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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인간의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양심을 동양의 사유체계에서는 '무아(無我)"라는 이름으로도 부르기 때문이다.

3년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산책
(2021년 11월 28일)

자아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내 경험으로 만들어진 거울 앞에서 확인할 수 있는 자아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간절하게 매일 창조해 나갈 자아이다. 나는 과거의 나인가? 아니면 내가 그런 과거를 기반으로 새롭게 만들어가야 할 나인가? 배철현의 교수가 자신의 <묵상>에서 자주 하는 질문이다.

그러니까 산다는 것은 '나는 누구인가"를 질문하며 그 해답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나는 누구인가를 질문하다 보면, '남들이 말하는 나(3인칭으로서의 나)'와 '내 자신(1인칭으로서의 나)인 나'가 있다. 잘 보면, 나는 우연히 던져진 역사적이며, 사회적인 환경을 통해 내가 되었다. 그 나는 진짜 내가 아니라, 사람들이 나라는 인간을 통해 투영한 '그들의 나'이다. 타인이라는 거울에 비친 나이다. 존 듀이에 의하면, 자아는 이미 만들어진 완성품이 아니라, 끊임없이 행위와 선택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다.

반면, 나 자신, 자아라는 '아트만(고대 인도인들이 자아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산스크리트어)'은 두 가지 전혀 다른 의미가 숨어있다. 하나는 소문자 아트만(atman)으로 '경험적 자아'라 한다. '나'라는 개별적 인간의 경험에 의해 형성되어 타인과 구별되는 존재로서 자아(自我)이다. 그런 자아는 습지(濕紙)와 같아 운명적으로 혹은 우연히 만나는 먹물의 색깔에 물든다. 윤홍식은 이걸 '에고'라 한다. 이 에고는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가 무한 세계의 하나라고 생각하지 않고 유일한 세계, 더 나아가 진리를 머금은 유일한 세계라고 우긴다. 이 에고는 허공에서 나부끼는 풍선처럼 비바람에 이리저리 정신없이 흔들린다. 배철현 교수는 그런 사람을 "무식하다"고 말한다. 무식한 사람의 특징은 경험에 의해 정복당한 소문자 '아트만'은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가 무한한 세계의 일부라고 생각하지 않고, 유일한 세계, 더 나아가 진리를 머금은 유일한 세계라고 우긴다.

또 다른 하나는 대문자 아트만(Atman)으로 삼라만상의 근원인 '브라흐만(Brahman)'과 일치하는 '초월적인 자아'이다. 윤홍식은 그걸 '참나'라고 한다. 그 '참나'를 찾으려면 인간의 경험적 자아는 초월적인 자아에 의해 정복당해,  친구가 되어야 한다. 그 말은 자아가 추구하려는 최선의 단계인 우주와 합일된 자아가 일상의 자아, 경험적 자아를 정복하여 깨어난 자아로 합일되는 상태이다. 배철현 교수에 의하면, 만일 내가 초월적 자아에 의해 정복당하면, 나는 그 자아와 친구가 되어 승화의 길로 들어 설 수 있다. 그러나 경험적 자아에 사로잡히면 나는 타락의 길로 들어선다고 한다. 잘 사는 삶이란 경험적 자아를 가만히 보고 취사선택하여, 초월적 자아와 합일을 시도하는 과정이다.

여기서 장자가 말하는 "오상아(吾喪我)"가 생각난다. '나를 잃었다'는 이 말은 '내가 나를 장례 지낸다(이 말은 '성심'을 버린다는 말로 보면 좋다)'고 보는 것이 더 잘 이해가 간다. 다시 말하면, 나를 잃음은 나를 비움의 상태로 들어갔다는 말이다. 이를 '오상아'로 표현했다. 내가 나를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려, 내가 진정한 내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우리의 비본래적인 자아, 작은 자아(self)에서 풀려나 본래의 자아, 큰 자아(Self)가 된 것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이런 변화를 의식 상태로 설명하면, 일상의 이분법적 의식 세계에서 벗어나 초이분법적 의식의 세계로 들어감을 의미한다. 꽉 막힌 자의식에서 탁 트인 우주 의식(cosmetic consciousness)으로 변한 것이다.

과거의 자신을 버리고 새로운 자신을 만들기 위해 자신은 스스로를 나비가 고치를 버리듯이, 새가 자신을 감싸는 알을 깨고 나오듯이 과거의 ‘자아’를 유기해야 한다. 우리는 그런 행위를 '무아'(無我) 혹은 ‘비움’이라고 말한다. 힌두교 경전 <<우파니샤드>>에서도 우주적인 자아가 바로 진정한 자아, 진아(眞我), '참나'라고 말한다. 힌두교 스승이 학생에게 무화과 열매를 가져왔다. 스승은 학생에게 무화과 하나를 갈라보라고 말한다. 그리고 묻는다. “너는 그 안에서 무엇을 보느냐?” 학생은 “수많은 씨가 보입니다”라고 대답한다. 스승은 조그만 씨 하나를 다시 열어보라고 시킨다. 그리고 다시 묻는다. “너는 그 안에서 무엇을 보느냐?”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에 스승이 말한다. “네가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으로부터 이 커다란 무화과나무가 자라났다.” 그 없음이 있음의 원천이다.

커다란 무화과나무가 상징하는 온 우주인 ‘브라흐만’(Brahman)은 눈이 보이지 않은 개개인의 마음속에 있는 진정한 자아라는 대문자 ‘아트만’(Atman)에서 출발했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에서 ‘그 자신(3인칭)’은 우파니샤드의 ‘브라흐만’이다. 그는 매일 아침 우주와 자연이 자신에게 부여한 의무가 무엇인지 깊이 묵상했다. 3인칭은 그가 열망하는 자신의 모습이자, 그가 존경하는 신이며, 그의 삶의 원칙인 자연의 조화와 이성이다.

"오상아"는 옛 자아가 죽고 진정한 새 생명이 태어나는 것이다. 옛 나를 장사 지내고 새로운 내가 무덤에서 나오는, 깊은 의미의 죽음과 부활이다. 근본적인 의식의 변혁을 그리스어로는 메타노이아라 한다. 장자의 다른 표현으로 하면, 心齋(마음 굶김, 마음 비우기)이나 坐亡(앉아서 잊어버림)과 궤를 같이한다. Cogito ergo Sum(=Je pense, donc je suis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대신 '나는 잊었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Obliviscor, ergo, sum),'가 된다. 내 일상의 이분법적 고정 관념을 버릴 때 진정한 나, 온전하게 된 내가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이다.

몸이 마른 나무 같이, 마음이 죽은 재와 같이 되었다는 말을 사자성어로 고목사회(槁木死灰)라 한다. 고목사회는 불교에서 말하는 지관(止觀)이라는 명상법을 상기시킨다. 불교에서는, 명상을 할 때 몸과 마음이 완전히 정지(停止)한 상태를 유지하라고 가르친다. 이를 산스크리트어로 '사마타'라고 한다. 그러면 거기서 사물에 대한 직관(直觀)과 통찰이 생기게 되는데, 이것을 산스크리어로 '비파샤나'라고 한다. 마음과 몸이 완전히 조용하게 가라앉은 것이 정(定)이고, 그렇게 되어 눈이 밝아진 것이 '혜'이므로 이를 정혜(定慧)라고도 한다. 이른바 삼매(三昧)와 반야(般若)이다. 이런 상태가 되면, 자기를 잃어버리고 비운 상태, 이른바 상아(喪我), 무아(無我), 망아(忘我), 망기(亡己)라는 자기 초월의 경지에 들어가 비로소 하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특수 인식 능력(特殊 認識 能力)의 활성화(活性化)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곳은 우리들의 양심(良心)이다. 인간의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양심을 동양의 사유체계에서는 '무아(無我)"라는 이름으로도 부르기 때문이다. 무아(無我), 내가 없음, 영어로 I'm nothing은 '너'와 '나'의 구별이 없고, 시간과 공간 개념이 없는 절대계에 들어가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나'라는 것이 조금이라도 내 마음에서 일어나면, 그때부터 '욕심(欲心)' 세계가 시작된다.

경전들에 의하면, 이 양심은 쨀램(tzelem), 프시케(psyche), 이마고(imago dei), 푸르샤(purusha), 아트만(atman), 신적인 불꽃(divine sparkle)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이름이 다르다 하더라도, 양심은 그것을 소유한 자가 소중하게 여기고, 갈고 닦을 때 비로소 빛을  발하는 원석(原石)이다.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밝혀주는 등불이 된다. 양심은 거친 자신을 응시하고, 버려야 할 자신을 절제하고 흠모할 만한 자신을 훈련할 때, 서서히 만들어지는 그 사람만의 개성(個性)을 만들어 주는 DNA이기도 하다.

그래 좀 부족해도, 그 부족함을 받아들이고 싶은 아침이다. 한 방울의 물도 떨어뜨리지 않는 항아리는 황무지를 만든다. 참 기가 막힌 문장이다. 옛말에 등 굽은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고 했다. 이와 비슷한 말이다.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도 살지 못하듯, 사람도 너무 완벽하면 피곤하다. 좀 부족한 듯 사는 인생이 인간 답게 사는 인생이다. 그래 오늘 아침 시는 <곡선을 기르다>이다. 너무 직선은 자연이 아니다.  구글에 ‘곡선’이라는 단어를 넣었더니, 평소 좋아했던 박기호 신부님의 이런 글이 나온다. “자연은 곡선의 세계이고, 인공은 직선의 세계이다. 산, 나무, 계곡, 강, 바위, 초가집…… 그 선은 모두 굽어 있다. 아파트, 빌딩, 책상, 핸드폰…… 도시의 모든 것은 사각이다. 생명이 있는 것은 곡선이고, 죽은 것은 직선이다. 어쨌든 도시나 산촌이나 사람만은 곡선이다. 아직은 자연이다.”

곡선을 기르다/오새미

곡선을 기르는 나무
잎사귀나 꽃은
직선이 없고 곡선만 있다
무성한 줄기로 슬픔과 배려를 기르며
숲도 달빛도 동반자라고 가르친다

직선을 선호하는 사람
꺾일 수도 떨어질 수도 있어
엄마 젖을 먹으며 자라는 아기를
곡선으로 기른다

둥지 잃은 산새와
비바람에 쓰러지는 풀잎의 울음
둥글게 드리운 산그늘이 감싼 붉은 이슬
곡선이 아니고는 품을 수가 없다

나무를 가꾸며 꽃을 피우고
사람까지 키우는 곡선

봄 산을 오르다 무더기로 피어난
제비꽃과 철쭉에 멈춰서는 발걸음
햇살의 그림자와 바람의 손길

눈앞이 곡선의 세상이다

인간은 자신의 양심의 존재를 모르거나 그것을 방치하면, 다른 사람들이 정해 놓은 규율에 쉽게 복종한다. 그 이유는 지적으로 게으르거나, 남들이 다 그러기 때문이다. 아니면 인간의 또 다른 본능인 욕심 때문이기도 하다. 데이비드 소로(19세기 미국 사상가)의 말에 따르면, 단체(국가, cprporation)는 양심이 없다. 그러나 양심이 있는 사람들이 모인 단체(국가)는 양심을 소유한다. 법은 결코 인간을 정의롭게 만들지 못한다고 했다. <시민불복종>>이라는 책에서 한 말이다. 그리고 이런 말도 했다. "시민들이여, 당신들은 자신의 양심을 포기하고 국가의 법을 따릅니까? 저는 '인간(men)'이 먼저 되어야 합니다. 그런 후 누구의 종속을 받는 자(subject)가 될 수도 있습니다. 법에 대한 존경을 장려하는 문화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제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의무는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언제라도 하는 것입니다."

숙고로 무장한 양심이 있는 시민들이 만든 공동체에서 민주주의는 자신의 이익에 눈이 먼 수많은 욕심쟁이들의 난장판일 뿐이다. 지금 한국의 문제는 가짜 뉴스가 문제이다. SNS 강국이다 보니, 극단적인 자극을 추구하는 대중이 한 순간에 매료될 만한, 검증되지 않은 뉴스를 매 순간 생산해 낸다. 누구나 양심을 버리고 마음만 먹으면, 자신이 싫어하는 대상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고 일방적으로 왜곡된 야야기를 만들고, 그걸 확산시킬 수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일부는 그걸 자신의 이익, 즉 돈 벌이 수단으로 생각한다. 자기가 만든 가짜 뉴스가 대중들에게 끼칠 해악은 생각하지 않고, 순전히 사적 이익에 함몰되어 있는 양심이 없는 사람들의 행위들이다.

어쩔 수 없다. 방법은 솔제니친이 말한 것처럼, 양심적이고 용감한 개인이 되기 위한 첫 걸음은 거짓말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다. 또 그에 의하면, 개인의 양심이 전체주의 국가권력을 무너뜨릴 유일한 힘이라고 했다. 독재자들은 모두 개인이 아니라, 집단의 힘을 신봉하고 이용하고 과시하였다. 독재 권력은 그래 개인들을 파편화 시키려고 애를 쓴다. 문제는 집단주의가 사실은 실체가 없는 무형이다. 집단이라는 용어는 허울만 존재하지 실제로는 수많은 개인들의 이익을 대변한 금방 허물어질 어설픈 최소 공배수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동일한 집단 이데올로기는 없다. 정치 집단들의 행태들을 봐라. 그들의 이합집산을 봐라. 거기에는 수많은 집단주의자들의 이론이나 교리만 존재할 뿐이다. 그 집단 안에 존재하는 비주류는 자신의 우상만을 숭배하고 경쟁자인 다른 비주류의 우상을 파괴하려고 달려든다. 우리나라 정치 집단들의 민 낯이기도 하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말이다. 인간은 '도시 안에 거주하는 동물(zoon politikon)'이다. 인간은 공동체를 만들고, 그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를 바라는 집단주의적 유전자를 소유한다. 인간은 외딴 섬에서 홀로 살 수 없다. 인간은 다른 인간들과 소통하고 도모하여 공동체를 만들어 문화를 공유하고 문명을 향유한다.

공동체는 여러 사람들의 모임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성이 존재할 때, 만들어지는 전체이다. 그렇지 않으면, 공동체(집단)을 장악하려는 소수가 한 사람, 함 사람 교묘하게 세뇌시킨다. 그러니 개인이 자신의 양심을 갈고 닦아 자립하는 인간으로 스스로 훈련하지 않는다면, 그는 늑대를 따르는 양으로 전락하여 비참한 운명을 만날 것이다. 이 문제를 칼 융이 잘 말하였다. 그는 국가를 '순응하는 양들의 모임'이라고 진단하였다. 그 양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뽑은 리더가 자신들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믿는다. 융은 "목자들의 지팡이는 철퇴가 되고, 목자들은 늑대로 변질된다"고 경고하였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깨어 있어야 건강한 국가가 된다. 그래 중요한 것이 교육이다. 자신의 양심의 발견이 깨달음이며, 양심의 훈련이 교육이기 때문이다. 자신만의 양심에 복종하는 행위가 자유이며, 다른 사람의 양심을 경청하는 행위가 배려이며 친절이다. 자신의 심연을 들여다본 적이 없어, 양심의 존재를 모르는 상태가 무식이며, 자신의 양심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 언행이 수치(羞恥)이다. 남의 이야기를 듣기 보다, 자신의 양심의 소리를 듣는 오늘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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