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1년 11월 17일)
어제 서울에서 강의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오랜만에 무궁화호를 타고 가을 여행처럼 다녀왔다. 피곤했던지, 기차 안에서 잤다. 그랬더니 오늘 아침 너무 일찍 일어났다. 게다가, 모처럼 오전 시간이 좀 넘친다. 그래 다시 읽다가 멈춘, 조던 B. 피터슨의 <<12가지 인생의 법칙(12 rules for life)>>을 다시 잡았다. 이젠 다 끝내고 싶어서 이다. 혼돈과 질서의 경계 위에서, 진정한 '존재'로서 영웅적 행위를 갈망하고 삶이 부과하는 책임을 기꺼이 지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우리는 의미 있는 삶을 살게 될 거라는 확신 속에서, 나는 이 책을 꼼꼼하게 읽고 많은 통찰을 얻고 있다. 그 12가지 규칙들을 다시 한번 더 나열하고, 거기서 얻은 나의 생각을 소환해 본다.
(1) 어깨와 허리를 펴고, 당당하게 똑바로 앉고, 서거나 걷는다. 태도의 문제이다.
(2) 자신을 도와줘야 할 사람처럼 대한다. 자신을 두 존재로 나누어 본다.
(3) 나 자신에게 최고의 모습을 기대하는 사람만 만난다. 아무나 만나지 않는다.
(4)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오직 어제의 자신하고 만 비교한다. 타인과 비교하지 않는다. 나는 '나'다.
(5) 아이를 제대로 키우고 싶다면 처벌을 망설이거나 피하지 않는다. 원칙이 있어야 한다.
(6) 세상을 탓하기 전에 방부터 정리한다. 나 자신부터 잘한다.
(7) 쉬운 길이 아니라, 의미 있는 길을 택한다. 의미 있는 길은 희생이다.
(8) 언제나 진실을 말한다. 적어도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거짓말은 나와 세상을 병들게 한다.
(9) 다른 사람이 말할 때는 자신이 꼭 알아야 할 것을 들려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10) 의견 개진을 할 때는 분명하고 정확하게 말한다.
(11) 아이들이 스케이트보드를 탈 때는 방해하지 말고 내버려 둔다.
(12) 길에서 고양이와 마주치면 쓰다듬어 준다.
오늘은 그 규칙의 11번 째인 "아이들이 스케이트보드를 탈 때는 방해하지 말고 내버려 둔다"는 이야기를 하려한다. 마침 어제 서울에 다녀오면서, 엄청 많은 사람들의 군상을 만났다. 우리 사회가 정말 말 그대로 고령화 사회이다. 주변에서 노인들만 만났다. 젊은이들이 너무 없다. 어린 아이들은 거의 보지 못했다.
어린이들은 위험한 놀이를 좋아한다. 그들은 위험을 이겨 내고 싶어한다. 그저 그들은 안전 보호대보다 좀 더 위험한 놀이에 능숙 해지려고만 한다. 그들을 진정으로 안전하게 해 주는 것은 능숙함이다. 아이들은 놀이터가 너무 안전하게 만들어졌으면, 그들은 그곳에서 아예 놀지 않거나 의도하지 않은 방법으로 논다. 아이들에게는 약간 위험한 놀이터, 즉 도전 의식을 자극하는 놀이터가 필요하다.
원래 인간은 위험을 최소화하는 데 크게 관심이 없다. 그보다는 위험을 최대한 활용하려고 한다. 인간은 운전하고, 걷고, 사랑하고, 즐기고, 욕망을 채우고, 끊임없이 한계에 도전하며 발전한다. 인간은 너무 안전하면 다시 위험해지고 싶어 한다. 특별한 제약이 없고 환경이 받쳐 주면 인간은 도전적인 삶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성공하는 경험이 쌓이면 자신감이 생기고 혼돈에 맞설 만한 힘이 길러진다. 이렇게 성장하는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인간에게는 위험을 즐기려는 본성이 있다. 미래에 얻게 될 것을 기대하며 현재에 충실할 때 자극을 받고 활력을 얻는다. 그런 게 없으면 나무늘보처럼 무력하게 하루하루를 살게 된다. 과잉보호에 익숙해지면 위험한 상황이 느닷없이 나타났을 때 맥없이 무너진다.
우리 사는 세상의 모든 것에는 어두운 면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원한과 시기심을 연민과 정의로 위장하는 것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융에 의하면, "누군가의 행동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을 때는 행동의 결과를 유심히 관찰해 동기를 유추해" 볼 수 있다고 했다.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먼저 자신부터 자신이 말하는 방향으로 변화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생각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되 물어볼 수 있어야 자신을 변화 시킬 수 있다.
오늘 나는 '생명의 그물(Web of Life)'이라는 단어를 알게 된 것을 그리 멀지 않다. 우리는 그 '생명의 그물'에 대한 필요한 개념적 도구와 기술을 갖게 되었지만 아직 완벽하지 않다. 여전히 인간은 나약하기에 최선의 상황을 만들려면 온갖 고난을 견디며 엄청나게 노력해야 한다. 누가 뭐라 해도 인간은 놀라운 피조물이다. 많은 연구들에 의하면, 남자 아이의 관심사는 주로 사물을 향하고, 여자 아이의 관심사는 주로 인간을 향한다고 한다. 그리고 남녀 차이는 사회적 요인보다는 생물학적 요인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남자 아이는 경쟁을 좋아하고 순종을 싫어한다. 특히 청소년기에는 반항적 성향이 뚜렷이 드러난다. 이 시 남자 아이들은 가족의 품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인간으로 살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힌다. 그런데 학교는 1800년 대 말에 순종을 가르치려는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시 한편을 공유하고, 이야기를 이어 간다.
오늘 공유하는 시를 소개한 김기택 시인은 이렇게 덧붙임을 한다. "밥 뿐만 아니라 슬픔도 허기도 가난도 많이 먹으면 배가 나오는구나. 상처도 괴로움도 마음에 자꾸 쌓이면, 밥을 적게 먹어도, 밥 대신 물만 먹어도, 저절로 부어서 불편한 살이 되는구나.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수많은 일들을 밥 먹듯이 참고 견디며 안으로 삭였는데도, 먹고 놀기만 해서 살찌고 배가 나왔다는 오해를 견뎌야 하는구나. 살도 배도 입이 없어 말은 못해도 할 말은 참 많을 것이다. 그 말을 생전에 다 하지 못하고 영영 떠난 이들의 무덤은 생전에 나왔던 배처럼 둥글게 부풀어 있구나.
배 나온 남자/유용주
특별하게 잘 먹는 것도 아니고
운동부족도 아니다 오히려
많은 날들을 배고픔에 시달렸고
어린 나이에 각종 일로 온몸 성한 곳이 없는데
이상하다 물만 먹어도 살이 오른다
밥 앞에 고개 숙이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비굴하게 밥을 번 적은 없다
북한 어린이 돕기 성금보다 술값을 더 지출한 게 사실이지만
큰맘 먹고 하는 외식도
고작해야 자장면이고 특별히 탕수육을 곁들인 날은
밤새 설사로 고생했다
굶은 기억이 살찌게 하나
슬픔이 배부르게 하나
그 기억을 잊기 위해 얼마나 허겁지겁 살아냈는지
잊는다는 것이 병을 주었나
참는 것이 밥이었고
견디는 일이 국이었고
울며 걷던 길은 반찬으로 보였는데
배 나온 사람들을 보면
부황과 간경화로 먼저 간 식구들이 떠오른다
저, 좁은 땅 다 파먹고 말없이 누워있는
슬픈 무덤 덩어리들
문화는 억압적 구조로 존재한다. 문화는 근본적이고 보편적이며 실존적인 현실이기 때문이다. 문화는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것이고, 케케묵은 것이며, 때로는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이다. 문화는 우리를 둘러싼 유, 무형의 모든 환경이다. 그러나 문화는 우리가 사회에서 적응하는 과정에서 우리를 정해진 틀에 가두고 여러 잠재적인 능력을 무용지물로 만든다. 하지만 그에 대한 보상도 크다.
데리다를 포함한 포스트모더니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과학이 과학계 정점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이익을 주는 또 하나의 권력 게임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사실은 없고 해석만 있다. 계급적 위치와 명성은 능력과 역량의 결과가 아니던가? 이때의 기술과 역량은 그것에서 이익을 얻는 사람들에 의해서 결정된다. 이를 통해 다른 사람들을 배제하고, 이기적으로 이익을 챙긴다.
권력은 인간을 행동하게 만드는 여러 요인의 하나이다. 사람은 위로 올라가기 위해 경쟁하고, 서열 구조에서 현재의 위치에 신경을 쓴다. 그러나 권력이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유일한 요인, 혹은 가장 중요한 요인은 아니다. 한편, 우리는 모든 것을 알 수 없기에, 모든 관찰과 발언은 무엇을 고려하고 무엇을 포기하느냐에 달라진다. 그렇다고 '모든 것은 해석에 불과하다'라는 주장이나, 범주화는 단지 배척일 뿐이라는 주장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단 하나의 인과 관계로 모든 것을 해석할 수는 없다. 그런 해석을 제시하는 사람을 경계해야 한다.
눈앞에 드넓게 펼쳐진 땅이 여행자에게 어떻게 여행해야 하는지 말해 주지 않는 것처럼, 사실도 그것이 왜 사실인지 스스로 이유를 밝히지 않는다. 아주 단순해 보이는 현상이라도, 그것을 인식하고 상호 작용하는 방법은 무수히 많다. 그렇다고 모든 해석이 모두 유효하지 않다. 어떤 해석은 우리에게 피해를 주고, 어떤 해석은 우리를 사회와 충돌하도록 유도한다. 해석의 수는 거의 무한에 가깝고, 이 말은 곧 문제 역시 무한에 가깝다는 말이다. 그러나 유효한 해결책은 무척 제한적이다. 해결책도 무한에 가깝게 있다면 삶이 훨씬 수월 해졌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건강하게 돌아가는 사회에서는 '능력'이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는 기본 요인이다. 지위를 결정하는 것은 능력과 역량과 실력이지, '힘'이 아니다. 서구 사회에서 성공 가능성을 가장 정확하게 예측하는 지표는 지능과 성실성이다. 지능은 인지 능력과 지능 검사로 측정되는 것이고, 성실성은 근면함과 유순함으로 대표되는 성격 특성이다. 물론 예외는 있다. 성공한 기업가나 예술가 중에는 성실성보다 개방성이 두드러지는 경우도 있다. 개방성도 성실성이나 지능 못지않게 중요한 자질이다. 그러나 개방성은 언어 지능과 창의력과도 관계가 있어 상관관계가 전혀 없는 예외라고는 할 수 없다.
남자들은 함께 일할 때 다음과 같은 행동 기준을 서로에게 강요한다.
- 자신에게 할당된 일을 해내라
- 자신에 주어진 임무를 충실하게 해내라
- 항상 깨어 있고 집중하라
- 칭얼대거나 짜증 내지 말라
- 항상 동료를 옹호하라
- 알랑거리지 말고 고자질하지 말라
- 어리석은 규칙의 노예가 되지 말라
- 지질한 남자가 되지 말라
- 의존적인 남자가 되지 말라
남성은 일반적으로 누군가에게 의존하는 것을 편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속성이 있다. 이는 여성에게는 명백한 이점으로 작용한다. 일하는 여성이 결혼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무능력한 남편을 돌봐야 하는 상황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부드러움과 무해함만이 의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미덕이 되면, 강인함과 지배력이 무의식적인 매력을 발산하기 시작한다. 남성이 여성화되는 극한 상황에 내몰리면 냉혹하고 파시스트적인 정치 이데올로기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된다.
남성은 강해져야 한다. 남성이 강한 남성을 요구하고 여성도 강한 남성을 원하기 때문이다. 남성은 자신을 채찍질하고 상대를 채찍질함으로써 강해진다. 건강한 여성은 소년이 아닌 남자를 원한다. 건강한 여성은 다투고 씨름할 만한 상대를 원한다. 여성은 강해지면 더 강한 배우자를 원한다. 똑똑한 여성은 더 똑똑한 남성을 원한다. 그래서 강하고 똑똑하고 매력적인 여성은 짝을 찾기가 어렵다. 강한 남자가 위험하다고 생각한다면, 약한 남자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곰곰이 지켜본 뒤 최종적으로 판단을 내리기 바란다고 피터슨은 말하며, "아이들이 스케이트보드를 탈 때는 방해하지 말고 내버려 두라"고 11번 째 규칙을 인생을 위해 지혜로 남겼다.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을 누르시면 보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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