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어제에 이어, 오늘 아침은 '산상수훈의 팔 복'중 제 2행복에 대한 차신부님의 설명과 나의 이해를 공유할 생각이다. 오늘도 그 '팔 복'을 우선 다시 나열해 본다. 지겹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삶의 지혜를 주는 명 문장들이다.
①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②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③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④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⑥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⑦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⑧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오늘 아침은 제 2복인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라는 문장을 곰곰이 생각한다.
- "슬퍼하는 사람들"에서 어떤 슬픔인가? 히브리어로 슬픔은 '사파드(Sapad)'라고 한다. 이 말은 '애통하면서 우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 마태 복음은 이 말을 '펜툰테스(Penthountes)로 번역한다. 이 말은 '상실의 아픔', 사별 등 매우 소중한 것을 잃은 극심한 슬픔이다. 루가 복음에서는 '클라이온테스(Klaiontes)'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그건 "땅을 치면서 우는 것'을 뜻한다. '눈물'을 생각하면, 헥토르의 장례식으로 끝을 맺는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이다. 그의 죽음 앞에서 우는 트로이 사람들의 눈물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우는 것밖에는 할 수 없는 우리 모두의 눈물을 닮았다. 슬픔 앞에 인간인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눈물을 흘리는 일 밖에 없는 것일까?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위로를 받고 의지하고 싶을 만큼 힘들다는 말이다.
- 문제는 슬퍼하는 사람이 왜 행복할까 이다. 하느님이 위로를 해주시기 때문이라고 차 신부님은 풀어 주시며, "슬픔은 비와 같다. 장미꽃을 피울 수도 있고, 진흙탕을 만들 수도 있다. 슬픔도 선택의 문제"라고 말씀하셨다. 너무 슬플 때는 그 슬픔을 하느님에게 맡기면, 놀라운 위로와 힘이 생긴다고 한다.
- "슬픔과 절망을 겪지 않은 사람의 삶은 싱겁다. 그래서 누리는 행복도 싱겁다." 난 이 말씀에 동의한다. 우리가 명심할 것은 슬픔의 끝에는 반드시 위로가 있다는 것이다, 그 위로는 슬픔의 크기와 비례한다. 그리고 일상에서 극심한 슬픔이 닥쳐도 두렵지 않다, 왜냐하면 고통의 끝에 무엇이 있는 줄 알기 때문이다.
인생은 폭풍우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가 아니라 빗 속에서 어떻게 춤을 추는가 하는 것이다. 류시화 시인에게 들은 말이다. 언젠가 책을 내게 되면, 이런 제목을 선택하려고 생각한다. 『나는 빗 속에서 춤을 추었다.(가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고통은 추락이 아니라, 재탄생의 순간이고 새로운 여행의 시작이다. 류시화 시인에 의하면, 가톨릭에서는 이 고통을 펠릭스 쿨파, '행운의 추락'이라고 표현한다고 했다. 상처가 구원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고통을 겪고 슬픔에 잠겨 있을 때 신과 가장 가까워진다. 아플 때 에고의 껍질이 부서지기 때문이다. 상처 받은 자에게 사람들은 기도를 부탁한다. 다른 누구보다도 그 사람의 기도가 신에게 가 닿을 만큼 절실하고 강력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삶이 우리를 밖으로부터 안으로 불러들이는 방법이 상처이다. 우리의 삶이 상처보다 크다. 모든 상처에는 목적이 있다. 어쩌면 우리가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가 우리를 치료하는지도 모른다. 내가 상처라고 생각하고 여긴 것은 진정한 나를 찾는 여정과 다르지 않을 때가 있다. 삶의 그물망 안에서 그 고통의 구간은 축복의 구간과 이어져 있을 수 있다. 축복이라는 영어 blessing은 프랑스어 blesser에서 왔다. 프랑스어 blesser는 '상처 입다'란 뜻이다. 어원이 같다. "축복을 셀 땐 상처를 빼고 세지 말아야 한다."(류시화) 멋진 문장이다.
오늘 우리는 <프로젝트60>에서 나희덕 시인을 한국전자통신연구원으로 초대하여 강의("시는 나의 닻이고 돛이고 덫이다', 오후 3시)를 듣고 함께 식사도 한다. 그런데 난 서울 학교 강의로 참석하지 못한다. 아쉽다. 나는 지난 9월에 한 주일간 나희덕 시인의 시만 공유한 적이 있다. 나는 시인의 시 중에 짧은 <서시>를 가장 좋아한다. "단 한 사람의 가슴도/제대로 지피지 못했으면서도/무성한 연기만 내고 있는/내 마음의 군불이여/꺼지려면 아직 멀었느냐". 오늘도 나희덕 시인의 시를 공유한다. 이 시를 읽고 늙은 등나무를 사진 찍은 적이 있다.
후회도 없이/나희덕
뒤엉켜 살지 않고는 온전할 수 없었던
등나무, 그 시간들이
이제 뼈만 남아 흐르고 있다
지주목이든 제 식솔이든
휘감고 뻗어가는 것만이 진실이었다는 듯
무성했던 집념의 흔적들을 내보인다
초록의 이불 걷어내고야
등불 같던 꽃송이 깨뜨리고 나서야
냉기 가득한 뼛속에 바람이 분다
더 이상 휘감을 것도 없는 날에는
허공을 허우적거리다가
제 몸이나 몇바퀴 더 감아보면서
하늘이 머리카락 잡아당기면
끄덩이 잡힌 채 벽에 머리나 찧으면서
#인문운동가_박한표 #대전문화연대 #사진하나_시하나 #나희덕 #와인복합문화공간_뱅샾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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