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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틈'을 벌릴 줄 아는 게 지력(智力)이라고 본다.

4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어제는 조카 결혼식에 다녀온 후 이른 저녁부터 잠을 자며 휴식을 취했다. 일주일 동안 밀린 잠을 다 채웠다. 머리가 더 이상 무겁지 않다. 오늘 아침 화두는 '틈'과 '인공지능'이다. 지난 주말에 우연히 스마트폰으로 이것 저것을 검색하다가 이진성 작가의 <에이트(8)>이라는 책을 알게 되었고, e-Book으로 구입하였다. 천천히 읽고 공유할 생각이다. 오늘 아침 고른 사진은 지난 주 제주도에서 찍은 것이다. 제주의 아침 햇살을 곱게 받은 제주 돌담이다.

우리는, 생각이 비뚤어지면, 창피한 줄도 모르고, 쉽게 말하고 행동한다. 그러지 않으려면, 지적으로 부지런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이 해 놓은 생각의 결과들을 수용하고, 해석하고 확대하면서 자기 삶을 꾸리는 사람은 지적으로 게으른 사람이다. 지적 '부지런함'이란 단독자로 자신의 개성을 유지하고 독립적인 삶을 사는 것으로 '따라 하기'의 '편안함'과 '안전함'에 빠지지 않고, 다가오는 불안과 고뇌를 감당하며 풀릴 길이 보이지 않는 문제를 붙들고 계속 파고 들어가 가능해지도록 '틈'을 벌리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대답에만 빠지지 말고, 질문하는 사람이 지적으로 부지런한 사람이다.

'틈'을 벌릴 줄 아는 게 지력(智力)이라고 본다. 인공지능과의 차이일 것이다. 최진석 교수에 의하면, 인공지능(AI)이 인간의 지능과 유사해진다고 우려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지력이라고 했다. 정보가 옳고 그르냐를 판단하는 것을 넘어 우리가 지식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결정하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정보를 판단하는 도구로서의 지능에서는 인간과 AI 간 차이가 좁아질 수 있지만, 이런 도구를 활용하는 의지력에서는 AI가 인간을 따라 올 수 없다. 의심하고 부정할 수 있는 능력 역시 AI와 인간을 구분 짓는 또 다른 차이점이다. AI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최적의 답을 계산해 움직이지만, 인간은 이런 계산을 거부할 수 있다. 배고프더라도 먹지 않고, 피곤하더라도 눕지 않는 것이 인간의 지력이다. 데카르트는 합리적인 것에 도달하기까지 방법적 회의로 의심하라고 했다. 그건 인간만이 할 수 있다. 인간만이 의심하고, 부정한다. 거기서 진리를 찾는다.

인간의 지력에는 '틈'이 있다. 영어로 이걸 '갭(gap)'이라 한다. "의지와 행동 사이에 ‘생각’이 있고, 개념과 제작 사이에 ‘디자인’이 있고, 꿈과 현실 사이에 ‘플랜’이 있다. 하늘에선 뚝 떨어진 현실이란 없다. 그것이 보이지 않는 자에겐 ‘우연’이란 위안이 존재할 뿐이다." (이순석) 이번 주는 이진성의 <에이트(인공지능에 대체되지 않는 나를 만드는 법)>을 읽으며 공유할 생각이다. 이게 인문동가의 역할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틈/김성춘

틈이 고맙다

숨길을 터준다
숨 쉴 수 없는 틈은 죽음이다
날숨과 들숨의 틈이 아름다운 이유이다

틈이 고맙다
틈은 쪼개면 쪼갤수록 또 다른 틈이 생긴다

문과 문 그 틈새로
캄캄한 틈에 달빛과 별빛이 오고
꽃잎과 꽃잎 틈으로 벌과 나비 오고
악수하는 손과 틈 사이
입술과 입술 틈 사이
달콤한 사랑의 틈이 온다
새벽 다섯시와 새벽 네시 오십구분오십구초 그 틈새
푸른 새벽 찾아온다

틈을 사랑하는 나는
일하는 틈 운전하는 틈 헬스하는 틈틈
시를 읽고 시를 산다
밥을 먹고 밥을 쓴다
폰 메시지 보내고 폰 메시지 먹는다

오늘도 나는 손녀가 ‘뽀로로’ 티비를 보는 틈새
잠시 틈을 내어
틈새 세상 바라본다

‘루사이트(leucite) 현상’이라는 말이 있다. 옹기가 숨쉬는 그릇이란 평가를 받는 것은 옹기 벽 속에서 800도 이상에서만 나타나는 루사이트 현상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는 옹기는 장을 담그는 항아리가 될 수 없다. 루사이트는 백류석이라 부르는 일종의 화산암이며, 자연 상태에서는 화산의 굳은 곳에서 발견된다. 항아리가 섭씨 800도에서 1200도 사이에서 구워지는 동안 항아리 재료인 고령토가 루사이트 상태로 변한다. 이때 광물의 결정 구조 한 축을 이루고 있던 결정수들이 빠져 나가면서 미세한 '틈'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 숨구멍은 공기는 통과하지만 물은 통과하지 못하는 작은 스펀지구조를 이루는 옹기가 되는 것이다. 숨쉬는 '틈을 가진 옹기에 장을 담아야 맛있게 숙성되고, 김치나 기타 발효음식을 넣어 저장해 두면 항아리 외부에서 신선한 산소들이 끊임없이 공급되어 발효작용을 돕는다는 것이다. 이 시를 소개하고 있는 <문화저널21> 편집위원 서대선 시인에게서 배웠다.

그는 이런 말도 했다. "항아리의 숨구멍처럼 “틈이 고마운” 곳은 철로와 철로 사이의 “틈”이다. 여름과 겨울의 온도에 따른 차이를 맞추어 주기에 기차들이 안심하고 달릴 수 있다. 바람 많은 제주도 돌담의 구멍들은 바람의 “들숨과 날숨”을 모두 받아 주기에 무너지지 않는다. 그뿐이랴, “문과 문 그 틈새로/캄캄한 틈에 달빛과 별빛이 오고/꽃잎과 꽃잎 틈으로 벌과 나비 오”듯 “틈”은 세상을 풍요롭고 아름답게도 만든다."

살면서 나에게 무력감이 밀려 오면 나는 이 문장을 기억한다. "산다는 것은 '비틀기'이고, 삶은 '꼬임'이다." 우리들의 삶의 모든 시도들은 지금보다 더 나아지려는 율동이다. 우리는 우주가 완벽한 원운동을 하는 것이 진실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러나 케플러는 행성이 원운동을 하지 않고 타원운동을 한다고 말했다. 원은 기하학적 관념으로만 존재하는 조작된 진실일 뿐이다. 진실은 완벽한 원이 아니라, 타원이다. 완벽한 원에는 에너지가 없지만, 타원에는 힘이 있다. 그러니까 평면적이고, 정지된 지성에게 힘이 포착되기 어려운 것과 같다. 일상이 무기력해지면, '비틀어' 보아야 한다.

어떤 존재에나 힘이 작용하면 절대 균형이 깨지고 뒤틀림이 가미된다. 타원이 그렇다. 균형을 깨는 탄성*이 바로 힘이다. 동물들이 먹잇 감이 발견되면, 즉시 몸을 비틀어 자신의 절대 균형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탄성을 준비한다. 여기서 힘이 나온다. 그 탄성이 적중(的中)이라는 최종적인 완성을 보장할 것이다. 적중은 몸을 비틀어 꼬임의 상태로 스스로를 몰고 가서 '동작'으로 생산되어야 만날 수 있는 최종 경지이다. 여기서 자신을 비틀어 꼬이게 하는 움직임은 불균형이고 동작이고 힘이다.

좀 다른 이야기이지만, 이러한 움직임의 이유는 생존이다. 인간 활동 핵심 동인은 생존이다. 인간의 모든 활동은 생존 전략의 일환이다. 생존을 도모하는 최초의 활동을 우리는 분류로부터 시작한다. 효율적으로 생존하기 위해 우리는 분류한다. 그리고 이렇게 이루어진 구분에 지속성을 부여하여 전승하기도 한다. 이 구분을 통해, 우리는 경험을 통제하는 능력을 축적한다. 이를 우리는 '지적활동'이라고 한다. 지적이라는 말은 경험을 통제하는 일관된 형식이다. 인간의 성숙도 지적인 능력의 개발과 연관된다. 지적인 사람이 더 잘 생존할 수 있다. 여기까지가 인공지능이 인간 지능을 넘어설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지적인 사람들 속에서도 상대적으로 더 강한 사람이 있다. 은유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리고 시를 읽는 사람이다. 지적인 활동 자체를 확장하여 분류의 틈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훌쩍훌쩍 건너뛰는 것이다, 아무 관계도 없는 이질적인 것들을 서로 연결하여, 틈을 벌려주며 소통시켜 버린다. 인간에게 의미의 확장은 통제 영역의 확장이다. 은유를 통해 세계를 넓혀 나가는 것이 지력이고 인간만이 가능하다. 네루다는 이를 '메타포라고 말한다. 그 메타포, 은유는 비틀기이다. 은유는 뒤틀린 틈새를 허용하고, 또 끼어들어 둘은 상대방을 의지하며 새로 태어난다.
둘이 꼬인 것이다. 우린 이렇게 꼬여가면서 영토를 확장해 나간다.

"이 세계는 힘이 작동하는 비틀기로 꼬여 있다"고 노자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겠다. 음과 양으로. 전혀 관계 없었던 무엇과 꼬이고 또 꼬이며 영토를 확장하고, 또 확장해 나갈 때, 우린 힘을 얻고, 힘찬 모습이 된다. 이를 노자는 유무상생(有無相生)'이라고도 한다. 최진석 교수에게서 배운 것이다.

지난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blogspot.com 을 누르시면 보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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