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9.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11월 21일)
노자가 꿈꾸는 이상형은 '성인(聖人)'이다. 어제는 대구에서 다음의 5 가지 주제를 가지고 <<도덕경>>에 대해 강의를 했다. 노자가 꿈꾸었던 '성인'의 모습들이다.
1. 성인은 무심한 사람이다: 聖人無常心(성인무상심)-제49장
“성인무상심”은 '마음 없이 세상 보기'이다. 성인은 자기 마음이 없는 사람이다. 융통성 없이 무엇을 고집하는 일이 없다. 대신 세상의 마음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여기서 "상심(常心)"은 고정되거나 변하지 않는 고집이 센 마음이다. 특히 리더가 상심(常心)으로 자신의 기준을 강조하고, 모든 일을 그 기준에 맞추어 하면 엄청난 참사가 일어날 수 있다. 권력의 폭력, 이념의 억압, 윤리와 도덕의 편협성은 모두 권력자의 고정된 마음(常心)에서 나오는 거다. 현실은 늘 변한다. 그 변화를 인정하고, 그 변화에 가장 적확한 답을 찾아내야 한다. 노자가 강조하는 부드러움(柔)은 말랑말랑한 리더의 마음이기도 하다. 강하고 딱딱한 리더가 아닌 부드럽고 온화한 리더가 성인에 가깝다.
세상에는 잘난(善) 사람도 있고, 못난(不善) 사람도 있다. 나를 믿고(信) 따르는 사람도 있고, 나를 믿지 못하는(不信) 사람도 있다. 성인은 마음이 없기에 모든 사람을 포용한다. 모든 것을 담는 큰 그릇(大器)과 같다. 그래서 성인의 주변에는 버려진 사람도 없고, 버려진 존재도 없다. 소외된 사람도 없고 소외된 존재도 없다. 이긴 사람도 없고, 진 사람도 없다. 성인 앞에서는 모두가 마치 어머니의 품에 안긴 아이 같다. 어머니는 자식을 차별하지 않는다. 잘난 아이도, 못난 아이도, 나를 따르는 아이도, 나를 따르지 않는 아이도 모두 소중한 자식이다. 그들을 이해하고, 보듬고, 안아주고, 밥을 퍼준다. 성인은 차별 없이 아이를 품어주는 밥 퍼 주는 어머니("食母"-20, 자신의 이익과 욕망을 위해 살 수 있음에도, 그것을 포기하고 밥 주는 어머니, 사람은 이익과 목적을 위해 인생을 살지만, 그 길을 포기하고 오로지 자식을 위해 바보처럼 살아가는 어미의 모습이 성인의 모습)이다. 노자는 리더를 자주 어머니로 비유한다.
요약하면 무심(無心)은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차별의 마음이 없는 거다. 세상을 둘로 나누어 보는 편견의 마음이 없다는 거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 없다. 실제로 내 삶의 모토는 무심하게 사는 거다.
2. 하늘과 땅은 편애하지 않는다: 天地不仁(천지불인)/聖人不仁(성인불인)-제5장
"천지불인"을 말 그대로 읽으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천지는 인하지 않다." 이보다 "하늘과 땅은 편애하지 않는다"고 하면, 좀 알듯 모를 듯하다. 나는 "하늘과 땅은 무심하다"는 해석이 제일 마음에 든다. "천지불인"과 "성인불인"은 노자의 사유체계를 대변하는 문장으로 자주 인용된다. 오강남 교수는 하늘과 땅 그리고 성인들로 대표되는 도(道)는 인간적 감정에 좌우되어 누구에게는 햇빛을 더 주고, 누구에게는 덜 주는 따위의 일을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모든 것은 우주 전체의 조화로운 원리와 상호 관계에 따라 순리대로 되어 갈 뿐이라는 것이다.
"천지는 항상 스스로 그러함(自然)에 자신을 맡긴다. 천지는 억지로 함이 없고 조작함이 없다. 그래서 천지가 생하는 만물도 스스로 서로의 관계 속에서 질서를 형성해 나간다 그러므로 불인(不仁)하다고 말한 것이다. 인(仁)하다고 한다면, 반드시 조작적으로 세우는 것이 있고, 베풀어 변화를 주게 된다. 그리고 은혜가 있고 만들어 줌이 있게 된다. 조작적으로 세우고 베풀어 변화를 주게 되면 사물은 진정한 본래 모습을 상실하게 된다. 은혜가 있고 만들어 줌이 있으면 사물은 자력에 의하여 온전하게 존속되지 못한다. 자력에 의하여 온전하게 존속되지 못하면 천지는 구비된 조화를 이룰 수 없게 된다."(왕필) 한마디로 천지는 인간의 힘을 빌리지 아니한다는 거다. 천지 그리고 성인들로 대표되는 도(道)는 한결같다는 것이다. 그러니 도를 향해 나를 더 사랑해 달라고 조르거나 간구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그러니 도는 우리의 변덕스러운 이기적 요구 사항에 좌우되지 않으므로 오직 한결같은 도의 근분 원리에 우리 자신을 탁 맡기고 쓸데없이 안달하지 않는 태도가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인간의 분별이 개입된 '유위'의 행동은 좋은 것은 가까이하려 하고, 나쁜 것은 멀리 하여 하니 불행과 부자유를 자초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스스로 그러할 뿐, 좋고 나쁨이 없다. 그러니 인간이 하는 상대적 분별을 비우면 '스스로 그러함'을 받아들이고 따르며 만사형통의 "무위의 행"이 가능하다. 예컨대, 말이라는 것은 분별의 기초로 한 '유위'의 행동으로, 분별의 집착을 강화시킬 수 있고, 모든 것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 또한 말이 많으면 자주 궁해진다는 "多言數窮(다언삭궁)"처럼, 말은 재앙의 문이 될 수 있음으로 줄이는 것이 상책이라는 거다. 말보다는 "무위의 행"으로 주위 사람들의 본보기, 즉 "블언지교"가 되어야 한다. 특히 자녀는 부모를 닮기에 부모는 항상 '무위의 일'에 처하여 "불언지교"에 충실해야 한다, 말을 줄여 고요함을 '도'답게 지키고 스스로 그러함의 '도'를 깨닫고 나누는 기쁨을 가져야 한다.
3. 깨달은 자의 모습: 微妙玄通(미묘현통)-제15장
"옛날부터 도를 잘 실천하는(또는 깨달은) 자는 미미(微微)하고 묘(妙)하며, 가믈(玄)하고 통달(通)해 있다"고 하며, "그걸 알 길이 없지만 드러난 모습을 가지고 억지로 형용하자면" 다음의 7가지 태도라고 노자는 말한다. 일반인의 눈으로 보면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豫焉 若冬涉川(예언 약동섭천): 코끼리가 겨울에 살어음판 건너듯이 신중함
코끼리가 겨울 살얼음 내 건너듯이 늘 조심스럽다.
猶兮 若畏四隣(유혜 약외사린): 원숭이가 사방을 돌아보며 경계하듯이 조심함
원숭이가 사방을 두리번거리듯 늘 경계한다.
儼兮 其若客(엄혜 기약객): 초대받은 손님처럼 공손함
점잖기는 마치 손님처럼 의젓하다.
渙兮 若氷之將釋(환혜 약빙지장석): 봄날에 얼음 녹아내리듯이 따뜻함
따뜻하기는 마치 얼음이 녹아내리듯 부드럽다.
敦兮 其若樸(돈혜 기약박): 자르지 않은 통나무처럼 순박함
돈독하기는 마치 통나무처럼 순박하다.
曠兮 其若谷(광혜 기약곡): 모든 것을 품어주는 계곡처럼 포용력
포용력은 마치 골짜기처럼 넓다.
混兮 其若濁(혼혜기약탁): 서로 다른 물이 섞여 있는 흐린 물처럼 다양함
다양하기는 마치 섞여 있는 물처럼 모두 받아들인다.
이런 사람은 채우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 채워지길 바라지 않는다. 인간이란 생래적으로 "채움의 길"을 간다. 뭐든지 모자란다고 생각하고 더 채우고 더 가지려 한다. 도를 알고 따르는 사람은 채움의 길을 버리고 '비움의 길'을 걷기에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 로다"하고 노래할 수 있다. '있음 그대로(being)에 자족하는 삶을 살게 된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굳이 채우려 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을 너덜너덜하게 하지, 새로운 모습으로 완성치 않는다(夫唯不盈(부유불영) 故能蔽不新成(고능폐불신성)."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도올은 "그러므로 능히 자기를 낡게 하면서, 부질없이 새롭게 작위(作爲)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로 풀이한다. 허(虛)를 극대화시키면서 자꾸 채우려 하지 않는다는 테마를 강조한 것이라 본다. 욕심을 채우려 하지 않고, 고집을 부리지 않는다. 그래서 혼탁한 세상을 맑게 만든다.
나는 개인적으로 '머뭇거림'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사실 전체를 파악하는 자는 구체적인 사태에 임하여서는 머뭇거리며 조심할 수밖에 없다. 잠시 마음을 놓으면, 우리들의 삶은 우리를 한 방향으로 몰아간다. 그 분잡에 휩쓸리다 보면 존재에 대한 질문은 스러지고 살아남기 위한 맹목적 앙버팀만 남는다. 숨은 가빠지고 타인을 맞아들일 여백은 점점 사라진다. 서슴없는 언행과 뻔뻔한 태도가 당당함으로 포장될 때 세상은 전장으로 변한다. 정치, 경제, 문화, 언론, 사법, 종교의 영역에서 발화되는 말들이 세상을 어지러움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지금 우리 시대에 필요한 태도가 있다면 ‘머뭇거림’이 아닐까? '머뭇거림'은 다음을 내포한다.
• 알 수 없는 것을 아는 것처럼 말하지 않으려는 겸허함,
• 함부로 속단하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움,
•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것조차 수용하려는 열린 마음.
'머뭇거림'의 반대가 '서슴없음'이다. 시몬느 베이유(Somone Veille)는 "우리가 사랑 가운데 서로를 대하기 위해 필요한 태도가 머뭇거림"이라 했다. 속절없이 흐르는 세월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머뭇거림은 답답함으로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머뭇거림 속에는 함부로 말하거나 판단하거나, 응대하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움이 담겨 있다. 지나칠 정도로 단정적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이 있다. 자기도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존재임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다. 확신은 고단한 생을 지탱해주는 든든한 기둥이지만, 그 확신이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폐쇄성에 갇힐 때는 아집에 불과할 수 있다.
상강과 소설 사이의 입동은 겨울의 시작이다. 겨울나기를 위해 인간은 서둘러 김장을 하고, 산짐승은 굴을 파고 들어간다. 입동 당일에 날씨가 추우면 그해 겨울은 몹시 춥다고 한다. 어제와 달라졌다는 건 계절뿐 아니라 신상에 변화가 있다는 것이다. “두꺼운 옷”을 꺼내 입고 강을 건너는 행위도 변화를 뜻한다. 강을 건너면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망설임이나 설렘, 두려움은 없다.
강 건너엔 어떤 삶이 기다리고 있을까? 지금까지 걸어보지 못한 새로운 길이므로 “몸서리쳐지는 도약”일 수도, 추락일 수도 있다. “써지지 않던 시가 급습할 것만 같”다는 표현으로 보면, ‘시인의 길’인 듯하다. 그 길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갈 수 있는 건 ‘사랑의 힘’이다. 곁에 믿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실패를 거듭해도 “끝까지” 갈 수 있다. 황야에 홀로 선 듯 외롭고도 고독한 삶을 견딜 수 있다. 더 아파해야 별들이 “울고 있는 전율” 같은 시를 쓸 수 있다.
사랑의 힘/황규관
어제와는 또 달라졌어
입동 하루 전에 찬비가 내리고
두꺼운 옷을 내 입고 강을 건널 때
어제로는 다시 돌아가지 못한다는 거
끝까지 가야만 처음에 도달한다는 거
분명 어제와는 달라졌어
몸서리쳐지는 도약 아니면 추락일지도 모르지
두려움일까
아픈 기쁨일까
오늘은 어지러운 모습으로 달라졌어
써지지 않던 시가 급습할 것만 같지
이게 다 사랑의 힘인 것도 같고
지금껏 자초한 일들의 숨가쁜
업보인 것도 같고
하지만 더 아파도 좋다는 고독이 찾아왔다는 느낌에
나는 강을 건너고
눈앞은 여전히 황야야
별들이 가득 울고 있는 전율이야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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