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1년 11월 23일)
어제에 이어, 오늘은 도에 이르는 9 계단인 '도가구계(道家九階)' 중 일곱 번 째인 현명(玄冥) 이야기를 한다. '현명'은 깊고 어두워서 알 수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현(玄)과 명(冥)은 모두 깊고 어둡다는 뜻으로 도(道)와 일체가 되어서 인지(人智)로는 알 수 없는 경지에 도달했음을 형용한 표현이다. 〈추수(秋水)〉편에는 “현명(玄冥)에 시작해 대통(大通)으로 돌아간다"는 표현이 보이는데 이때의 현명과 대통은 모든 것을 깨우쳐 도의 경지에 도달했음을 달리 표현한 것으로 인명으로 쓰인 것은 아니다.
오늘 내가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한자 '현(玄)'이다. 배철현 교수는 <창세기> 1장 1절의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내셨다"의 문장을 "처음이라는 순간을 통해 신이 혼돈 상태의 우주에서 쓸데 없는 것들을 처내기 시작했다"로 바꾸어 번역했었다. 여기서 방점을 찍어야 할 것은 '처음'과 '처내기 시작했다'란 말이다. 사실 카오스(혼돈)에서 코스모스(질서)로, '없음'에서 '있음'으로의 질적인 변화는 '처음'이라는 특별한 순간을 통해 가능하다. 여기서 '처음'이란 이전과 질적으로 전혀 다른 상태로 진입하기 위한 '경계의 찰나''다. 습관처럼 흘러가던 이전의 양적인 시간과 달리 충격적이고도 압도적이어서 전율하게 하는 질적인 시간이고, 동시에 문지방, 현관(玄關)이다. 여기서 '현(玄)'자가 '가물가물하다'는 말이다. 그래 아직은 손에 뭔가 잡히지 않지만, 가물가물하게 뭔가 보인다.
그리고 <창세기>에서 '창조하다'의 히브리어는 '바라(bara)'라 한다. '바라'라는 동사의 거친 의미는 "(빵이나 고기의 쓸데없는 부위를) 칼로 잘라내다'라고 한다. 그러니까 '창조하다'의 의미는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요리사나 사제가 신에게 제사를 드리기 위해 재물의 쓸데없는 것을 과감하게 제거해 신이 원하는 제물을 만드는 것처럼, 창조는 자신의 삶에 있어서 핵심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자신의 삶의 깊은 관조를 통해 부수적인 것, 쓸데 없는 것, 남의 눈치, 체면을 제거하는 거룩한 행위이다. chaos(한덩어리)를 처낸 것이 cosmos이다. 질서는 버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창조는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은 카오스에서 출발한다.
이 카오스 안에 숭고(sublime)가 있다. 경계에 서는 것은 숭고한 일이가 때문이다. 나는 현(玄)자를 주목하며, 두 단어를 소환했다. 숭고와 경계. 숭고(崇高)는 "뜻이 높고, 고상하다"라고 사전은 설명한다. 그러니까 숭고(sublime)'의 어원적인 의미는 ‘리멘(limen) 아래서(sub)' 혹은 ‘넘어서(super)'라는 의미다. 새로우면서 낯선 자신을 발견하고 그것에 놀라 불안한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가 ‘리멘(limen)'이다. 리멘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장소인 ‘현관(玄關)’, 우리 식으로 말하면, '문지방'과 같다.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는 경계이다. 다른 세계로 넘어가려면, 불안하지만 반드시 거쳐야하는 마음의 상태다. 그런 불안한 자신을 응시하고 자신 안에서 최선을 찾으려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은 이미 숭고하다. 그는 자신만의 별을 발견하고 묵묵히 걸어가기 때문이다.
‘숭고’는 인간이 인식 가능한 경계를 너머 선 어떤 것, 흔히 ‘위대함'을 우리들에게 바라보게 한다. 숭고는 오감을 통해 그 일부를 느낄 수 있고, 도덕적이거나 이성적으로 인정할 수도 있고, 형이상학적이나 미적으로 감지될 수 있고, 예술적이나 영적으로 매력적인 어떤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숭고는 인간의 숫자와 언어를 통해 측량되거나 표현될 수 없고 더욱이 흉내 낼 수 없는 묘한 것이다.
숭고한 상태인 서브라임이란 문지방 근처에서 머뭇거리다 넘어서는 것이다. 그러니까 숭고함은 자신이 원하지 않았지만 감당하기 힘든 어려운 삶을 경험하면서, 세계를 이끌어 갈 인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하게 하는 작은 디딤돌 아래, 아니 근처 경계에 서는 것이다. 플라톤이 말하는 에로스, 숭고한 사랑, 서브라임, 경계에 있는 사람의 덕목은 공감 능력과 자비 능력이다. 공감 능력은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능력이고, 자비 능력은 다른 이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해석하는 능력이다. 이 자비가 연민이다. 연민은 '내 마음 속에 들어온 당신의 슬픔'이다. 연민의 사전적 정의는 '불쌍하고 가련하게 여김'이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이다. 세상 모든 사람은 각자의 슬픔을 가지고 있다. 타인의 슬픔에 대한 가장 좋은 위로는 나의 슬픔이 너의 슬픔 못지않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너의 어려운 처지가 나의 어려운 처지처럼 느끼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어쩔 수 없는 어둠과 이길 수 없는 슬픔을 갖고 있게 마련이다. 사람들은 거울을 보며 얼굴에 묻은 먼지를 닦아내지만, 마음의 얼룩은 걷어내지 못한다.
자비(慈悲) 이야기를 좀 더 이어간다. 한자 '자(慈)'를 해석하면, 나와 상대방의 마음이 가물가물(玄)해져, 하나가 된 '신비한 합일(unio mystica)'의 상태를 의미한다. 산스크리트어로 이를 '마이트리'라 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자(慈)=마이트리(maitri)=헤세드(hesed, 히브리어)=아가페(agape)=참된 사랑' 참된 사랑의 초점은 상대방에게 있다. 만일 그 초점이 자신에게 있고 상대방을 무시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폭력이다. 이것은 상대방이 진정으로 무엇을 바라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깊이 살펴야 상대방에게 행복을 줄 수 있다.
'자비'의 '자'는 상대방을 기쁘고 즐겁게 해주는 것이다. 마이트리, ‘자’는 상대방이 행복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그 환경을 조성하는 작업까지 포함하는 큰마음이다. ‘비(悲)’는 상대방의 슬픔과 고통을 덜어주려는 마음과 능력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비(悲)=카룬나(karuna)=compassion(연민). 영어로 ‘컴페션’은 상대방의 고통(passion)을 기꺼이 함께(com) 나누려는 마음이다. ‘카룬나’를 방해하는 가장 큰 적은 무관심이다. 따라서 상대방의 걱정, 근심, 슬픔, 불행을 자신의 일처럼 느낄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이 상상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 상대방의 슬픔에 동참한다.
- 상대방에게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배려하고 조치를 취한다.
- 사랑하는 사람이 슬픔에 빠져 있다면 그 사람 옆에 앉아 말없이 그의 슬픈 감정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은 서울로 강의를 간다. 총 6주 강의에서 2주차 강의이다. 어제는 빚내서라도 추위를 한다는 소설(小雪)이다. 어제 저녁은 정말 추웠다. 소설은 24절기 중 20번째로, 입동과 대설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이때부터 살얼음이 잡히고 땅이 얼기 시작하여 본격적인 겨울로 들어선다. 이때가 되면 시래기를 엮어 달고 무말랭이, 호박고지, 곶감 말리기 등의 겨울나기 준비에 바쁘다. 옛말이 맞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날씨가 저녁부터 추워진다 한다. 거리는 노랗게 또는 빨갛게 물든 나뭇잎들이 여기저기서 작별을 고하며 거의 다 떨어졌다. 그런 11월의 오후에 거리를 나서면, 나이 들수록 가는 시간이 더 빠르게 느껴진다. 가톨릭 전례 력에서 11월은 ‘위령성월'이라 하여 특별히 죽음을 묵상하는 달이라서 친지들의 묘지도 평소보다 자주 방문하며 기도를 바치는 때이다. 이번 주일에는 11월이 다 가기 전에, 부모님과 먼저 하늘 나라에 간 처의 산소를 다녀올 생각이다.
그리고 오늘 아침은 이해인 수녀님의 시를 한 편 공유한다. 수녀님은 이 시를 소개하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제가 가만히 사라지는 시간의 뒷모습을 향해 말을 걸면, 그 시간은 ‘글쎄요? 그저 순간순간을 새롭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세요’ ‘사랑할 시간이 생각보단 길지 않으니 더 많이 사랑하고 용서를 미루지 마세요’라고 충고하는 것 같다." 감사, 사랑 그리고 용서를 나도 소환한다. 어제는 갑상선이 의심된다고, 조직 검사를 하자고 해, 아침 일찍 병원에 갔다 왔다. 별 일 없었으면 한다.
뒷모습 보기/이해인
누군가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는 일은
내 마음을 조금 더 아름답고
겸손하게 해줍니다
이름을 불러도
금방 달아나는 고운 새의 뒷모습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춤을 추며 떠나는 하얀 나비의 뒷모습
바닷가에 나갔다가 지는 해가 아름다워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는
어느 시인의 뒷모습
복도를 조심조심 걸어가거나
성당에 앉아 기도하는 수녀들의 뒷모습
세상을 떠나기 전
어느 날 내 꿈 속에 나타나
훌훌히 빈 손으로
수도원 대문 밖을 향해 떠나시던
내 어머니의 뒷모습
어느 빈소에서
사랑하는 이의 영정사진을
보고 또 보면서 흐느끼는 가족들의 뒷모습
앞모습과 달리 뒷모습은
왜 조금 더 슬퍼보이는 걸까
왜 자꾸 수평선을 바라보고 싶게 만드는 걸까
언젠가는 세상 소임 마치고
떠나갈 나의 뒷모습도 미리 생각하면서!
다시 '현명(玄冥)'의 '현'자로 되돌아 온다. '현'자를 생각하면 '현관'에 대하여 더 이야기를 해야 한다. ‘여기'와 ‘저기'의 경계가 타부(taboo)이며 ‘현관(玄關)'이다. 이 경계에는 항상 괴물이 등장한다. 이 경계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수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괴물은 오랫동안 수련하고 준비하지 않은 자들을 과거로 돌려보낸다. 자신의 정체성을 알려는 비극적인 인물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고향 테베로 들어갈 참이다. 역병에 시달리고 있는 이 도시 성문에는, 스핑크스라는 괴물이 앉아 있다. 스핑크스(Sphinx)는 그리스어로 ‘(대답을 하지 못하면, 그 대상을) 목 졸라 줄이는 존재'라는 뜻이다. 스핑크스는 오이디푸스에게 묻는다. “아침에는 네발로 걷고, 점심에는 두발로 걷고, 저녁에는 세발로 걷는 존재가 무엇이냐?” 오이디푸스 이전에는 그 누구도 이 질문을 대답하지 못했다.
현관은 경계이다. 우리는 보통 대립된 두 면 가운데 하나를 취하는 데 익숙하다. 이 쪽 아니면 저 쪽을 택하면서 상대방에게도 그러기를 은연중에 강요한다. 이단이나 극단적 근본주의자는 두 면 가운데 하나를 취하는 사람들이다. 한 쪽을 택한 후, 그것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을 순수하고 절실하고 진실한 삶의 태도로 여긴다. 두 면을 동시에 장악하거나 두 면 사이의 경계에 처하지 않으면 전면적 인식이나 진보적 삶은 구현되지 못한다. 이것을 부정하다가 저 것에만 빠지는 것은 부정의 고착화이다. 지속 부정을 통해 부정을 살아 있게 해야 한다. 그것이 성숙한 이탈이다.
한쪽을 택하면 과거에 박히거나, 경계에서 서면 미래로 열린다. 한쪽을 택하면 이념 화되기 쉽고, 경계에 서면 생산적인 효과를 낸다. 한쪽을 택하면 얼굴에 짜증기가 새겨지고, 경계에 서면 밝고 환 해진다. 나는 함민복 시인의 시집,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는 제목을 좋아한다.
스틱스(styx)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강 이름으로, 우리가 죽으면 이 강에 다다른다. 뱃사공 샤론(Charon)이 죽은 자를 태워 지하의 세계로 옮겨 준다. 스틱스는 <Boat on the river>를 부른 미국 그룹밴드이기도 한다. 스틱스는 별자리 명왕성의 이름이기도 하다. 스틱스는 신화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이룬다. 스틱스하면 아킬레우스가 떠오른다. 그의 아버지는 인간 펠레우스이고, 어머니가 여신 테티스이다. 아킬레우스는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어머니 여신이 그를 스틱스 강물에 담근다. 근데, 발목을 잡고 강물에 담갔다. 강물이 닿지 않아 불사의 능력에서 제외되었던 바로 그곳이 아틸레스 건이다.
스틱스 강물에 무생물이 닿으면 녹아 없어지지만, 생물은 강물에 닿은 부분이 불사의 능력을 갖게 된다. 왜 그럴까? 스틱스 강물이 생과 사의 경계에서 흐르고, 경계에 서 있는 자는 강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 같다. 보통 경계에 서 있으면 불안하다. 반면, 어떤 한 진영에 있으면 우리는 편안하다. 그 불안이 우리를 고도로 예민하게 유지해 주고, 그 예민성이 경계가 연속되는 흐름을 감지할 수 있게 해준다. 이 감지 능력을 우리는 '통찰(insight)'이라고 부른다.
통찰력이란 "탁! 하면 아는 것"인데, 세계의 흐름을 단순히 이성적인 계산 능력으로 만이 아니라, 감성이나 경험, 욕망이나 희망 등의 모든 인격적 동인들을 일순간에 발동시키는 능력이다. 생과 사의 경계에서 오는 고도의 불안을 감당하며 키워 낸 예민함만이 이것을 가능하게 한다. 경계에서 떠나 어느 한 쪽을 선택하는 순간, 그 세계를 전부로 착각하고, 우리는 그 프레임에 갇혀 굳어버린다. 이 세계를 참과 거짓, 선과 악으로만 본다. 자신의 관점에서 맞는 것만 참이고 선이다. 그 나머지는 모두 거짓이고 악이다. 이 관점이 바로 이념이고 신념이고 가치관이다.
세계는 변한다. 한 순간도 멈추거나 고정되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이 변화의 진실을 부정하지 못한다. 그래서 변화는 흐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흐름은 경계가 지속적으로 중첩되는 과정으로, 흐르는 것은 부드럽다. 변하는 것은 유연하다. 그리고 살아 있는 것은 부드럽고, 죽어 있는 것은 뻣뻣하다. 살아 있다는 것은 변화를 실현하고 있는 것이며, 변화가 멈추고 화석 화되어 있는 일이 죽는 일이다. 산 자의 부드러움을 정지시켜 딱딱하게 굳도록 하는 것이 이념이나 신념 같은 것들이다. 세계가 변화라면, 경계의 중첩이라면, 그 흐름을 그 흐름 그대로 마주하여야 한다. 왜? 그래야 그 변화에 제대로 반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게 생명이다. 생명은 경계의 중첩이 흐르고 또 흐르는 과정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생명체에 불사의 능력을 주는 스틱스 강은 우리에게 말한다. "경계에 서라! 그래야 흐를 수 있다! 그래야 산 자이다! 그래야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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