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1년 12월 8일)
어제는 컴퓨터까지 고장이었다. 전원이 들어가지 않아 밤새 궁리하다가, 우연히 구글에다 고민을 이야기 했더니, 유튜브를 연결시켜 주었다. 간단한 것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서비스센터에 갈 참이었는데, 그 유튜버가 가르쳐 주는 대로 했더니 해결되었다. 그리고 다시 노트북을 켰더니 암호를 바꾸라 한다. 그런데 윈도우 10에 설치된 암호를 알 수가 없었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것은 윈도우11이다. 결국 다시 노트북의 리부팅이 필요했다. 다 지우고 윈도우 11을 다시 깔았다. 다시 태어난 것이다. 사람도 그러 했으면 좋겠다. 마음이나 정신은 가능한데, 몸은 그렇게 되지 않는다. 그러나 늙음을 인정하고, 기능이 퇴화했거나 노화된 곳은 다시 손을 봐 가며 우리는 살아야 한다. 언젠가 어디선가 읽은 것인데, 사람이 늙는다는 것은 몸의 한 부분이 말을 걸어오는 거라 했다.
신과 인간이 다른 차이는 '신은 죽지 않는다'이다. 그러나 인간은 죽는다.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다. 생로병사, 그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숙명이다. '늙는다는 것은 신의 은총'이라는 독일 속담이 있다. 장 폴 사르트르도 단언했다. '나이 듦은 또 하나의 축복'이라고. 그러나 과연 늙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아무도 늙고 싶지 않아 한다. 늙고 싶지 않다는 것은 죽고 싶지 않다는 것과 통한다.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 모두 살고 싶어 한다. 그것도 아주 오래오래. 그러나 영원히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 그것은 축복일까, 형벌일까?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영원히 죽지 않는 여인이 시빌레(Sibyl)이다. 그녀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무녀(巫女)를 총칭하기도 하지만 원래는 아름다운 여인의 이름이었다. 시빌레가 젊고 아름다울 무렵, 아폴론은 그녀에게 구애하며 약속했다. "내 사랑을 받아준다면 무슨 소원이든 들어주겠소." 시빌레는 손에 한 움큼의 모래를 쥐고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이 모래알의 수만큼 오래 살게 해주세요."
영원히 사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없는 신의 영역이었지만 아폴론은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시빌레가 깜빡 잊고 놓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젊음이었다. 모래알의 수만큼 오래 살게 해 달라고는 했지만, 젊은 모습 그대로 살게 해달라는 말을 미처 하지 못한 것이다. 시빌레는 소원을 이루었다. 그러나 마음이 변하여 더 이상 아폴론을 사랑하지 않았다. 화가 난 아폴론은 그녀에게 약속한 대로 모래알만큼의 수명을 주었다. 그런데 늙도록 내버려 두었다. 시빌레는 결국 늙고 지친 몸으로 무수히 많은 세월을 살아야 했다. 700년도 넘게 살고 나니 시빌레의 소원은 오직 한 가지였다. "제발 나를 죽게 해주세요."
늙어서 몸이 점점 줄어든 시빌레는 나무 구멍 속에 넣어져 매달려 있었다. 오직 죽고 싶다는 소원 하나를 마음에 품고서. 시빌레는 영원히 살았으나 영원히 살았기 때문에 불행한 사람이었다. 제발 죽게 해달라는 소원 하나만 품고 살아야 했던 그녀가 우리에게 전해준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축복처럼 받아들이라고. 죽음이 있기에 주어진 생이 소중한 것이라고.
우린 인생이 너무 짧다고 한탄한다. 그러나 짧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얼마나 많은가. 꽃이 아름다운 것은 그 꽃이 속절없이 지기 때문이다. 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뜨겁던 그 사랑이 쓸쓸히 식어 가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 역시 언젠가는 죽기 때문에, 그래서 소중하고 그래서 아름답다.
"삶을 사랑하고, 죽음을 생각하라! 때가 오면 자랑스럽게 물러나라. 한 번은 살아야 한다. 그것이 제1의 계율이고, 한 번만 살 수 있다. 그것이 제 2의 계율이다." (에리히 케스트너, <두 가지 계율>) <<백살까지 유쾌하게 나이 드는 법>>을 쓰신 이근후 교수님이 인용하신 글이다.
한 번만 살아야 하는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오늘 아침의 화두이다. 고 신영복 교수의 사유를 이근후 교수는 인용했다. "그 자리에 땅을 파고 묻혀 죽고 싶을 정도의 침통한 슬픔에 함몰되어 있다 하더라도, 참으로 신비로운 것은 그처럼 침통한 슬픔이 지극히 사소한 기쁨에 의하여 위로된다는 사실이다. 큰 슬픔이 인내 되고 극복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동일한 크기의 커다란 기쁨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이 문장 속에 답이 있다고 본다. 그래 즐겁게 오늘도 주어진 컴퓨터 문제를 긍정적으로 하나씩 해결했다. 오늘 시는 죽음에 관한 시이고, 그리고 사진을 동네 <유리공원>에 내년 봄에 더 활짝 발산하기 위해 수렴하고 있는 연(蓮)들이다. 이제 나도 수렴의 시기를 보낼 생각이다.
죽음에 대한 한 연구/박찬일
죽은 지 1년이 되었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죽은 지 2년이 되었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죽은 지 3년이 되었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죽은 지 4년이 되었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죽은 지 5년이 되었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죽은 지 6년이 되었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죽은 지 7년이 되었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죽은 것이다
하루를 열심히 보내는 가운데 발견하는 사소한 기쁨과 예기치 않은 즐거움이 나이들 어감에 겪는 슬픔을 달래 준다. 그래서 우리는 가급적 유쾌하게 살아야 한다. 사소한 기쁨과 웃음을 잃지 않는 한, 우리의 삶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젊었을 때는 뜻을 세워 열심히 노력하면 모든 일을 다 이뤄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살다 보니, 인생은 필연보다 우연에 의해 좌우되었고, 세상은 생각보다 불합리하고 말이 안되는 곳이 많았다.
안 늙으려면, 노화를 더디게 하려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살면 된다. 지루한 시간 속에 자신을 가두지 않는 것이다. 그러려면 하는 일을 즐겁게 하는 것이고, 즐겁지 않은 일은 안 하는 것이다. 세상은 불공평해도 세월은 공평하다. 세상이 안 풀리는 게 아니라, 내가 안 푸는 것이다. 못 푸는 게 아니라, 안 푸는 것이다. 풀지도 않으면서 저절로 풀리기를 바란 거다. 인생 수능의 채점자는 세월이다. 세월은 세상보다 힘이 세다. 세상은 나를 차갑게 대해도 세월은 결국 나를 알아 줄 것이다. 세상이 주는 조건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세월이 주는 가능성과 한계는 누구에게나 똑같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 세월은 세상보다 힘이 세다.
'구차(苟且)'란 말을 배웠다. 구차하게 살지 말자. 이는 떳떳하지 못하고 답답하고 좀스러운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버젓하지 않거나 번듯하지 않은 것이다. 원래는 구저(苟菹)라는 말에서 나온 거라 한다. 세월이 지나면서 저(菹, 채소 절임 저)의 자에서 풀 초가 빠지고 차(且, 버금 차)로 바뀐 것이라 한다.
'구저'란 신발 바닥에 까는 지푸라기를 말하는 것으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게 되는 의인을 살리기 위해 천리 길을 가는 그의 신발이 닮아서 발에 피가 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너무나 애처로워 볏짚을 모아 그의 신발에 깔아주었다. 이 일을 보고 사람들은 모멸을 감수하고 적은 동정을 받는다 뜻으로 "구저 구저" 하다가, 세월이 흘러 '구차'가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당장 굶어 죽어도 구차하게 살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언젠가부터 구차함이 당당하게 대중들 앞에서 나서기 시작했다. 특히 요즈음의 정치인들을 보면 구차하다. 한 세상 당당하게 살아가 야지 구차하게 살지 말아야 한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없이 하루 하루를 살아야 한다.
"재물 앞에 놓였을 때 올바른 방법이 아니면 구차하게 얻지 말고, 어려움이 닥쳤을 때 구차하게 모면하려고 하지 마라. 다투게 되어도 이기려 하지 말고, 재물을 나누어도 많이 얻으려 하지 말라" 고대의 일상 생활에 적용되었던 규범들을 실은 <<예기>>에 나오는 글이다.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을 누르시면 보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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