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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인간이다."

1년 전 오늘 아침에 공유했던 시입니다.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속절없이 세월은 흐르고, 일상은 코로나19로 무너졌다. 벌써 2월도 내일이면 마지막 날이다. 다행히 올해는 29일까지 있을 뿐이다. 보통 이맘 때면, 3월 개학으로 들떠 있을 때인데, 올해는 창궐하는 바이러스로 모든 일정들이 뒤로 미뤄지었다. 이 바이러스와의 전쟁은 언제 끝날까?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처럼, "나무는 말을 한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듣지 못하는 것이다." 그 이유를 시인은 "말을 걸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질문하지 않는다. 니체에 의하면, 인간은 대답할 수 있는 질문들만 듣는다고 했다. 우리는 대답할 수 없는 질문 앞에서는 도망친다. 사실 우리들의 삶 속에서는 대답하기 좋은 질문보다는 대답함으로써 고통스러워지는 질문, 대답을 자꾸 미루고 싶은 질문, 대답 자체가 곤란한 질문들로 가득하다. 어쩌면 살아 가면서 정말 중요한 질문들은 대답하기 힘든 것들이 더 많다. "왜 "호모 데우스"를 꿈꾸며, 인공지능이 인간지능을 추월하려는 소위 '4차산업혁명'을 운운하는 이 시대에 코로나19가 창궐하는가?" "우리가 진실로 꿈꾸는 삶은 무엇인가?"

정여울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에 어떻게든 더 나은 대답을 내놓기 위해 고민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성장한다"고 했다. 내 생각으로도 대답하기 어렵거나 할 수 없는 질문들에 대답하면서 우리는 그동안 몰랐던 우리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문화는 질문하지 않는다. 학회에 가 보면, 예상 질문을 가져 오라고 한다. 코로나19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서두가 너무 길었다.

그리스 신화에도 전염병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스 비극작가 소포클래스의 『오이디프스 왕』에 나오는 스핑크스가 테베라는 곳에 전염병을 퍼트린다. 그 이유는 자기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살고 있는 인륜을 어긴 자에게 천벌을 주기 위해서이다. 그 범인이 오이디푸스이다. 그는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찾기 위해, 전염병이 창궐하는 테베에 들어가려 하자, 스핑크스가 그의 길을 막고 질문한다. "목소리는 하나인데, 아침에는 네발로 걷고, 점심에는 두발로 걷고, 저녁에는 세발로 걷는 동물이 무엇이냐?" 이 질문을 다르게 말하면, "너는 네가 누구인지 아느냐"이다. 그 질문에 오이디프스가 "인간이다"라고 대답하자, 스핑크스는 스스로 절벽에 몸을 던져 죽는다. 오이디프스가 테베에 들어가니 전염병이 멈추었다.

왜 초 연결 시대를 앞두고, 코로나19가 그 세계로 진입하려는 것을 막는가? 배철현 선생은 "코로나19는 인간이 누구인지, 삶의 의미는 무엇인지, 깊이 묵상하고, 자신이 누구인지 추적하라는 새로운 지침이다"고 자신의 묵상에서 쓰고 있다. 그러면서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가 살고 이 21세기는 예전의 문명과 다르다. 초고속 기차와 초고속 비행기로 세상이 초 연결되었다. 그리고 인터넷으로 이젠 하나의 마을처럼 '지구촌' 사회가 되었다. 사실 예전에는 전염병이 한 장소에 제한되어, 다른 지역으로 퍼져 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우리 자신이 만들어 놓은 교통망으로, 한 곳에서 일어난 전염병이 다른 지역으로 빠르게 퍼져 나간다. 바이러스가 인간이라는 숙주를 통해서 온 세계로 어렵지 않게 전염된다. 중국의 우한에서 대구까지.

배철현 선생의 지적처럼, 2020년 코로나19는 우리들, 호모 사피엔스에게 삶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요구하고 있다. 배교수는 늘 주장한다. 우리가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적절한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 통과해야 할 장소를 그는 경계, 문지방, 현관(玄關) 등과 같은 말로 표현한다. 여기서 나는 '문지방(門地枋)'이란 말이 마음에 든다. 우리들의 옛날 집을 보면, 문지방은 이전 단계와 구분하기 위해 위로 돋은 구조물이다. 이 문지방을 통과하려는 자가, 기존의 방식대로 아무런 생각도 없이 넘어가기를 시도한다면, 문지방에 걸려 넘어질 것이다.

나는 문지방을 넘지 못하고, 코로나19로 넘어진 것이 '신천지'라고 본다. 그 문지방에서 지켜본 스핑크스같은 괴물이 코로나19일 수 있다는 말이다. 신종 코로나19 바이러스는 고도의 초(超) 연결사회에 제대로 편승하도록 진화되었다. 이 바이러스는 숙주 살해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다른 숙주로 옮겨 자체 증식하는 것이 최고 목표다. 감염 대상을 찾지 못하면 숙주를 공격한다. 생존본능이 더 큰 이 바이러스는 숙주를 급사(急死)시키지 못한다. 자폭하기 때문이다. 치사율이 낮고 감염 속도가 빠른 것, 코로나19는 사회성이 매우 좋다.

이런 바이러스가 공격한 것은 아직도 폐쇄성과 비밀주의로 버티고 있는 집단이다. 그런 단체로부터 우리는 지금 당하고 있다는 것이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서양미술사는 그리스 미술을 재해석해 온 역사라고 우리는 말한다. 왜 그리스 미술을 고전으로 삼는가? 왜 그리스를 계속해서 재생산하는가? 보기에 좋고 예쁘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 안에 구현되어 있는 어떤 정신, 어떤 가치를 자신들의 이상으로 삼은 결과이다. 그런 그리스가 오래 가지 못하고 로마에게 점령당한다. 그런 로마는 1000년을 유지한다. '왜 그럴까'에 대한 대답에서 '신천지'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고대 그리스가 쇠퇴한 이유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플라톤이 이상적인 국가로 여겼던 스파르타는 배타적인 국가였기 때문이다. 약자를 배타시하고, 타자를 괴물로 취급하는 사회는 점점 더 폐쇄적인 사회로 굳어진다. 자신이 보고 경험한 이데아가 결정적이라 거나 최종적이다 또는 유일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배타적인 독선이 되고 만다. 칼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의 주장에 따르면, 플라톤의 사상이 위대하기는 하지만, 그가 지니고 있던 폐쇄적인 사회에 대한 이상적 관점은 우리 사회를 쇠퇴의 국면으로 몰고 갈 것이라고 분석한다. 그래서 로마의 초기 지도자들은 그리스의 위대한 정신은 계승하되 실수는 반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다시 말하면, 고대 그리스 인문 정신은 따라가되 배타성을 경계하겠다는 뜻이다. 따라서 로마는 끊임 없이 도로를 건설했다. 이건 로마인들이 세계와의 소통, 개방성을 추구했다는 뜻이었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중국은 북방 이민족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다. 그 벽은 외부의 침입을 막아 주지면, 동시에 그 벽 때문에 열린 사회가 되지 못한다. 신천지의 폐쇄성이 중국의 만리장성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인문 정신이란 개방적인 사회, 열린 사회를 지향하는 것이다. 그리고 늘 약자와 타자를 존중하는 정신이다. 그리스인들은 지식의 향연이란 '심포지엄(symposium)'을 즐겼다. 이 말은 '함께'라는 sym과 '잔'이라는 posium의 합성어이다. 그러니까 그 뜻은 '함께 마시자'는 뜻이다. 그런데 로마 인들은 그 심포지엄을 콘비비오(convivio)로 번역하였다. '함께'라는 con과 '살자'라는 vivio의 합성어로, '함께 살자'라는 뜻이다. 그리스 사회에서는 지혜의 향연이 함께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이었다면, 로마에서는 함께 살자라는 정신으로 바뀐 것이다. 신천지는 함께 살기 위해 빨리 개방해야 한다. 함께 읽는 오늘 아침 시처럼, '나무는 늘 말을 하고 있는데, 우리가 듣지 못하는 것이다."

나무는 말을 한다/이문재

나무는 말을 하지 않는다

까닭이 있다
나무가 말을 하지 않는 까닭은
우리가 말을 걸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나무는 말을 한다
나무는 늘 말을 하고 있는데
우리가 듣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가 나무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는 것이다
나무는 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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