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이틀동안 난 경계를 넘어서 일상을 제압하지 못했다. 긴 죽음의 시간에서 다시 부활한 아침이다. 인간은 습관으로 만들어진 자신을 바꾸려 시도하지 않는 보수적인 동물이다. 그래 니체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스스로 만든 불길에서 언제나 태울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만일 당신이 먼저 재가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다시 분연히 일어날 수 있는가?"(『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마지막으로 "산상수훈 팔 복" 증 끝인 제 8복 이야기를 공유하고, 행복의 비밀을 해부하려 한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고 차동엽 신부님은 이 구절이 "팔 복"의 절정에 해당한다고 말씀하시며, "여기서 핵심은 순교가 아니라 사랑이다. 사랑의 에너지가 없는 사람은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을 수가 없다"고 하셨다. 그리고 여기에 "행복의 역설적인 비밀이 있다"고 하셨다. "박해 받음의 상징은 십자가이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을 보면서 유대인들은 '돌팔이 메시아'라고 했고, 그리스 인들은 '어리석다'고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들은 십자가에서 약함이 아니라 강함을 봤다. 죽음이 아니라 부활을 봤다." 그리고 이 강함은 "몰아(沒我)적인 사랑에서 뿜어져 나온, 죽음도 이기는 힘이다. 결국 시련과 고통, 박해를 이기는 건 사랑의 힘"이라고 덧붙이셨다.
부활을 장자가 말한 "오상아(吾喪我)"로 풀이하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유기체의 감각에 매몰되어 만들어진 편협한 ‘나’를 죽이고, 항상 변하는 세상을 받아들여 기억하고 느끼며 세상과 하나되는 ‘나’를 살려내는 것이다. 1년에 한 번이, 한달에 1번으로, 한달에 한번이 매일 1번으로, 매일 한번이 시시각각으로 편협한 ‘나’를 죽이고 세상과 하나인 ‘나’를 살려낼 수 있을 때, 물질을 지배하며, 자연을 재구성할 수 있는 힘을 깨달으며 진정한 부활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나의 마음(心)을 빼내면(咸), 타자를 인식할 수 있는 살아있는 마음인 감성(感性)이 생겨, 자존심(心)으로 똘똘 뭉친 아(我)가 죽고 자존감(感)이 충만한 오(吾)로 부활한다 싶다." (이순석)
왜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 되나? 차신부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믿음과 소망, 사랑이 있다. 그 중에 왜 사랑이 제일인가. 믿음과 소망은 완성된 후에 사라진다. 그러나 사랑은 다르다. 완성된 후에도 지속된다. 영원히 지속된다. 결국 셋 중 사람만 남는다. 사랑은 하늘 나라의 것이다." 랍비 힐렐의 가르침은 "자기 자신에게 해가 되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말라!"이다. 이를 황금률이라 한다. 예수의 황금률은 더 적극적이다.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 그러면서 예수는 '하늘나라'는 내가 있는 이 시간과 이 장소에서 황금률을 실천할 때 그 곳이고, 거기서 사랑을 받는 상대방이 바로 신이 된다고 주장한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시구가 나오는 T S 엘리엇의 <황무지>라는 시를 다 읽으려면 아주 길다. 그런데 그 시를 요약하면 이런 말이다. "살아도 죽은 상태로 어정쩡하게 있지 말고 아예 죽으라. 그럼으로써 부활하라." 내가 좋아하는 담론이다. 술을 마시는 이유도 죽기 위해서이다. 왜? 그래야 다시 부활하니까.
이 시는 본격적인 시가 시작되기 전에 다음과 같은 글귀로 시작한다. "나는 쿠마이의 무녀가 항아리에 달려 있는 것을 내 눈으로 보았소/아이들이 시빌레에게 "소원이 뭐냐?"고 물으니, 시빌레는 그리스 말로 "죽고 싶소"고 대답하더란다." 태양신 아폴론의 사랑을 받던 무녀 시빌레가 있었다. 신에게 오래 사는 것을 소원으로 말해 얻어 냈지만, 늙지 않고 오래 살기를 말하지 않아, 그 무녀는 한없이 늙어가면서 죽지도 못하고 끝내는 쪼그라들어 항아리에 들어갈 정도가 되었다. 아이들이 무녀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묻자, 그 무녀는 "죽고 싶다"고 말했다.
죽어야만 재생의 희망이 있다. 죽음은 정화를 가져온다. 정화라는 말에 방점을 찍는다. 서양어로 말하면, '카타르시스'일까? 마음의 때, 영혼의 때를 벗기는 일이 아닐까? 봄의 부활은 땅의 때를 벗기는 일이요, 예술을 통해 때를 벗기는 것은 사람의 영혼의 때를 벗기는 일이요, 신의 죽음과 부활은 세계를 정화하는 일 같다. 신의 죽음으로 세계는 정화되고, 신의 부활과 함께 새로운 풍요가 찾아오기 때문이다. 신은 죽을 때 세상의 모든 때, 재해와 죄악 등 모든 나쁜 것을 짊어지고 죽기 때문이다.
엘리엇은 부활을 위해서는 먼저 죽어야만 한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정신적으로 반쯤 죽은 채 계속 살아가는 것은 무녀의 쪼그라드는 삶과 다를 바 없다. 정신의 완전한 죽음과 부활은 결국 극도의 고통을 동반한 성찰과 기존의 패러다임의 전복을 통해 이루어진다. 개인도 마찬가지이지만, 우리 사회도 지금 절실히 필요하다.
지금까지 몇일 동안 신약성서의 한 기둥인 "산상수훈 팔 복"을 좀 치밀하게 해부해 보았다. 끝으로 고 차동엽 신부님의 말씀을 인용한다. "예수님께서 기다리시는 건 입술을 통한 대답이 아니라 삶을 통한 대답이다. 그 구체적인 대답의 지침서가 바로 산상수훈의 팔 복이다." 혼(魂)을 초대하여, 다시 일상의 삶을 되돌아 보는 기회의 시간들이 되었으면 한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처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삶과 죽음을 넘어서서 내게 온다.
초혼(招魂)/김행숙
위와 아래를 모르고
메아리처럼 비밀을 모르고
새처럼 현기증을 모르는 너를 사랑해
나는 너를 강물에 던졌다
나는 너를 공중에 뿌렸다
앞에는 비, 곧 눈으로 바뀔 거야
뒤에는 눈, 곧 비로 바뀔 거야
앞과 뒤를 모르고
햇빛과 달빛을 모르고
내게로 오는 길을 모르는,
아무 데서나 오고 있는 너를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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