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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유전자로만 보면, 인간과 원숭이 사이에는 약 2% 정도의 차이밖에 없다.

4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1년 12월 12일)

노트북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해 <인문 일기>가 밀렸다. 앞으로는 그러한 일이 없도록 데스크탑을 하나 구입했다. 그것도 눈을 보호하기 위해 모니터를 큰 것으로 장만했다. 게다가 12월 초이면 한 해의 프로젝트 결과 보고서를 내야하기 때문에 할 일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내 고향 공주에 다녀올 생각이다. 친구가 1960년 근대건물을 부수지 않고 리모델링했다 한다. 가보고 싶다. 그래 우리는 <<장자>> 읽기를 공주에 가서 한다,

오늘 아침은 밀린 <인문 일기>를 완성하기 위해 좀 일찍 일어났다. 버릇처럼, 시간을 본다고 스마트폰을 잡으면 이것 저것 검색하며 30분을 침대에서 시간을 보낸다. 나쁜 습관이다. 그런 의식이 떠오르면 바로 일어난다. 그러면 화장실에 가 양치질을 하고, 혀를 닦은 후, 책상에 앉는다. 가급적 오늘의 화두를 찾으면 다행이다. 나에게 스마트폰의 여러 SNS는 세상과 만나는 창으로 나의 교과서이다. 몇 분의 글들을 정독(精讀)한다. 그리고 몇몇 기사들은 저장해 두기도 한다.

오늘 아침에 만난 것은 새로운 플랫폼이다. 그 이름은 <social.corea@gmail.com>이다. 내 <인문 일기>도 플랫폼으로 전환하여, 세상 사람들과 더 많이 소통해 볼 생각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내 생각을 나누어야 한다. 그래야 내 생각이 객관화되고, 확증편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나를 더 알게 된다. 세상의 모든 문제는 내가 나를 잘 알지 못해서 일어나는 일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내가 나를 잘 알지 못하고, 자신을 과대 평가하거나 과소 평가한다.

오늘 아침 만난 플랫폼은 '대안 담론'을 주류 화한다는 데서 나는 매력을 찾았다. 우리 언론은 '대안'은 커녕, 취재에 바탕을 둔 탐색 보도라 기보다는 앉아서 쉽게 남의 SNS를 옮기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오늘 아침 만난 플랫폼은 (1) 근거에 기반한 문제 지적과 분석 (2) 문제를 다루는 현 정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거쳐 (3) 실현 가능한 정의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했다. 내 일상의 개인적인 문제도 이런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본다.

인하대 사회복지학과 윤홍식 교수의 주장을 공유한다. 그가 본 한국 사회의 모순은 '불편한 진실'로 우리는 받아들여야 한다.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나도 이 점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 사람들은 부모 찬스를 사용하는 특권에 분노하고, 치솟는 아파트 가격에 피가 거꾸로 도는 울분을 느끼지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과감한 개혁을 지지하는 것을 주저한다.  
- 불평등과 비정규직이 심각한 문제라고 이야기 하지만, 인천국제공항공사와 서울교통공사가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려고 하자 엄청난 분노를 표출했다.
- 자신의 사회적 지위가 부모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결정되는 불평등한 한국 사회에 분노하면서도, 정작 그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의 삶을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외면했다.

모순이다. 모순(矛盾)은 "사물이나 사건의 앞뒤가 서로 맞지 않음'이다. 다른 말로는 '당착(撞着)'라고도 한다. 순화어는 `어긋남'이다. 모순이라는 한자어는 창 모(矛)와 방패 순(盾)으로 이루저진 것이다. 전국시대 초나라에서 무기를 파는 상인이 시장에서 방패를 흔들며 외쳤다. “이 방패는 아주 단단해 어떤 창이라도 막아냅니다.” 이번에는 창을 들어올리며 외쳤다. “이 창은 아주 예리해 어떤 방패도 단번에 뚫어버립니다.” 그러자 상인을 지켜보던 한 구경꾼이 물었다. “그럼 그 예리한 창으로 그 단단한 방패를 찌르면 어찌 되는 거요?” 말문이 막힌 상인은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말이나 행동의 앞뒤가 서로 어긋남을 비유하는 모순(矛盾)은 <<한비자>>에 나오는 창(矛)과 방패(盾) 파는 상인 얘기가 유래다. 다른 말로는 이율배반(二律背反)이라고 한다. 이런 것들은 은 논리적이고 사실적으로는 근거가 대등하면서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두 명제다. 모순과 이율배반이 생기는 건 내 기준으로, 내 이익으로만 세상을 재단하는 탓이다. 내게 이익이 되는 잣대만 쓰기 때문이다. 나의 이익만 쳐다보고, 자기 주장만 내세우면 수시로 모순에 빠진다.

윤홍식 교수가 본 한국인의 분노는 "성장제일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불평등한 결과"가 아니라, "이웃의 안정적인 삶이 내 기회를 가로챈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한 분노였다. 시기와 질투이다. 우리 사회가 유지되지 못할 정도로 출산율이 떨어지고, 매일매일 사람들이 스스로 죽거나 산업재해로 죽어 나가도, 청년의 미래가 부모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결정되고,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불가항력으로 자영업자들이 눈물을 흘리며 생계를 접어도, 우리 사회는 그것이 치열한 경쟁의 결과라면 눈도 깜짝하지 않을 사회가 되었다. 한 마디로 '연대(solidarity)가 없다.

성장을 위해 영혼까지 팔아 치운 우리의 노력이 기적 같은 성공을 위해 우리는 '나와 가족' 이외에는 그 누구도 믿지 않는 연대 없는 사회를 만들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윤홍식 교수는 "만약 성공이 우리가 직면한 헬조선의 원인이라면, 우리가 자랑스러워 하는 그 성공의 방식을 총체적으로 바꾸는 길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고 했다. 조금 느리게 갈 수도, 조금 빠르게 갈 수도 있을 뿐이다.

재벌 대기업이 숙련 노동자의 일자리를 자동화 기계로 대체하고, 중소기업과 함께 성장하기보다는 손쉽게 국외에서 부품, 소재, 장비를 수입, 조립해 수출하는 방식으로 성장하는 경제구조에서 좋은 일자리를 늘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좋은 일자리를 얻기 위한 생존경쟁은 지금보다도 더 치열해질 것이다. 이런 식으로 치열한 경쟁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연대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식으로 접근하여, 2022년 대선은 우리들의 삶의 조건을 총체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경제, 정치, 문화라는 한국인의 총체적 삶의 조건을 바꾸지 못한다면, 우리의 성공이 만들어 낸 덫에서 빠져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일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조선인들이 일제의 강점에 신음하던 시절과 1960년 한국 전쟁 이후 시기를 생각하면, 지금 우리가 성공의 덫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작은 언덕을 오르는 번거로움 일지도 모른다.

나는 윤홍식 교수의 다음 말에 동의한다. "대기업이 중소기업과 협력해야 성장할 수 있고, 사람들이 서로 연대해야 더 안전한 삶을 살아가는 제도와 구조를 만들어낸다면, 현명한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은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또 그렇게 행동할 것이다. 그래 2022년 대선은 아주 중요하다. 미래로 갈 것인가? 과거로 되돌아갈 것인가? 냉철하게 고민해야 한다. 사소한 사적 이익이나 감정에 휩쓸려 판단하면 우리는 이 모순을 극복할 수 없을 것이다. 정치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예술 같은 정치가 이 불가능한 일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국민들의 혜안을 나는 굳건히 믿는다.

내 고향 공주를 방문해서 만난 모과나무이다. 언젠가 나는 책에서 이런 표현을 읽은 적 있다. “모과나무처럼 뒤틀린 심사(心思)”. 잎과 꽃이 없는 겨울에  모과나무를 보면,  몸통이 뒤틀려 있다. 이 나무의 이름은 가을에 익는 노란빛의 매혹적인 열매 이름이 모과이기 때문이다. 그 모과도 울퉁불퉁 못 생겼다.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키고, 과일전 망신은 모과가 시킨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그 모과의 향기는 기가 막히다. 모과는 목과(木瓜)에서 나와, 그 의미는 '나무의 참외'라고 하는데, 확실한 것은 나도 잘 모른다.  우리 사회가 모과처럼, 모순이 보이지만, 나라가 바뀌고, ㅅ상이 바뀔 기회를 우리는 맞고 있다.

모과에 대한 단상/김욱진

​방 한 모퉁이 책상 위엔
한 열흘 전쯤 고향 집에서 주워 온
모과 한 개 뎅그러니 놓여 있다
낯설이 해서 그런지 얼굴색이 노래지고
주근깨 같은 까만 점도 후벼 파주고 싶을 만큼 생겼다
그 단새 구멍 두어 군데 숭숭 나 있는 흠집
나의 귀지 같은 더께 덕지덕지 앉은 구멍 속 한참 들여다본다
흠집은 암갈색으로 점점이 번지는 중이다
더군다나 몸통은 누군가 밀가루 반죽 짓이겨놓은 듯 울퉁불퉁하다
과일 망신 다 시킨다는 그 모과
온몸 쥐어짠 기름 반들반들 내뿜으며 웅숭깊은 향 풍긴다
아, 저 향수 속으로 나를 찾아 나서면
언제쯤 그곳에 가닿을 수 있을까
못생긴 인형처럼 앙증맞은 한 개구쟁이가
내 맘을 온통 다 파먹어 들고 있다

유전자로만 보면, 인간과 원숭이 사이에는 약 2% 정도의 차이밖에 없다. 그러나 원숭이는 동물원 안에 갇히고 인간은 유유자적 구경한다. 미미한 유전자적 차이를 거대한 신분의 차이로 바꿔버리는 요인을 우리는 '문화'라고 한다. 동물이나 식물은 자신의 진보를 전적으로 진화에 의존하지만, 우리 인간은 문화에 더 의존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가 '문화적'이라는 점 때문이다. '문화(文化)'를 글자 그대로 보면 '무엇인가를 만들어서 혹은 그려서(文) 변화를 야기(化)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변화를 더 잘 야기하는 인간일수록 더 인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변화를 야기하려고 시도하는 인간에게 우리는 비로소 자유롭고 독립적이며 주체적이라고 말해준다. 반대로 누군가가 야기해 놓은 변화를 수용하거나 답습하기만 하면 종속적이 된다.

과거 아프리카의 타조 사냥이야기를 소환한다. 타조를 잡으려면, 타조를 일정한 간격을 두고 계속 쫓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타조와 쫓아가는 사람들 사이에 유지되는 일정한 간격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존재하게 되는데, 쫓고 쫓기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쫓기는 쪽의 긴장감은 커지기만 한다. 타조가 쫓기고 쫓기다가 간장감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지면 도망가는 것을 멈추고 그 자리에 서서 머리를 뜨거운 모래땅에 처박는다. 사람들은 그냥 가서 꼼짝 않고 대가리를 박고 있는 타조를 잡아오면 된다. 타조들은 다 그래왔고, 또 다른 타조들도 그렇게 잡혀 죽을 것이다. 그런데 한 타조가 다른 타조들을 따라서 머리를 처박지 않고 무리에서 이탈하여 갑자기 뒤를 돌아보며 쫓아오는 사람들을 노려보는 일을 저질렀다. DNA에 박혀 있는 일정한 방향을 지키다가 돌발적으로 선회(旋回)하여 습관적이고 집단적으로 공유하던 방향을 혼자서 바꾼 것이다. 여기서 문화가 새로 나온다.

인간과 세계 사이에서, 인간은 타조처럼 쫓기고, 세계는 인간을 쫓아간다. 그러니까 세계는 인간에게 항상 무엇인가 반응을 강요한다. 우리 삶은 모두 그 강요에 대한 나름대로의 반응일 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선회'는 도전이고, 여기서 필요한 것이 용기이고, 그 결과로 변화가 일어나면 새로운 문화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니까 문화적 삶의 시작은 과거의 답습(踏襲)이 아니라, 탈주하는 것이다. 내내 쫓기기만 해왔던 무리에서 이탈한 어떤 한 타조가 뒤를 돌아보고, 갑자기 이전에는 있어 본 적이 없는 전혀 다른 반응을 시도했다면, 이것이 바로 새로운 문화에 대한 도전이다. 일단 되돌아보면(선회하면), 그 이전의 관행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 시도될 것이고, 그것은 세계에다가 이전에 있어본 적이 없는 어떤 무늬를 그리게 될 것이다. 문화적 활동의 결과를 수용하던 타조가 주도적으로 문화적 활동을 하는 타조로 변했다. 창의적인 타조가 된 것이다.

이제 우리도 변해야 한다. 문화란 예술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의하는 모든 것이다. 문화는 우리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모든 것이다. 이 문화에 대한 정의는 노르웨이 평화학자인 요한 갈퉁(Johan Galtung)의 말이다. 시대가 바뀌었다. 제레미 리프킨(Jeremy Rifkin)이 잘 말하였다. "20세기가 이기적 경쟁과 확산으로 성공한 시대였다면, 21세기는 이타적 협업과 공감으로만이 공존하고 번영할 수 있는 시대일 것이다." 그 길은 '연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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