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사람 만나고, 이야기 하고, 와인도 한 잔 하는 일상이 '뚝' 단절된 주말이다. 코로나-19가 곳곳에서 창궐하여 확진자가 1000명 가까이에 이른다는 언론 보도, 날씨만큼 더 움츠러들게 하는 주일 아침이다. 침대에 누워, 스마트 폰에 시간을 빼앗기고 있는데, '긍휼(矜恤)'이라는 단어에서 그만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긍휼을 프랑스어로는 'la pitié'로 알고 있었을 뿐이다. 이 프랑스어를 사전에서 찾으면, '동정, 연민'이라 풀이한다. 일상적으로는 다소 경멸이 섞인 '딱함'으로 여겼다.
다시 긍휼이란 단어를 나의 앱 <모든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니, 간단한 단어가 아니었다. "불쌍하고 가엽게 여겨서 돕는 것'이다. 나는 방점을 '돕는 것'에 찍고, 나의 '긍휼 정신'을 반성해 보았다. 불쌍히만 여기고, 돕기를 하지 않은 마음이 찬바람처럼 불어왔다. 긍휼을 한문으로 써보아도, 언뜻 그 뜻을 알 수 없다. 그런데 긍휼의 영어 표현이 compassion, mercy였다. Compassion을 우리는 '연민'이라 하고, mercy는 '자비'라 한다. 이 mercy의 동의어가 humanity(인간성, 인성)이다. 그러니까 긍휼은 인성이다. 인성을 키우려면 긍휼하는 마음의 그릇을 키우는 일이다.
맹자가 말하는 '측은지심'이 mercy이다. 여기서 나오는 인(仁), 어진 마음이다. 그걸 우리는 사랑이라고 하고, 철학에서는 에로스라 한다. 나는 이 에로스를 '생명력'으로 풀이한다.
어제 나는 카피라이터 정철의 <사람 사전>을 샀다. 부제가 마음에 든다. "세상 모든 단어에는 사람이 산다." 나는 사람과 인간을 구분하지만, 사람이 먼저라 생각한다. 사람이 있고 인간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 모든 생각의 주어, 모든 행동의 목적어, 모든 인생의 서술어, 인생 마지막 날까지 보듬고 가야 할 문장, 사람이 먼저다." 세상이 혼란스러울 수록 기억해야 할 문장이다. 사람이기에 우리는 서로 긍휼해야 한다. 서로 사랑해야 한다. 그게 삶의 제 1원칙이다. <사람사전>에서 보는 '사랑'은 "같이 있어 주는 것, 같이 걸어주는 것, 같이 비를 맞아주는 것, 같이 울어주는 것, 같이 웃어주는 것, 이 모든 문장에서 '주다'라는 개념을 빼면 사랑. 사랑은 같이 있는 것, 같이 걷는 것, 같이 비를 맞는 것, 같이 우는 것, 같이 우는 것." 통쾌하다.
오늘은 주일 아침이라, 한 주간 나의 영혼을 떨리게 하고, 정신의 근육을 키워준 글을 공유한다. 지난 주는 강의들이 취소되고, 술 자리도 줄어 책과 좋은 칼럼을 많이 봤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사진은 늘 산책하는 탄동천의 갈대이다. 마침 이윤학 시인의 <갈대>를 읽었기 때문이다.
갈대/이윤학
이제 제발 아픈 척하지 말자.
이제 제발 죄진 척하지 말자.
이제 제발 늙은 척하지 말자.
갈대에게서 배운다. 갈대가 쓰러지지 않는 것은 중심을 잃지 않기 때문이다. 중심은 흔들려도 자기 자리로 되돌아오게 하는 힘이다. 흔들림 속에서도 자신의 균형을 회복할 능력을 가진 사람은 곧 중심이 있는 사람이다. 그 중심은 현재의 내 위치를 잘 알고, 무엇을 지향해야 할지를 아는 것에서 나온다. "인심유위, 도심유미, 유정유일, 윤집궐중(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서경>) 사람의 마음(=욕심)은 위험해져 가고, 도심(=양심)은 점차 희미해지니, 마음 자체를 맑고 한결같이 하고 진실로 그 중심을 잡으라"는 뜻이다. 여기서 "윤집궐중"은 중심을 잃지 말라는 말이다. 그 중심은 세상의 근본 원리를 확실히 지키는 일이다. 순임금이 우임금에게 전한 말이란다.
세상의 중심은 무엇인가? <중용>을 인용한다. "희노애락지미발 위지중, 발이개중절 위지화 중야자 천하지대본야 화야자 천하지달도야(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중야자 천하지대본야 화야자 천하지달도야)" (<중용(中庸)>) 희노애락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 '중'이고, 이미 드러났지만 절도에 맞는 것이 '화'이다. 중은 천하의 근본이고, 화는 천하에 통달한 도이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희로애락의 감정이 있다. 살다보면 기뻐하거나 즐거워하거나 화내거나 슬퍼하는 일들이 일어난다. 그런데 이런 감정 자체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중’이라는 것이다. 그런 감정 자체를 절제하라니 <중용>의 정신은 무서운 것이다. 희로애락이 일어난다 해도, 그 “중절”을 지키면 ‘화’라 한다는 말이다. "윤집궐중" 대신 <논어>에서는 "윤집기중(允執其中)"이라 말한다. "하늘이 내린 차례가 당신에게 있으니, 진실로(允) 그 중심(其中)을 잡으라"는 말이다.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당부한 말이란다. "기중"은 중용을 말한다. 갈대에게서 배운다. "윤집궐중"이나 "윤집기중"이나 갈대처럼 "중심을 잃지 말라!"는 말이다. 치우치지 않게, 공평하게 중심을 잡으라는 충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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