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내가 제일 좋아하는 소설이 <그리스인 조르바>이다. 그 소설에서 조르바의 사랑은 언뜻 보아 ‘바람둥이 사랑’지만, 진짜 사랑이다. 그의 손길이 닿으면 혼자 된 여자의 쭈글쭈글한 주름이 펴지면서, 생의 가장 빛나던 시절로 돌아가게 한다. 세탁소 아낙이 내 양복의 주름을 다 가져가듯이.
조르바에게는 지금 이 순간 살아 움직이는 몸뚱이, 그 자체로 충분하다. 지금 여기서 하고 있는 그 일에만 집중한다. 무엇을 하던지 간에. 밥 먹을 땐 밥만 생각하고, 걸을 때는 걷는 것만 생각한다. 정현종 시인도 그런단다. 세탁소 아낙도 '하얀 스팀"을 뿜어내며 주름 펴는 일만 생각한다.
조르바는 광산 사업의 실패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춤을 춘다. 그 춤은 무게를 극복하려는 인간의 처절한 노력으로 비친다. 그리고 그 춤 속에는 해방이 있다.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해방이 아니다. 기대하거나 희망하는 마음으로부터 벗어남이야말로 진정한 해방이다. 시인 동네 세탁소 사내와 아낙은 조르바이다. 춤을 춘다. "세탁, 세탁" 하면서.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손택수
명절 앞날 세탁소에서 양복을 들고 왔다
양복을 들고 온 아낙의 얼굴엔
주름이 자글자글하다
내 양복 주름이 모두
아낙에게로 옮겨간 것 같다
범일동 산비탈 골목 끝에 있던 세탁소가 생각난다
겨울 저녁 세탁, 세탁
하얀 스팀을 뿜어내며
세탁물을 얻으러 다니던 사내
그의 집엔 주름 문이 있었고
아코디언처럼 문을 접었다 펴면
타향살이 적막한 노래가 가끔씩 흘러나왔다
치익 칙 고향역 찾아가는 증기기관차처럼
하얀 스팀을 뿜어내던 세탁소
세상의 모든 구불구불한 골목들을
온몸에 둘둘 감고 있다고 생각했던 집
세탁소 아낙이 아파트 계단을 내려간다
계단이 접혔다 펴지며 아련한 소리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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