약간의 바람에도 날라가 버리는 알맹이가 없는 껍데기가 된다. 열망은 그 겨가 둘러싸고 있었던 낱알이다. 나는 내가 되고 있는 그것을 위해, 지금 여기서 그것을 향하고 조금씩 전진한다. 나는 그것이 되어 가고 있는 과정(過程)이다.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이 우주 창조 이야기를 풀어낸 <<티마이오스>>에서 우주 구성 과정을 설명하였다. 이상적인 목적을 ‘존재(存在, being)로, 그리고 그것이 되는 과정을 ‘생성(生成, becoming)'으로 구분하였다. 그리고 이 생성이 이루어지는 삼라만상을 모두 담을 수 있는, 관용적인 이 광대한 공간을 ‘수용체’라는 용어를 빌어 설명하였다. 그 무엇이 되어가는 현상을 포용하기 때문에, 말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신비다. 그는 이 신비한 공간을 고대 그리스어로 ‘코라(chora)라고 불렀다. 코라는 질서와 무질서가 대결하고 화합하는 장소이자 시간이다. 내게 오늘은 코라이다.
 
오늘, '코라'는, 내가 열망하는 것을, 나의 ‘재능’으로 만드는 공작실이다. 인간 각자에겐 자신만의 재능이 마음속에 존재한다. 어떤 이는 그 재능을 발견하여 자신의 삶을 유유자적(悠悠自適)하고 자족하며 산다. 재능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은, 남의 재능을 부러워하거나 시기하다가 인생을 망치고 마친다. 재능은 사적이며 독창적이고 다를 수밖에 없다. 만일 재능이 내 친구나 경쟁자의 재능과 유사하면, 그것은 거짓이다. 우리가 각자 지닌 재능은 인간 존재의 핵심이다. 유대교는 이 존재를 ‘신의 형상(imago dei)'라고 불렀고, 그리스도교는 이것을 ‘거룩한 영혼’, '성령'이라고 명명했다. 그것을 발견하는 사건이 깨달음이다.
 
그 깨달음은 묵상(默想)으로 시작된다. 묵상이란 자신 안에 숨겨진 신적인 불꽃, 즉 ‘재능’을 발견하기 위한 응시(凝視)다. 응시는 자기 절제이며, 내 자신을 이해하고 존중하기 위한 연습이다. 응시는 내 삶을 장악하는 나의 동기, 편견, 행동거지를 나의 이상과 견주어 보고, 그것들을 침착하고 냉정하며 공평한 눈으로 보고자 하는 분투(奮鬪)이다. 정신적이며 영적인 평정심을 발휘하지 않는 하루는 시냇가에 떠내려가는 부초와 같다. 따라서 자신 안에 숨겨진 신적인 불꽃을 발견하기 위한 응시는 나를 내 삶을 지배하는 지혜로운 왕으로 만들어 주기도 하고, 내 삶을 지옥으로 독재가가 되기도 한다. 매일 <배철현의 묵상>을 읽고 내 생각으로 정리한 내용이다. 여러 번 읽을 필요가 있다. 번잡하지 않은 시간과 장소에서, 즉 고독한 상태에서 여러 번 읽어야 한다. 그게 기본이다. 이 기본을 알면 나머지 모든 일들은 가능해진다.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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