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전 오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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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1년 11월 26일)
어제는 내 생일이었다. 한국 나이로는 63세이고, 만으로는 62세이다. 그러나 만 61세였던 '환갑' 때에 다짐했다. 세상살이를 한 바퀴 돌았으니 이젠 다시 되돌아 갈 거라고. 그래 오늘부터는 만 58세, 한국 나이로는 57세이다. 다시 말하면 새롭게 시작하는 한 살이다. 많은 분들이 축하 메시지를 보내주셨다. 이 자리를 빌어 모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그런데 생일을 핑계로 이틀동안 '주님'과 함께 달렸더니, 힘들다. 그리고 몸에도 이상이 왔다. 이젠 좀 절제하여야 할 시간이다.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를 쓴 전 이대 교수이시며 정신과 의사이셨던 이근후 교수가 작년에 <어차피 살거라면, 백살까지 유쾌하게 나이 드는 법>이란 책을 내셨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은 마지막까지 유쾌하게 살아야 한다. 사소한 기쁨과 웃음을 잃어버리지 않는 한 인생은 무너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즐거움은 마음만 먹으면 주변에서 언제든지 찾을 수 있다."
책 표지에 이렇게 쓰여 있다. "인생의 비극 앞에서 웃을 수 있는 사람은 절망할지 언정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그래 나는 아침마다 <인문 일기>를 쓴다 그 이유는 이 시대에 대해, 내가 훈련 받은 '생각하는 능력'으로 갖게 된 어떤 '시각'으로 내 삶의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내 글을 통해, 사람들이 나에 대한 기억을 토대로 더 나은 무언가를 시도해 볼 수 있는 플랫폼이 되었으면 한다. 내가 이 세상에 다녀갔기 때문에 모두가 더 행복해지고, 더 건강해지고 더 깨끗해 졌으면 한다. 이 플랫폼이 있었기 때문에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과감하게 도전하는 젊은이들이 많았으면 한다. 우리가 세상에 남길 수 있는 흔적은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남기는 좋은 기억들이었으면 한다. 내가 죽은 후에 누군가 나로 인해 사는 게 조금은 행복해졌다고 말해 준다면 그보다 값진 삶이 또 있겠는가? 생일에 했던 다짐이다.
나는 다섯 가지의 "유'를 좋아한다. 그리고 그걸 지향한다. (1) 자유(自由) (2) 사유(思惟) (3) 여유(餘裕) (4) 온유(溫柔) 마지막 다섯 번째가 YOU(당신)이다. 인간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자신이 왔던 흙으로 다시 돌아간다. 그 사실과 진리를 깨달은 인간은, 한정된 시간에 자신의 최선을 발휘되는 전략을 짠다. 유한함에 대한 아쉬움이 인문-과학-예술이다. 인간은 자신이 아닌 타자들, 타인과 자연과 함께 살기 위해 ‘문화(文化)’를 구축하였고, 그 문화를 가시적인 성과로 표현한 것이 ‘문명(文明)’이기 때문에 마지막 YOU가 중요하다.
"타자 윤리학"을 말하는 프랑스 철학자 엠마뉴엘 레비나스는 이런 말을 했다. "타자는 나에게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얼굴로 나타내는 현현(epiphany)에 의해 나에게 의무를 지운다." 이러한 의무에 따라 타자로 향한 정향성으로 말미암아 인간 간의 유대와 연대가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이 레비나스의 주장이다. 그는 "제대로 된 정의는 타자로부터 시작 된다"고 말했다. 오늘은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싶다. 다들 마스크를 쓰기 때문에 "얼굴로 나타나는 현현"을 느끼지 못해 그런지 점점 더 세상이 삭막하다.
한 마디만 더 한다. 위에서 말한 '현현(epiphany)'이란이 어렵다. 이 말은 평범하고 일상적인 대상 속에서 갑자기 경험하는 영원한 것에 대한 감각 혹은 통찰을 뜻하는 것이다. 원래 'epiphany'는 그리스어로 '귀한 것이 나타난다'는 뜻이며, 기독교에서는 신의 존재가 현세에 드러난다는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
언젠가 내가 좋아하는 권선필 교수가 페북에서 말한 문장을 적어 둔 적이 있다. 오늘 다시 꺼내 공유한다. "세상과 이웃을 돌봐야 할 이들은 온통 다른 그 누구만 떠올린다. 그가 돌봐야 한다고. 조금 더 지적인 사람은 제도와 구조를 가지고 복잡하게 설명한다. 이웃과 생명에 대한 책임에 대하여. 선이 비워진 자리엔 악이 그득하고, 그 악은 제가 악인 줄 모른 채 삼킬 자를 찾기에 바쁘다. 서로를 돌보지 않는 세상은 그렇게 더욱 춥고 쓸쓸해 진다."
내 "곁"에 있는 이웃이 누구입니까? 여기서 이웃은 나하고 가까운 사람이기도 하고, 나와는 상관 없는 낯선 자 혹은 동물이나 식물이기도 하다. 낯선 자는, 내가 그에게 사랑을 베풀면, 그 낯선 자는 자신의 본래 모습을 드러낸다. 그 본모습이 '신'이라고 배철현 교수는 자주 말한다. 나의 사랑이, 그 낯선 자를 신으로 둔갑시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내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 때, 그 가운데서 '신'이 등장하는 것이다. 오늘 아침 시는 류미야 시인의 것이다. 짧지만 긴 여운을 남긴다. 이 시와 함께, 새로이 시작하는 57세의 새날에 나는 내 주변에 있는 "곁"을 되돌아 본다.
곁/류미야
상자 속 귤들이 저들끼리 상하는 동안
밖은 고요하고
평화롭고
무심하다
상처는
옆구리에서 나온다네, 어떤 것도.
그리스의 광장인 '아고라', 이것이 로마로 오면 '포럼(Forum)'이 된다. 이곳에서는
▪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고,
▪ 정제되고 절제된 자신의 생각을 잘 개진하고,
▪ 최선의 생각에 승복하는 문화가 있었다.
자신의 주장이 편협한 편견이란 사실을 모르고 말을 쏟아내는 ‘정치 지도자'를 꿈꾸는 사람들이 미디어를 통해, 국민의 정서를 점점 각박하게 만든다. 오히려 침묵했으면 한다. 침묵은 자신의 언행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에 대한 감사 표시이고, 언행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준비 단계이다.
그런데 당시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철학이 소크라테스를 죽인다. 어떻게? 소크라테스는 다수결원칙을 선이라고 착각하는 왜곡된 민주주의인 중우정치(衆愚政治, 이성보다 일시적 충동에 의하여 좌우되는 어리석은 대중들의 정치를 말한다. 고대 그리스 민주 정치의 타락한 형태를 이르던 말로서 민주 정치를 멸시하는 뜻)와 인기주의의 희생양이 되어 법정에서 독배를 마시고 순교 당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거침없는 말과 행동을 용기(勇氣)라고 착각하고, 그런 집단행동을 민주주의(民主主義)의 발판이라고 호도(糊塗, 풀을 바른다는 뜻으로 명확하게 결말을 내지 않고 일시적으로 감추거나 흐지부지 덮어 버린다는 뜻)한다.
따라서 지중해 인들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대신할 새로운 사상을 모색한다. 그 때 등장한 인물이 마케도니아 출신의 아리스토텔레스와 알렉산더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와 인간의 삶을 두 개로 구분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선과 악, 정의와 불의, 아름다움과 추함은 서로 섞일 수 없는 독립적이며 개별적인 개체가 아니라, 이런 구분은 생각에서만 존재하는 허상이라고 믿었다. 인간의 삶을 조절하는 중요한 가치와 해악의 구분은 모호하다. 선과 악의 경계는 희미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구분의 문제가 아니라 정도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여기서 나를 평화롭게 하는 통찰을 얻었다.
"각자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두개의 대립되는 가치의 정도와 경중을 깊이 관찰하고 측정하는 과정인 "세오리아(theoria)"를 통해 그 대상에 대한 가치가 측정된다는 것이다. 만일 A라는 사람이 악인이라면, 그는 악의 화신이 아니라, 그 사람에서 악이 차지하는 비율이 선이 차지하는 비율보다 높은 것이고, 만일 B가 착한 사람이라면, 그는 자신으로부터 나쁜 요소들을 제거하길 힘쓰고 선을 지향하는 과정 중에 있을 뿐인 것이다."(배철현) 너무 이분법적으로 나누지 않고, 선한 사람은 선한 부분이 51%이고 악한 부분이 49%일 수 있다고 생각하니, 세상과 사람들을 다르게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관조(觀照)하는 힘이 생겼다.
동일한 사물이나 사람을 깊이 응시하고 자신이 사라지는 상태로 진입하는 단계를 우리는 '관조'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관조’를 인간 삶의 최선이라고 말한다. 그리스어로 ‘쎄오리아’라고 부르는데 ‘이론’을 의미하는 영어단어 'theory'는 이 단어에서 파생했다. ‘이론’이란 한 대상을 반복적으로 인내하며 볼 때 슬그머니 자신의 속 모습을 드러내는 그 어떤 것이다. 이론이란 고착된 편견이나 굳어진 도그마가 아니다.
더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자신에 어울리는 생각, 말 , 행동을 '중용(中庸)'이라고 말한다. 그 반대가 "무절제(無節制)'이다. 무절제를 글자 그대로 하면, ‘절제하지 못하는 무기력’이다. 자신의 말과 행동을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는 죄다. 인간은 교육과 훈련, 그리고 스스로의 수련을 통해 짐승의 상태에서 서서히 벗어나 개화된 인간, 승화된 인간, 혹은 신적인 인간으로 탈바꿈한다. 인간은 자신을 가만히 응시하여, 자신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욕망을 절제하지 못한다면, 짐승이나 마찬가지다. 선은 중용이고, 악은 모자람과 과함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 품격의 원칙은 중용을 지키지 못하는 상태, 혹은 중용이 부족하거나 과도한 상태를 ‘무절제’라고 불렀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개인 제자인 알렉산더는 기원전 3세기에 자신이 정복한 속국들을 하나의 문화로 통일하고 싶어 했다. 그 문화를 우리는 ‘헬레니즘’이라 부른다. 헬레니즘은 무엇보다도 그리스어를 국제공용어로 통용하고, 그리스 사상,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제국의 바탕으로 강요하였다.
그때 유대 어린이들은 학교에서 아람어가 아니라 그리스어로 교육받으면서, 점차로 그들이 소중하게 생각했던 유대인 정체성의 상실 위기에 봉착하였다. 언어를 잃어버리면, 자신의 정체성도 잃는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신 유대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혁신한다. 유대사상의 핵심은 더 이상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책’인 ‘성전(聖典)’이 아니라,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이 성전에 대한 공부라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경전에 대한 공부를 『‘탈무드(Talmud)』라고 불렀다. 『탈무드』는 경전의 내용이 아니라, 그 내용에 대한 ‘나의 해석(解釋)’이다. 해석은 구전을 통해서 분서갱유(焚書坑儒)할 수 없는 내용이다. 해석은 인간의 ‘마음이라는 서판(書板)’에 새기고 그것을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옮길 때 완성된다. 중요한 말이다. 말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 완성된다. 그것을 '해석'이라 불렀다. 『탈무드』는 그들의 경전구절에 대한 깊은 묵상이며, 그 묵상에 대한 해석이며, 그 해석에 대한 행위다.
글이 길어지니, 여기서 멈추고, 내일 이 야기를 더 끌고 가고 싶다. 그래도 나의 영혼의 근육을 키우는 이 말은 공유하고 싶다. 배철현 선생이 여러 번 말하고 있는, 기원후 2세기 『탈무드』에 등장하는 <선조들의 어록>에 등장 하는 벤조마의 해석이다.
▪ 누가 현자인가? 모든 사람으로부터 배우는 사람이다.
▪ 가 권력자인가? 자신의 사악한 충동을 제어하는 사람이다.
▪ 누가 부자인가? 자신이 소유한 것을 기뻐하는 사람이다.
▪ 누가 명예로운 자인가? 타인을 명예롭게 하는 사람이다.
곁에 늘 두고 싶은 문장이다. "현자가 되고 싶습니까?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배우십시오. 권력을 잡고 싶습니까? 당신의 충동을 극복하십시오. 부자가 되고 싶습니까? 당신이 가진 것을 헤아리고 즐거워하십시오. 명예를 얻고 싶습니까? 타인을 존경하십시오."(배철현) 그렇지만 사실 오늘 아침에 하고 싶었던 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관조', '중용'이다. 선과 악의 경계를 너무 뚜렷하게 긋지 말고, 정도와 경중의 문제로 보며, 각자 처한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는 일이라 생각되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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