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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다시 '습정양졸'

1552.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2021년 2월 28일)

 

2021년에 '건너가야' 힘을 주는 동력을 "습정양졸(習靜養拙)"에서 찾았다. 그대로 하면, '습정양졸' "고요함을 익히고 고졸함을 기른다" 말이다. 여가서 '' '' 통속이다. 졸은 '고졸하다'라고 사용되는 말이다. "기교는 없으나 예스럽고 소박한 멋이 있다" 말이다. 도자기 가게에 가면, 기계에서 찍어 나온 흠잡을 데가 없이 반듯반듯하고 기하학적으로 완벽한 구도를 가진 도자기는 상식적이라 눈길이 간다. 뭔가 균형도 잡히지 않은 같고, 어딘가 거칠고 투박한 같으면서도 구수하고 은근하고 정답고 살아 숨쉬는 듯한 것이 마음에 끌리고 편하게 느껴진다. 그게 내가 '키우고 싶은 '양졸(養拙)' 이다.

 

노자 <도덕경> 45장을 보면, 5 가지 '고졸(古拙)의 멋' 세계, 즉 결(), (), (), (), () 모습을 보여준다. 노자는 그게 5가지 도()의 세계라고 한다. 세계를 키우는 것이 2021 내가 건너가야 목표이다. 금년 초에 설정했는데, 어영부영하다 보니 벌써 달이 지났다. 오늘이 벌써 2 마지막 날이다. 다시 건너가야 세계를 소환한다.

 

1. 대성(大成)의 세계에서 결()의 세계로 건너가기 : 대성약결(大成若缺) - 'Big ME'에서 'Little ME' 건너가서, '완전히 이루어진 것은 모자란 듯하다' 것을 알고, 조금 모자란 살자.

 

2. 대영(大盈)의 세계에서 충()의 세계로 건너가기 : 대영약충(大盈若沖) - 가득함에서 비움으로 건너가서, '완전히 가득 것은 듯하다' 것을 알고, 뭔가 조금 듯하게 살자. 채우려 하지 말자.

 

3. 대직(大直)의 세계에서 굴()의 세계로 건너가기 : 대직약굴(大直若窟) - 직진, 바른 길에서 곡선, 구부러진 길로 건너가서, '완전히 곧은 것은 굽은 듯하다' 것을 알고, 뭔가 반듯하지 못한 것처럼 살자.

 

4. 대교(大巧)의 세계에서 졸()의 세게로 건너가기: 대교약졸(大巧若拙) - 화려와 정교함에서 질박과 서투름으로 건너가서, '완전한 솜씨는 서툴게 보인다' 것을 알고, 뭔가 어설프고 서툴게 보이도록 하자.

 

5. 대변(大辯)의 세계에서 눌()의 세계로 건너가기: 대변약눌(大辯若訥) - 웅변에서 눌변으로으로 건너가서, 완전한 웅변은 눌변으로 보인다' 것을 알고, 뭔가 말도 제대로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같이 보이도록 하자.

 

<도덕경> 45장을 내 나름대로 번역하면 이렇다. "다 완성된 것도 빈틈이 있어야 그걸 쓰는 데 불편함이 없고, 가득 채웠더라도 빈 곳이 있어야 언제라도 쓸 수 있다. 구불구불한 길이 바른 길이며, 질박하고 서툴러 보인 것이 화려하고 정교한 것이며, 어눌한 눌변이 곤 완벽한 말 솜씨인 것이다. 고요함은 시끄러움을 극복하고, 냉정함은 날뜀을 극복한다. 맑고 고요함(淸淨)이 세상의 표준(천하의 정도)이다."

 

'벌써' 시작한 2월이 '벌써" 떠나간다. 오늘이 2월의 마지막이고, 내일부터 3월이다. 나는 매년 2 이면, 오늘 공유하는 시를 불러낸다. 그냥 2월에게 편지 보내고, 우린 3월을 봄과 함께 '힘차게' 마중 가야 한다. 오랜만에 정철의 <사람사전> 펼쳤다. 봄을 다음과 정의한다. "겨울이 갔다는 신호, 여름이 온다는 신호. 추위가 더위로 바뀐다는 신호, 신호등이 파란불에서 빨간 불로 바뀔 아주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노란 같은 . 봄날은 짧다. 봄날은 간다." 봄날은 짧다. 2월이 그렇게 것처럼. 빨리 겨울잠에서 깨어나야 한다. 벌써 주말농장에 밭을 갈기 시작했다. 이쯤 밭에 나가면 김훈의 글을 기억한다.

 

해가 뜨기 전, 봄날의 새벽에 밭에 나가면, 땅 속에서 얼었던 물기가 반짝이는 서리가 되어 새싹처럼 땅 위로 피어난다. 이게 봄 서리다. 흙은 늦가을 서리에 굳어지고, 봄 서리에 풀린다. 김훈은 "봄 서리는 초봄의 땅 위로 돋아나는 물의 싹"이라고 말한다. (<자전거 여행 1>) 싹들은 헐거워진 봄 흙 속의 미로를 따라서 땅 위로 올라온다. 흙이 비켜준 자리를 따라서 풀이 올라온다. 이건 놀라운 생명의 힘이다. 생명은 시간의 리듬에 실려서 흔들리면서 솟아오르는 것이어서, 봄에 땅이 부푸는 사태는 음악에 가깝다. 경이(驚異)이다.

 

 

2월 편지/홍수희

 

어딘가 허술하고

어딘가 늘 모자랍니다

 

하루나 이틀

꽉 채워지지 않은

날수만 가지고도

2월은 초라합니다

 

겨울나무 앙상한

가지 틈새로 가까스로

걸려 있는 날들이여,

 

꽃빛 찬란한 봄이

그리로 오시는 줄을

알면서도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1년 중에

가장 초라한 2월을

당신이 밟고 오신다니요

 

어쩌면 나를

가득 채우기에

급급했던 날들입니다

 

조금은 모자란 듯 보이더라도

조금은 부족한 듯 보이더라도

 

사랑의 싹이 돋아날

여분의 땅을 내 가슴에

남겨두어야 하겠습니다

 

 

내가 다시 건너가야 세계는 고졸(古拙) 마을이다. 마을은 화려하게 꾸미고, 반지르르하게 다듭고, 매끈하게 가꾸고, 곧바르게 깎는 인위적이고 가공적인 모든 것과 상관 없는 동네이다. 고풍이 돌고 뭔가 서툰 듯한 , 그러면서도 내면에서 풍기는 어떤 같은 것을 지니고 있는 세계이다. 어딘가 모자란 듯하고, 수줍은 듯한 데가 있어야 내면에서 번져 나오는 신비스러움과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준다.

 

<도덕경> 45장의 마지막 문장에 주목한다. 맑고, 고요함, 청정이 모든 힘의 근원이다. 부분의 해석을 나는 다음과 같이 한다. '날뛰면서 부산을 떨면 열이 나서 추위를 이겨 내지만 이렇게 열이 나고 더워진 것은 고요함()으로 이길 있다는 , 따라서 맑고 고요함이 최고이며, 세상의 표준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습정(習靜, 고요함을 익힘)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45장을 여러 읽으면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든다. 큰 그릇은 흙이 많이 들어간 그릇이 아니라 빈 공간이 많은 그릇을 의미한다. 나는 이것을 '그릇 론'이라 부른다. 자신을 큰 그릇으로 만들려면,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생각해야 한다. 모자란 듯이 보이는 것이 크게 이루어진 것이라 생각하고, 빈 듯이 보이는 것이 오히려 가득 찬 것으로 생각하고, 구부러진 것이 오히려 크게 곧은 것으로 생각하고, 서툰 것이 오히려 크게 솜씨 좋은 것으로 생각하고, 더듬더듬 거리는 말이 크게 말 잘하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부산을 떨면 추위를 이겨내지만, 이렇게 더워진 것은 고요함()으로 이길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맑고 고요함(淸靜) '하늘 아래 바름(모든 힘의 근원, The still point)'라는 것이다.

 

코로나-19가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뭔가를 이룩해 보겠다고 쓸데없이 만용이나 허세를 부리며 설치지 말고, 맑고 고요함(淸靜)을 지키며 의연하게 살라는 말이다. 조한혜정 연세대 명예교수의 말처럼, "지금은 고요의 시간을 되찾아야 할 때다. 바쁜 와중에 짬을 내 동네 숲에 들어가 고요의 시간을 갖는 것만으로, 인터넷을 끄고 몰려드는 정보 자극을 차단하는 저녁을 맞는 것만으로도, 새벽에 일어나 눈을 감고 의식을 가라앉히는 것만으로도,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히 대하는 수행만으로도 생명의 에너지는 회복되기 시작할 것이다. ‘살아남을 자각하는 존재가 프랙털의 무늬처럼 반복적으로 나타날 때 세상의 기운이 바뀌고 새로운 축의 시대가 열린다. 그간 모든 것을 아웃소싱하면서 살아온 나 자신을 위해 수행을 시작하려 한다."

 

매주 일요일은 서양의 고전을 읽으며, 묵상하는 시간이다. 다음은 배철현의 <수련> 읽으며, 묵상했던 내용이다. 나를 온전한 ''로 인정해 주는 것은 둘이다. 하나는 ‘지금’이라는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여기’라는 장소다. ‘지금’과 ‘여기’가 없다면, 나로 존재할 수 없다. 이 둘은 만물을 현존하게 만드는 존재의 집이다. 과거를 삭제하고 미래를 앞당겨 이 순간을 종말론적으로 전환하는 것이 ‘지금’이라면, ‘여기’는 ‘나’라는 존재를 새롭게 인식하게 만들어 줄 뿐만 아니라, ‘나’를 생경한 나로 전환시켜주고 더 나은 나로 수련 시키는 혁명의 장소다.

 

사람들은 항상 ‘저기’를 바라보고 여기를 직시하지 못한다. 그들은 누구를 만나, 눈을 보고 대화하지 않고 상대방이 아닌 허상을 떠올리고 말한다. 자신의 편견을 일방적으로 토로하는데 안달하며, 자신을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 자신의 지식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의견을 전시한다. 그들에게 대화와 토론은 자화자찬의 전시장이거나, 아니면 상대방을 창피주기 위한 격투경기장이다. 그들의 머리는 항상 자신이 가본 적도 없고 경험한 적도 없는 허상에 사로잡힌 장소인 ‘저기’에 홀려 있다. ‘저기’를 위해 ‘여기’를 어리석게 희생시킨다.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이, 동물이, 사물이 ‘신()적’이란 사실을 망각한다. 신적인 존재는 항상 ‘여기’에 온전히 몰입한다. 내가 보는 모든 식물과 동물은 항상 자신에게 몰입되어 있어 숭고하고 아름답다. 그래서 유일하고 독특하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자신에게 몰입하지 못하고, 자신이 아닌 ‘저 것’을 흉내 내고 부러워한다.

 

‘여기’와 ‘저기’의 경계가 타부(taboo)이며 ‘현관(玄關)'이다. 이 경계에는 항상 괴물이 등장한다. 이 경계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수련이 필요하다. 그 괴물은 오랫동안 수련하고 준비하지 않은 자들을 과거로 돌려보낸다. 자신의 정체성을 알려는 비극적인 인물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고향 테베로 들어갈 참이다. 역병에 시달리고 있는 이 도시 성문에는, 스핑크스라는 괴물이 앉아 있다. 스핑크스Spinx는 그리스어로 ‘(대답을 하지 못하면, 그 대상을) 목 졸라 줄이는 존재’라는 뜻이다. 스핑크스는 오이디푸스에게 묻는다. “아침에는 네발로 걷고, 점심에는 두발로 걷고, 저녁에는 세발로 걷는 존재가 무엇이냐?” 오이디푸스 이전에는 그 누구도 이 질문을 대답하지 못했다.

 

대부분은 자신이 언젠가 읽은 혹은 들은 정보를 가지고 대답한다. 그들은 대개 이런 식으로 대답한다. “노자가 이렇게 말했고 예수가 이렇게 말했다. 혹은 괴테가 이런 식으로 표현했고 셰익스피어가 이렇게 노래했다.” 자신이 생각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말한 내용의 반복은 진부陳腐하다. 그것들은 겉보기에는 그럴듯하지만, 썩은 고기의 악취일 뿐이다. 위대한 인물들은 누구를 인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오해를 받아 종종 죽임을 당한다. 예수가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인용했는가? 노자가 도덕경을 들먹였는가? 셰익스피어는 단지 셰익스피어일 뿐이다. 괴테는 스스로 고민하고 인생의 해답을 나름대로 찾으려는 파우스트였다. 우리는 교육을 자신하고 상관없는 숫자와 정보를 암기하고 신속하게 말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내가 가진 핸드폰에 저장된 정보가, 서울시 전체 인구가 지닌 지식보다 정확하고 신속하다. 교육은 개인의 지닌 유일한 개성을 자극하는 체계다. 교육은 그 존재가 더욱더 그 존재 답게 되기를 바라는 희망의 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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