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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위험한 사상이란 없다. 사유하지 않는 것 자체가 위험한 것이다.

1년 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12월 12일)

<<주역>>의 제7괘인 <천수 사(師)>괘 "상육"의 <소상전>에 "소인물용(小人勿用)"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은 정치의 핵심적 지혜를 가르치고 있다. 정권을 잡아도, 그 정권의 가치는 그 정권의 생명력을 연장시킬 수 있는 인재들의 등용에 있는 것이다. 자리를 함부로 남발하는 정권은 단명할 뿐만 아니라 민중에 피해만 입힌다. 대인과 소인을 가려 쓸 줄 아는 지혜가 정치의 핵심인 것이다. 파당을 만들면 진보는 없다. 공자가 말한 "군자주이불비(君子周而不比), 소인비이불주(小人比而不周)"가 소환된다. '군자는 친하게 지내되 결탁하지 않고, 소인은 사리사욕을 위하여 결탁한다"는 말이다. 두루두루 남들과 친하면서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자기 라인을 만들지 않는 사람이 군자이다. 군자는 두루 어울리면서 편파적인 패거리를 찾지 않는다. 군자라고 불리는 시선이 높은 사람은 근본을 지켜서 널리 통하기 때문에 태도는 넓고 매우 공적이다. 그러나 사유의 수준이 낮은 소인은 기능적으로 같은 주장을 공유하는 자들끼리 뭉쳐서 패거리에 자신을 가둔다. 패거리는 공적이기 보다는 사적이다.

이 <천수 사>괘에서 '저항'을 읽는 이가 있다. <<시로 읽는 주역>>의 저자 김재형이다. 이 괘는 땅 아래로 흐르는 물의 모습을 상징으로 가지고 있다. 땅 아래로 흐르는 물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내면에는 강한 움직임을 가지고 있다. 땅은 민중의 삶을 상징하고, 물은 민중의 마음을 집단적인 힘으로 조직하여 일으키는 저항운동이라는 거다. 드러나지 않다가 거대한 물결처럼 일어나는 저항 말이다. <사괘>의 저항 지도자는 이러한 거대한 물결의 흐름을 잡는 사람이다("君子容民畜衆, 군자용민휵중)". 그는 이 흐름을 일으키고 방향을 잡기 위해 민중과 함께 호흡하고, 조직한다. 인문적 성찰 능력을 가지고, 시대를 읽고 기다리지만 결정적 순간이 오면 자기를 내려놓는 용기와 전략을 동시에 가진 사람이다. 이 괘에서 이런 사람을 노련한 지도자라는 의미에서 "장인(丈人)"이라고 불렀다. 권력에 대한 폭력적 저항인 무장 투쟁은 매우 위험하다. 그래 결과를 예측하기가 쉽지 않다. 이 괘에는 다양한 변수 앞에 서야 하는 저항 지도자의 고뇌를 말해 준다.

다음은 한나 아렌트가 한 말이다. "위험한 사상이란 없다. 사유하지 않는 것 자체가 위험한 것이다." "다른 사람의 처지를생각할 줄 모르는 생각의 무능은 말하기의 무능을 낳고,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 왜냐하면 현대의 다양한 인문학적 담론들은 비판적 사유와 저항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악은 악마가 저지르는 게 아니다. 악이 저질러졌으니 그것을 행한 자에게 악마의 낙인이 찍힐 뿐이다. 독일계 유대인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나치 친위대 대령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보고 유대인 학살을 아무 양심의 가책 없이 저지른 측면에 주목했다. 그가 보기에 아이히만은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다. 매우 성실하고 근면한 공직자였다. 서류 정리는 늘 깔끔했고 일찍 출근해 가장 늦게 퇴근했다. 그가 처리한 서류를 통해 약 400만명의 유대인이 학살됐지만 그에게 그것은 상부의 지시에 따라 업무를 충실히 이행한 것일 뿐이었다. 동기도 신념도 악의도 없었다.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말한 ‘악의 평범성’이다.

'악의 평범성' 개념의 핵심은 '남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기'이다.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아이리만에서 보이는 악의 참모습이다. 아렌트는 '악은 평범하다. 거대한 악의 뿌리에는 타인의 고통을 상상하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게으름과 멍청함이 있을 뿐이다" 라고 말했다. 사유하라. 위험은 무사유에서 나온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사는 대로 살면, 우리는 일상에서 만나는 사건이나 사람에 대해 판단도 인식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판적 사고가 없는 삶은 잘못된 사고보다 위험하다는 게 아렌트의 주장이다. '악의 평범성'은 국가나 종교, 진영, 조직 등의 명령이나 가치체계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때 현실화한다. 그 싹은 우리 내부에서도 얼마든지 자랄 수 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에 대해 근면성은 범죄가 아니지만 아무 생각이 없었던 것은 명백한 유죄임을 강조했다. 세상의 악은 인간이 악해서 저지르는 게 아니다. 그건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하지 않고 그런 정치와 사회의 구조 악에 저항하지 않은 결과다.

오늘은 '저항'에 방점을 찍는다. 비판적 저항으로써 인문학이 나아갈 길은 인간의 자유와 해방의 확장을 위하여 약자들과 연대와 사회적 책임의 의미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저항을 잘 따져야 한다. 저항은 누구의 저항이며, 무엇을 위한 저항인가를 점검하는 것이 중요하다. 권위와 권력을 가진 자들이 약자들에 대한 진압 방식인가? 아니면 권력의 중심부 밖에서 자유와 평등의 지평을 확대하기 위한 변혁을 모색하는 방식인가? 그래서 인문학에서 '저항'을 말할 때는 '비판적 저항'이라고 말하여야 한다.

다른 생물처럼, 인간도 자기 완전체로 현상유지를 통해 생존한다. 그러한 현상유지에 적절한 변화가 없다면, 진부한 인간으로 전락할 것이다. 유지와 변화 사이에서 최선의 전략으로 인생을 설계해야 한다. 인간은 익숙함을 편함이라고 착각하고 그 편함 안에서 즐거워 한다. 소수의 인간만이 그 편함이 진부함이라고 인식하여 대담한 혁신을 감행한다. 인간이란 누구에 의해 운명적으로 결정되는 완제품(完製品)이 아니라,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야 할 시제품(試製品)이다. 싫던 좋던 자신이 손으로 만들 때, 그 시제품은 완제품이 된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의 장점을 살려 인생을 대담하게 조각하지 못한다. 가족 혹은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이 되기 위해 자신의 소질을 찾아보지도 않고, 자신의 장점과 상관 없는 일에 매진한다. 게다가 우리 대부분은 자기다움을 촉발시킬 불가피하고 힘든 상황에 부딪치면, 그것에 정면 도전하지 않고 회피한다. 그런 비겁한 삶을 살다 결국, 인생을 산 것이 아니라 연명한 자신을 보고, 후회한다.

이런 문제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꿈을 꾸고, 그 꿈을 독려하는 교육의 부재 때문이다. 그 교육의 부재는 우리를 수동적인 피수용자로 퇴락시킨다. 자신을 들여다 보는 교육이 아니라, 계속되는 선행교육으로 친구들과의 경쟁에서 이겨야 했다. 소위 명성이 있는 대학과 월급을 많이 주는 직장이 행복이라고 착각한다. 그에게 행복은 더 나은 자신을 발견하고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하고 상관 없는 타인과의 경쟁에서 오는 자신이 조절할 수 없는 상대적인 행운이다.

우리는 어려서 부터 자신이 원하는 것보다는 가족이 원하는 바,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이 되기 위해, 개성을 버리고 순응을 기꺼이 혹은 억지로 선택한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생존하기 위한 전략이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를 속박하는 올가미가 된다. 이 올가미는 자신이 되기 위한 개성을 억제하며 서서히 중독, 불안, 초조, 폭식, 거식, 우울, 집착 심지어 장신분열증과 같은 정신질환들이 발생한다.

인간은 종(種)으로 환경에 순응하고 개인으로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복종하여 생존해왔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어 두발로 땅을 굳게 디디고 일어서서 자신을 위한 삶을 선택하기를 두려워 한다. 누가 '빵과 자유;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종용하면, 그는 망설일 것이다. 인간은 자유와 변화를 두려워 하고 심리적으로 저항(抵抗)한다. 우리는 변화를 두려워 하고 자발적으로 기존 질서에 노예가 되고 싶어 한다.

인류문명이 등장한 후에, 독재자가 인류를 통치해왔다. 한 사람이 수많은 사람들을 독재로 통치할 수 있는 이유는 대다수가 자발적으로 복종을 미덕으로 삼은 노예를 자처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립하기를 꺼려한다. 자신의 성장에 저항하는 주체는 자신이다. 저항은 외부의 독재에 대한 항거이다. 저항은 동시에 자신이 아닌 남들이 만들어 놓은 세계에 안주하고 자신의 독창적인 삶을 창조하려는 자유에 대한 거부이기도 하다.

그래 인문정신의 핵심은 나의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권위에 대한 저항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문학을 한다'는 인문 운동은 우아한 문화활동이 아니다. 나, 타자, 세계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들과 마주하고 씨름하는 치열한 행위이며, 비판적 성찰과 고뇌의 시간을 통해서 비로서 조금씩 이 세계를 향하여 자신을 기투하고 개입하는 사유이고 실천이다. 여기서 나오는 인문학적 소양인, 인문정신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통해서 그 싹이 돋아나게 된다.
▪ 확실성을 경계하고, 불확실성 속에서 사유하기.
▪ 고정된 정답 찾기보다 새로운 질문 묻기를 배우기.
▪ 그리고 상투성에 저항하고, 자명성에 물음표 붙이기.
그래 인문학을 우리의 삶에 구현하려는 인문운동가는 늙지 않는다.

문제는 인문학을 단순한 문화활동의 영역으로만 이해할 때, 그 인문학은 탈 정치화되고 탈 역사화 된다는 점이다. 단순한 문화 활동으로 생각하는 인문학은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지녀야 할 사회나 세계에 대한 책임을 외면하게 하고, 구체적인 변화가 지속적으로 요구되는 실천적 삶에 무관심하게 만든다. 인문학을 탈 정치 화하면 인문학이 지닌 중요한 비판적 성찰과 세계에 대한 개입의 의미를 보지 못하게 한다. 그래 내가 인문학자보다 인문운동가가 되기를 택한 이유이다.

인문운동가 하는 일은 비판적 성찰, 해답 찾기가 아닌 새로운 물음 묻기를 통한 세계 개입 그리고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 서의 정의, 평화, 평등, 연대의 가치를 더 확장하고 실천하기 위한 비판적 저항이다. 그건 그것이 무엇이 되었던 간에 고정하려 하는 것과 제한하려 하는 것, 절대적인 것의 위험성과 불확실성을 성찰하는 일이다.

이런 비판적 저항은 다음과 같은 인문학의 기초에서 이루어진다.

• 세상의 모든 권위와 권력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유하기: 한나 아렌트는 비판적 사유는 나 자신과의 대화이고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고독'이라고 말했다. 외부에서 들리는 소리보다 내면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  이성적으로 사유하기: 이를 위해  자신을 말과 글로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 물음 묻기, 즉 질문하기: 좋은 질문과 나쁜 질문이 있다. 좋은 질문은 질문 받는 사람을 생각하게 만들고 내 안에 또 다른 세계를 찾게 만든다. 나쁜 질문은 "예 혹은 아니오"로 단정 짓게 만드는, 생각이 필요하지 않은 질문이다. 답을 내릴 때 기억해야 할 다음 세 가지가 중요하다. (1) 모든 답은 잠정성을 갖는다. (2) 모든 답은 부분성을 갖는다. (3) 모든 답은 특정한 정황 속에 매여 있다.

이를 통해 키워진 인문 정신은 확실성을 내려놓고 불확실성에서 사유를 시작하는 것이다. 끊임 없는 불안감을 끌어 안고 살아야 하는 수고가 있다 할지라도,
• 고정된 정답보다 새로운 질문 묻기를 하는 것이다.
• 상투성에 저항하고 자명성에 물음표를 붙이는 일이다.

인문 운동가로 나는 오늘 아침 문병란 시인의 <희망가>를 부르고 싶다. 왜? 나는 노자가 <<도덕경>> 제40장에서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이란 믿기 때문이다. 그 말은 '반대편으로 나아가려는 경향이 도의 운동력'"이라는 말이다. 반대편으로 나아가려는 경향을 운동력으로 해서 반대되는 것들이 서로 관계를 맺는다는 거다. 이 운동력은 바로 자연이 본래적으로 갖추고 있다고 노자는 보았다. 이 자연의 형식에 따라, 나는 오늘 아침도 '되돌아감'을 믿는다.  그래 <희망가>를 부른다. 달도 차면 기울고, 낮이 밤이 되고 밤이 낮이 된다. 아주 추운 겨울이 되면 다시 더운 여름으로 이동하고, 심지어 온 우주도 팽창과 수축을 반복한다. 이 모든 것은 어느 한 쪽으로 가다가 극에 도달하면 다른 쪽으로 가는 '도'의 원리에 따르는 운동이다. "절망 속에서도 삶의 끈기는 희망을 찾고/사막의 고통 속에서도 인간은 오아시스의 그늘을 찾는다."

희망가/문병란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는 헤엄을 치고
눈보라 속에서도 매화는 꽃망울을 튼다.

절망 속에서도 삶의 끈기는 희망을 찾고
사막의 고통 속에서도 인간은 오아시스의 그늘을 찾는다.

눈 덮인 겨울의 밭고랑에서도 보리는 뿌리를 뻗고
마늘은 빙점에서도 그 매운맛 향기를 지닌다.

절망은 희망의 어머니 고통은 행복의 스승
시련 없이 성취는 오지 않고 단련 없이 명검은 날이 서지 않는다.

꿈꾸는 자여, 어둠 속에서 멀리 반짝이는 별빛을 따라
긴 고행 길 멈추지 말라 인생항로 파도는 높고
폭풍우 몰아쳐 배는 흔들려도 한 고비 지나면
구름 뒤 태양은 다시 뜨고 고요한 뱃길 순항의 내일이 꼭 찾아온다.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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