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0.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11월 22일)
어제에 이어, 오늘도 노자가 꿈꾸는 이상형은 '성인(聖人)'의 모습들을 살펴본다. 지난 수요일 대구에서 했던 강의 내용이다.
중후함과 고요함: 重靜(중정)-제26장
노자가 꿈꾸는 성인(리더)은 조급하고 가볍게 굴기보다 중후하고 고요하게 행동한다. 성인은 직접 나서서 명령하고 지시하며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세상이 저절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한다. 무위(無爲)를 실천하며, 불언(不言)으로 가르친다.
“重爲輕根(중위경근) 靜爲躁君(정위조군): 무거운 것은 가벼운 것의 뿌리가 되고, 안정된 것은 조급한 것의 머리가 된다”에서 나온 말이다. 다르게 말하면, '무거움은 가벼움의 뿌리이고, 조용함은 조급함의 임금이다.' '중(重, 무거움, 중후함)'과 '경(輕, 가벼움, 경솔함)'에서 '자중(自重)'과 '경솔(輕率)'을 말할 수 있다. '자중(自重)하다'는 말은 '말이나 행동, 몸가짐 따위를 신중(愼重)하게 한다'는 뜻이다. 중(重)이 무게라는 말이다. 중심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지구의 중력과 함께하며 낮게 깔려가며 무겁게 흘러가는 것 같이 말이다. 반대가 지구의 중력을 벗어나 가벼움으로 흩어지는 것 아닐까? 우리는 그것을 '경솔하다'고 말한다. 사전에서 경솔(輕率)은 '말이나 행동이 조심성 없이 가벼운 것'을 말한다.
공자도 경솔함과 조급함을 경계했다. 성인은 하루 종일 움직여도 '무거움'으로부터 벗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특히 리더는 가볍게 움직이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경솔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신중하고, 자중하는 길은 절제할 줄 아는 것이다. 절제는 할 수 없어서 참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을 때 참는 것이다. 고대에 군주가 궁궐 밖으로 행차를 할 때는 항상 군주가 탄 수레의 뒤에 '치중(輜重)'이라는 무거운 짐수레를 달고 다녔다고 한다. 군주는 항상 신중하여 함부로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경계하기 위한 것이었다. 자중한다는 것은 지구의 중력과 함께 하며, 우주의 진리에 순종한다는 것이다.
'자중(自重)하다'는 말은 '말이나 행동, 몸가짐 따위를 신중(愼重)하게 한다'는 뜻이다. 중(重)이 무게라는 말이다. 중심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지구의 중력과 함께하며 낮게 깔려가며 무겁게 흘러가는 것 같이 말이다. 반대가 지구의 중력을 벗어나 가벼움으로 흩어지는 것 아닐까? 우리는 그것을 '경솔하다'고 말한다. 사전에서 경솔(輕率)은 '말이나 행동이 조심성 없이 가벼운 것'을 말한다.
'자중하다'라는 말에는 '자기를 소중히 하다'라는 뜻도 있다. 그러니까 경솔한 행동은 자신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데서 나오는 것 같다. 나를 사랑한다면서, 자신의 삶을 가볍게 날리면 안 된다. 자기 규칙이 있어야 한다. 난 술의 유혹에 너무 약하다. 술에 취하면, 난 내 몸과 마음이, 가볍게 흔들리는 깃발처럼, 펄럭거린다. 그것이 영혼의 자유는 아니다. 자유는 고통스럽고 힘든 뒤에 찾아온다. 김수영의 <푸르는 하늘을>이라는 시에서 말하는 것처럼, 희생을 치르지 않은 자유는 무의미하다.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노고지리가 자유로웠다고/부러워하는/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사람이 '자중'하지 못하면, 중후하고 찰 진 토양을 지키지 못하고 점점 푸석푸석해져 풀풀 표류하게 된다. 와인도 그렇다. 목구멍을 낮게 미끄러져 가는 와인이 있다면, 풀풀 날리는 푸석푸석한 와인이 있다. 찰 지지 못하다고 한다. 밥도 그렇다. 찰 진 밥과 날리는 밥이 있다. 나는 그런 와인과 밥을 날린다고 표현한다. '날라리'도 이런 의미인가? 갑자기 영감이 지나간다. '언행이 어설프고 들떠서 미덥지 못한 사람을 낮잡아 이른 말'이 '날라리'이다. 이 '날라리'도 찰 지지 못하고, 푸석푸석 나르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오늘도 말을 하고 행동을 할 때, '풀 바디' 와인처럼, 날리지 않도록 하고 싶다. 그러니까 한 번 더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할 생각이다.
우리의 뇌(특히 좌뇌)는 항상 재잘거린다. 한순간도 쉬지 않고 뭔가를 떠들어 댄다. 그러면서 생각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그러면서 가벼워진다. 그래 우리는 이 산만함에 맞서는 훈련을 해야 한다. 그것이 수렴과 집중이다. 이 또한 인문정신을 고양시키는 일이다. 요즈음 자신의 '넘쳐나는' 힘을 절제하지 못해, 원심력에 의지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 배철현 교수가 그런 사람들을 잘 표현해 주었다. 많이 먹고, 마시고 해서 힘을 절제하지 못해, 원심력에 의지하는 "사람은 중독을 유발하여 결국 자신을 파멸시키는 쾌락, 자극, 새로운 것을 항상 하이에나처럼 찾아다닌다. 쉽게 웃음과 울음을 자아내는 촌극을 감동이라 평가하고, 세네카의 구심력 찬양문구인 ‘카르페 디엠(carpe diem)을 건배사로 착각하고 니체의 고통을 삶의 일부로 수용하라는 혜안인 ‘아모르 파티(amor fati)'를 노래방 춤쯤으로 여긴다. 원심력에 경도되어 있는 사람은 힘이 없고 불안하고 산만하다."
반면, 원심력을 구심력으로 제어하기 위해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힘이 있다. 그런 힘을 가지기 위해서는 원심력의 과시를 희생하여야 한다. 나는 이 구심력과 원심력의 조화를 위해, 아침 마다 <인문 일기>를 쓴다. 자꾸 밖으로만 출렁이는 생각과 본능에 영향을 받는 사람은 무기력하지만, 그것들을 제어하고 조절하여, 그 힘을 비축하는 사람은 강력하고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그 원심력을 제어하고 조절하는 힘은 인문정신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인간의 욕망은 원심력의 속성이 있다. 반면 인간의 본성은 구심력(중력)의 속성이 있다. 욕망은 점점 더 커지고 높아지려 하기 때문이다. 원심력을 타고 자신의 본성을 이탈하려는 욕망을 중심 쪽으로 끌어내리려고 절제하는 태도가 검소함이다. 그걸 우리는 '자중하다'고 한다. '자중하다'라는 말에는 '자기를 소중히 하다'라는 뜻도 있다. 그러니까 경솔한 행동은 자신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데서 나오는 것 같다. 나를 사랑한다면서, 자신의 삶을 가볍게 날리면 안 된다. 자기 규칙이 있어야 한다. 사람이 '자중'하지 못하면, 중후하고 찰 진 토양을 지키지 못하고 점점 푸석푸석해져 풀풀 표류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솔은 바로 '조급(躁急)'과 '초조(焦燥)'를 낳기 때문이다. '조급'은 참을성 없이 매우 급한 거다. '초조'는 애가 타서 마음이 조마조마함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은 자연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거다. 자연은 부자연스러운 인위의 행동을 그 자체의 조화의 법칙에 의하여 차단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초조 해 하지 말고, 일상에서 조급증을 덜어내고 싶다. 오히려 마음을 비우고, 자중하며 일상을 행복하게 향유하고 싶다. 그건 하루에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해 나가는 것이다.
비우고 덜어내 텅 빈 고요함에 이르면, 늘 물 흐르듯 일상이 자연스러워질 것이다. 그런 사람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뿐 포장하지 않으며, 순리에 따를 뿐 자기 주관이나 욕심을 고집하지 않을 것이다. 그 결과 그의 모든 행위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항상 자유롭고 여유로울 것이다. 샘이 자꾸 비워야 맑고 깨끗한 물이 샘 솟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만약 비우지 않고, 가득 채우고 있으면 그 샘은 썩어간다. 물질보다는 마음의 여유를, 전체보다는 개인의 가치를 존중한다. 남보다 빨리 갈 필요도 없다. 조금 느릴지라도 꿈을 향해 살아갈 수 있는 삶, 경쟁에 밀릴까 조급 해하지 않아도 되고 꿈을 이루기 위해 남을 밟지 않아도 되는 삶이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 아닐까? 노자의 <<도덕경>>은 삶의 기술을 알려 주는 책이다. 그래 할 말이 많다.
푸른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나뭇가지 끝”에 “홍시 하나” 매달려 있다. 날짐승을 위해 따지 않고 남겨둔 까치밥이다. 자연에서 난 것을 다 취하지 않고 나누려는 넉넉한 마음이다. 까치가 쪼아먹었거나 땅에 떨어져 하나밖에 남지 않은 홍시를 시인은 아침마다 지켜봤을 것이다. 마침내 “위태위태”하던 홍시가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툭” 떨어진다. 시인의 시선은 땅이 아닌 홍시가 있던 자리에 머문다. 홍시 하나로 유지됐던 균형이 한쪽으로 기운다. 홍시의 무게에 길들었던 나뭇가지가 제자리로 돌아가자 수평선이 파르르 떤다. 출렁이는 하늘이 바다 같다. 한쪽으로 기운 감나무 저울은 불안하다. 시인은 균형과 탄력을 유지하기 위해 “빈 우듬지”에 “시 한 구절”을 내다 건다. 순간 시는 홍시가 된다. 무슨 시를 내다 걸었을까. 까치는 홍시 대신 시를 쪼아먹고, 시인은 매일 아침 감나무 가지 끝에 또 다른 시를 걸어 놓을 것이다. 사진은 며칠 전 주말 농장에 가다가 만난 감나무이다.
저울/오세영
정원의 나뭇가지 끝에
위태위태하게 매달려 있던 홍시 하나가
이 아침
툭 떨어진다.
긴장한 수평선 한쪽이 한순간 풀어지며
출렁.
푸른 물을 쏟아낼 것만 같다.
오늘부터는 그 빈 우듬지에 내 시 한 구절을
걸어 놓으리.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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