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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노자가 꿈꾸는 이상형은 성인(聖人)이다.

3017.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11월 19일)

노자가 꿈꾸는 이상형은 성인(聖人)이다. 내일 대구에서 할 강의 주제가 '성인'이다. 노자가 말하는 '성인' 이전에, 내가 알고 있던 성인이라는 말을 우선 정리해 본다.

율곡 이이는 자기 구원이란 성인이 되는 거라 했다. 그 자기 구원의 길을 산의 등산에 비유했다. "산을 만나는 세 가지 층위가 있다. 산이 있다더라는 소문을 들은 사람, 산을 제 눈으로 올려 다 본 사람, 그리고 직접 산을 밟고 올라가 땀을 훔치며, 눈에 가득한 전망을 누리는 사람이 그것이다." 1단계가 독서이고, 2단계가 이해, 3단계가 체화(體化)이다.

불교에서는 이 3단계를 '문(問)/사(思)/수(修)'라 한다. 문사수(聞思修), 들을 문, 생각 사, 닦을 수. 들었으면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 자기 것을 만들어야 한다. 스스로 생각하라는 것은 자기를 여과시키라는 뜻이다. 자신의 체로 걸러 받음이다. 그러고 나서 행하라는 것이다. 그것을 일상에 옮기라는 것이다.

우리는 왕이 되는 것보다 더 높은 성공의 경지에 올랐다는 뜻으로 쓰는 한자가 聖(성)자를 사용한다. 예를 들면, 음악(音樂) 최고 성공인을 악성(樂聖), 최고의 바둑 성공인을 기성(棋聖), 詩의 최고 성공인은 시성( 詩聖), 인간 최고의 성공 경지에 오른 성인(聖人)이라 한다.

이렇게 인간이 도달 할 수 있는 최고의 성공 경지 핵심에 있는 '聖'자는 '耳(귀)'와 '口(입)' 그리고 '王(왕)'자, 이 3 글자의 뜻을 함축한 글자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에 성공적으로 올랐을 때만 붙여주는 '聖'자를 쓰는 순서이다. '성'자는 '耳(귀)' 자를 맨 먼저 쓰고, 그 다음에 '口(입)' 자를 쓰고, 마지막으로 '王(왕)' 자를 쓴다. '耳(귀)'를 맨 먼저 쓰는 이유는 남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듣는 것이 최우선이기 때문이고, 귀로 다 듣고 난 후에 입을 열어야 상대가 만족하기에 때문에 '입(口)'을 나중에 쓰게 만든 것이고, 마지막에 '王' 자를 넣은 것은 먼저 듣고 나중에 말 한다는 것은 왕이 되는것 만큼 어렵다는 뜻이다.

공자도 60 세가 되어 서야 "이순(耳順)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했을 정도로 어려운 것이, 먼저 모두 다 듣고 나중에 말을 하는 것이다. '以聽得心(이청득심)'이라는 말이 있다. 즉 '마음을 얻는 최고의 방법은 귀를 기울여 듣는 것'란 말이다.

'聖人'은 먼저 남의 이야기와 진리(眞理)의 소리, 그리고 역사(歷史)의 소리를 모두 다 조용히 경청하고 난 후에 입을 열어 말을 한다. 그런데 열심히 듣는다고 해서 다 들리는 것이 아니다. 들을 수 있는 귀를 갖추었을 때 비로소 다 들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순(耳順)이란 타인의 말이 귀에 거슬리지 않는 경지이며 어떤 말을 들어도 이해를 하는 경지이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모든 걸 포용하는 경지이다. 말 배우는 것은 2년이면 족하나, 경청을 배우는 것은 60년이 걸리는 어려운 일이지만, 마음을 얻기 위해, 진리를 깨닫기 위해, 지혜를 터득하기 위해, 귀를 열어야 한다.

이순(耳順)의 내 귀에 지금도 거슬리게 들리는 말이 있다는 것은 아직도 수양이 부족하다는 증거가 아닐까? 여기에 더하여 아직도 듣는 것은 뒷전이고 말이 먼저 튀어 나온다.

나는 이 성인을 내가 꿈꾸는 '자유인'으로 읽는다. 우리 말로 성인하면 '윤리적으로 완벽한 사람' 정도로 생각하기 쉬우나, 성인의 본래 뜻은 이런 윤리적 차원을 넘어, 말하자면, '특이한 감지 능력의 활성화'를 통해 만물의 근원, 만물의 '참됨', 만물의 '그러함'을 꿰뚫어보고 거기에 따라 자유롭게 물 흐르듯 살아 가는 사람을 말한다고 본다. 성인의 성(聖)자를 다음과 두 가지로 푼다. 사전에서의 해석이 우리를 오해하게 한다. '성(聖)'을 "함부로 가까이할 수 없을 만큼 고결하고 거룩함"으로 풀이하기 때문이다. 어떤 초월적인 존재적 실체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도올은 성인을 '귀가 밝은 사람", "소리를 잘 듣는 사람"으로 본다. 소리를 잘 듣는다고 하는 것은 고대 사회에서 일차적으로 신의 소리를 잘 듣는 거다. 그러나 오늘날 인문정신으로 말하자면 사람의 소리를 잘 듣는 거다. 다시 말해 그런 사람은 총명한 사람이고, 지혜로운 사람이다. 더 나아가, 노자의 생각은 신의 소리를 잘 들을 줄 알고, 사람의 소리를 잘 알아듣는 자만이 통치의 자격이 있다고 본다. 타자를 다스린다는 것은 당연히 타자의 소리를 들을 줄 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신의 계시(드러날 정, 呈)를 듣는다(이, 耳)는 것이다. 신의 계시를 듣는다는 것은 곧 인류역사의 보편적 정칙을 깨닫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깨달은 것이 바로 지혜이다. 이 지혜를 얻어야 우리는 자유인이 된다.

유교에서 말하는 성인과 노자의 성인은 다르다. 유교의 성인은 세속적 도덕규범의 완성자지만, 노자가 말하는 성인은 그러한 도덕 규범을 초월하는 상도(常道)의 내재적 생명 가치를 구현하여 일체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자이다. 어원적으로 귀가 밝아 보통 사람이 감지하지 못하는 것도 잘 감지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사람이다.

노자가 말하는 '성인'은 '무위(無爲)를 실천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무위지사(無爲之事)" 속에서 사는 사람이다. 무위(無爲)는 말 그대로 하면 행위가 없음(non-action)이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서 무위도식 하거나 빈둥거린다는 뜻이 아니다. 도올 김용옥 교수에 의하면, 여기 '무'를 '없다'라는 명사로 보지 말고, '지운다', '버린다'라고 하는 동사로 보라 한다. 나는 그래 '무'를 그냥 없는 게 아니라, 다른 이를 위해 비우거나 버리는 것으로 보았다. 나는 법정 스님이 말하는 무소유도 아무 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게다가 소유하고 있는 물건의 물성(物性)을 지키는 것으로 본다.

무위의 반대되는 개념이 유위이다. 보통 인간사에서 발견되는 것들로 무엇인가를 자꾸 하면 할수록 사태가 엉클어져 가는 상황을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쉽게 느낄 수 있다. 다음 같은 행위들이다.
- 인위적 행위
- 과장된 행위
- 계산된 행위
- 쓸데 없는 행위
- 남을 의식하고 남 보라고 하는 행위
- 자기 중심적 행위
- 부산하게 설치는 행위
- 억지로 하는 행위
- 남의 일에 간섭하는 행위 등 일체의 부자연스러운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거다.

무위지사(無爲之事)  또는 무위지위(無爲誌爲-무위의 위)는 행동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너무 자발적이어서 자기가 하는 행동이 구태여 행동으로 느껴지지 않는 행동, 그래서 행동이라 이름할 수도 없는 행동으로 '함이 없는 함'이다. 이런 무위를 실천하는 사람들이 보이는 모습은 내일 이야기로 넘긴다. 어쨌든 나는 이런 무위를 실천하는 자유인이고 싶다. 그게 노자가 꿈꾸는 '성인'이라고 본다. 그 성인이, 인문 운동가의 입장에서 보면, 자유인이다. 진정한 자유인은 자기 확신과 자기 존경으로 탁월(자유자재함)을 수련하여 어제보다
아는 나를 만드는 사람이다. 그 반대 어제와 똑같이 주위의 인정에 목마른 자발적인 노예이다.

노자가 꿈꾸는 성인은 일상에서 다음 여섯 가지를 실천한다. 새겨 볼 일이다. 여기서 성인은 자연의 운행과 존재 형식을 모델로 삼는 가장 높은 수준의 인격 자이다.
① 無爲之事(무위지사)하고
② 不言之敎(불언지교)하고
③ 萬物作焉而不辭(만물작언이불사)하고
④ 生而不有(생이불유)하고
⑤ 爲而不恃(위이불시)하고
⑥ 功成而弗居(공성이불거)한다.

이를 한국어 말하면, 성인은
① 무위로써 일을 처리하고,
② 말로 하지 않는 가르침을 수행하고,
③ 모든 일이 생겨나도 참견하지 아니하고,
④ 낳으면서 소유하지 않고,
⑤ 할 것 다 되게 하면서도 거기에 기대려 하지 않고,  
⑥ 공이 이루어져도 그 공을 주장하지 않는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내일 공유한다. 어제는 모처럼 가는 가을을 향유하려고, 오랜만에 주말 농장에 갔다. 나무들이 형형색색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우리는 이걸 단풍이라 한다. 단풍은 자신을 공격할지도 모르는 해충에 대한 나무의 경고다. 진딧물 같은 곤충을 향해 겨울을 나는 자신의 경계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몸에 있는 것을 전부 떨구고, 색 전체를 바꾸는 행위에는 엄청난 신체적 비용이 따른다. 그러므로 또렷한 가을빛을 내는 나무는 주위의 그 어떤 나무보다 건강하다. 나무의 겨울나기는 먹을 것을 극한까지 비축해 견디는 동물의 그것과 정반대로 이루어진다. 즉 축적은 나무의 생존 방식이 아닌 것이다. 나무는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비우고 버리는 것으로 혹독한 겨울 준비를 마친다.

단풍을 노년에 비유하면 생각이 더 풍성해진다. 가령 나이가 들수록 잔소리가 많아지는 건 경험이라는 빅데이터가 쌓여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야 잘될 것이고, 저렇게 하면 망할 것이라는 그 나름의 데이터 말이다. 하지만 들을 귀가 없는 사람에게 하는 좋은 말은 잔소리일 뿐이다. 이걸 인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나이가 들면 끝까지 경청하는 것이 어렵고, 중간에 말을 자르거나 자주 노여워하는 것도 사실이다.

가을 단풍을 보며 아름다움에는 고통이 따른다는 걸 기억하는 것도 좋은 공부다. 비우고 덜어내는 건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가을 숲길을 걸으며 이제부터 라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으로 자신을 온건히 지키는 나무의 지혜를 돌아보고 싶다.


단풍/박숙이

그가 물었다
나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오랜 고심 끝에 나는 대답했다
마음에 담아본 적이 없다고

그랬더니, 며칠 만에 쓸쓸히 찾아온 그
짐승처럼 저돌적으로 밀고 들어왔다

그것이 자의든 타의든 간에
어쨌든 속수무책으로 서로의 본능을 다 태웠다

아 나의 저항이 오히려
그의 태도를 확실히 불붙도록 만든 셈이 되고 말았다

그러니 대책 없이 건드린 죄여
네가 다 책임져라!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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