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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자기 자신을 신뢰하고 균형 잡혀 있는 사람은 사소한 일에 지나치게 분노하지 않는다.

3년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1년 8월 15일)

우리는 프로스트의 이 시를 암송해야 한다. 이 시는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고 싶은, 즉 자신이 주인공으로 이루어진 삶을 살고 싶은 사람은 늘 기억해야 한다. 그런 사람은 자기 자신을 리더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우리가 말하는 진정한 리더이다. ㅇ; 글은 이번 주 <배철현의 월요 묵상>을 잘 읽고 리-라이팅한 글이다.

이 시는 리더의 양심이며 나침반이 될 수 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특히 자기 믿음, 아니 자기 신뢰에서 나오는 자기 신화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기 기만'과는 다르다. '자기 기만'은 보잘것없는 자신을 굉장한 자신으로 포장하여 남들에게 전시하려는 성급한 마음이다. 사실 우리들의 삶은 본래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긴 여정이다. 헤르만 헤세 식으로 말하면, 자신을 향해 쉼 없이 걷는 일이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자기 자신을 만나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힘들다고 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이렇게 시작한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그런데 우리는 자신 자신하고는 상관 없는, 혹은 자기 자신하고 연관된 타인들이 좋다고 제시한 세계관, 종교관, 삶의 철학을 수용하여 자기 삶의 문법을 구축하려 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모래 위해 세운 집처럼 무너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 마음속 깊이 숨어 있는 자신만의 보물을 찾아가는 여행은 숭고하며 감동이다. 왜냐하면 그 여정을 보는 사람들에게 그들도 자신들의 보물을 찾아 나설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주기 때문이다. 리더는 자신에게 리더인 사람이다. 깊은 사고를 통해, 갈림길에서 자신의 혼을 담을 수 있는 선택을 감행한다. 자신에게 리더인 자가 대중에게도 리더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대선까지 그런 리더의 언행을 보고 싶다.

5 행 씩 4단락으로 이루어진 이 로버트 프로스트(1874~1963)라는 미국 시인의 '가지 않은 길' (The Road Not Taken)를 단락별로 나누어  읽어 본다.

(1) 1행-5행
두 개의 길이 노란 숲에서 갈라져 있다.
둘 다 갈 수 없어 섭섭했다.
하나만을 가야 했기에 한참을 서 있었다.
나는 볼 수 있는 데까지 내려다보았다.
길이 덤불로 굽어져 가는 곳까지

리더는 똑같이 좋아 보이는 두 길 중 한길을 택해야 한다. 그는 언제나 한길을 택해야 하는 궁지 속에서 산다. 그래  "두 개의 길" 앞에서 "둘 다 갈 수 없어 섭섭했다." 그래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란  '한참 서 있기', 즉 주저다. 그래 "한참을 서 있었다." 그리고 남들이 볼 수 없는 저 아래 가시덤불 굽어진 곳까지 볼 수 있는 인내와 안목이 있어야 한다.

배철현 교수는 말했다. 리더는 자신에게 리더인 사람이라고.  "자신의 영혼을 다스려, 감동적인 하루를 보낼 수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이끌 수 없다. 자신의 욕망과 욕심을 다스리고 더 나은 자신을 수련하는 자는 하루라는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는다. 시간만이 그를 변화하고 혁신 시킨다. 그런 리더의 하루는 확신과 환호가 아니다. 오히려 ‘주저’와 ‘오해’의 연속이다. 리더는 아무도 시도해 보지 않는 길을 개척해야 하기 때문에 항상 불안하고 초조하여 무슨 일을 한 번에 결정하기를 주저(躊躇)한다. 주저는 신중(愼重)이다. 그는 신중함을 통해, 더 깊이, 더 높이. 더 멀리서 세상을 관조한다. 그는 마치 독수리처럼, 더 높은 곳에서 현실을 파악하고, ‘어두운 숲속’ 너머에 있는 ‘파라다이스’를 찾아낸다. 누구도 자신의 발을 들어 놓은 적이 없는 "어두운 숲"이, 모두를 위한 지름길이란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나 그것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람들을 오히려 그를 오해하고 배척한다."

그래 "나는 볼 수 있는 데까지 내려다보았다." 그 보이지 않는 곳에 해답이 있기 때문이다. 모세는 그런 가시덤불에서 신을 만났고 원효는 그런 동굴에서 깨우쳤다. 프로스트가 사용한 영어단어 'undergrowth'(덤불)는 일반적인 사람들이 염두에 두지 않는 하찮은 장소다. 리더는 그 장소에서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을 발견한다. 리더는 이 두 가지 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일상은 딜레마다. 이 길도 좋아 보이고 저 길도 좋아 보인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에게 유리한 길이 옳은 길이라고 주장한다. 리더와 대중의 차이는 이것이다. 대중은 자신의 의견을 빠르게 주장하지만, 리더는 모든 이들의 서로 다른 요구를 모두 들어줄 수 없기 때문에 안타까워한다. 그래서 리더는 연민(憐憫)한다. 연민을 품은 리더의 특징은 주저와 고민이다. 그는 난제를 가지고 ‘한참 서 있는다’. ‘한참 보기’는 ‘대충 보기’와 다르다. ‘대충 보기’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을 통해, 자신에게 익숙한 대로 보는 행위다. 심지어 다른 사람의 의견은 틀리고 자신의 의견이 옳다고 착각하고 주장하고 심지어는 강요한다. ‘한참 보기’는 고독과 침묵을 오랫동안 훈련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능력이다.

(2) 6행-10행은 그 결단에 관한 내용이다.
나는 똑같이 좋아 보이는 두 개의 길 가운데 하나를 택했다.
그 길이 더 나은 선택이라 여겼다.
풀이 많고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 길로 간다 해도
별다른 흔적이 남지 않을 것이었다.

리더의 일상은 불확실한 선택의 연속이다. 우리들의 삶 자체가 불확실성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리더들에게 중요한 덕목이 등장한다. 자신이 선택한 길이 '더 나은 선택'이라는 자기 신뢰가 있어야 한다. "그 길이 더 나은 선택이라 여겼다." 공 지영작가는 '지금, 여기 그리고 나 자신을 사랑'하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지금-여기'보다 먼저 '나 자신'을 사랑하는 일에 우선 순위를 두자고 말했다. '나 자신'을 더 사랑하고, '나 자신'을 더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말이다. 이건 죽는 그날까지 지켜야 하는 명제라고 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우선 거울 앞에서 자기 자신을 정면으로 보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외치라고 한다. "사랑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소중한 너!"라고. 이게 처음에는 쉽지 않다고 한다. 그래 연습을 하라고  했다.

자기 신뢰가 중요하다. 춘추전국시대 중국 초나라 장왕의 일화 에서 만들어진 “절영지회(絶纓之會)”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여기서 '纓영'은 '갓끈'을 말한다. 장왕이 나라의 큰 난을 평정한 후, 공을 세운 신하들을 치하하기 위해서 연회를 베풀었다.
신하들을 아끼던 장왕은 이 연회에서 자신의 후궁들이 시중을 들게 했다. 연회가 한참 진행되던 중, 갑자기 바람이 불어서 연회장의 촛불들이 일순간에 꺼졌다. 그 순간 한 여인의 비명이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그 여인이 앙칼진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어둠을 틈타서, 누군가가 자신의 가슴을 만졌고, 자신이 그 자의 갓끈을 뜯어 두었으니, 장왕 께서는 어서 불을 켜서 그 무엄한 자를 처벌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자신의 후궁을 희롱한 무례한 신하가 괘씸하고, 자신의 위엄이 희롱 당한 것 같은 노여운 생각이 들 수도 있었겠지만, 그 순간 장왕은 큰 소리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이 자리는 내가 아끼는 이들의 공을 치하하기 위해서 만든 자리이다. 이런 일로 처벌은 온당치 않으니 이 자리의 모든 신하는 내 명을 들어라! 지금 자신이 쓰고 있는 갓의 갓끈을 모두 잘라 버리도록 해라! 지금 일은 이 자유로운 자리에 후궁들을 들게 한 나의 경솔함에서 빚어진 일이니 불문토록 하겠다.”

장왕은 먼저 후궁들의 마음을 다독여 연회장에서 내보냈고, 모든 신하가 갓끈을 자른 뒤 에야 연회장의 불을 켜도록 했으니 범인이 누구 인지 확인할 수 없었고, 자칫하면 연회가 깨어지고 한바탕 피바람이 몰아칠 수도 있는 상황이 가벼운 해프닝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 시대의 분위기에서 왕의 여인을 희롱한 것은 왕의 권위에 도전한 역모에 해당 하는 불경죄로 죄인은 물론 온 가문이 능지처참을 당할 수 있는 중죄였다. 그렇지만 신하들의 마음을 달래는 치하의 연회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는 실수로 용인한 것이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놀랍게도 그 일이 자신의 경솔함 에서 빚어진 일임을 인정한 것이다.

내가 주목한 것은 이 장왕의 태도이다. 이것은 장왕이 자신에 대한 자존감 (自尊感)이 충만한 사람이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자기 자신을 신뢰하고 균형 잡혀 있는 사람은 사소한 일에 지나치게 분노하지 않는다. 일어난 일을 사실 그대로의 상황으로 보고, 더는 자의적인 확대해석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존감은 자존심과는 다르다. '자존심'은 '나는 잘났다'면서 자신을 지키는 마음이고, '자존감'은 '나는 소중하다'하면서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이다. 이러한 자존감은 전적으로 자기 신뢰에서 나온다.

몇 해 뒤에 장왕의 초나라는 진나라와 나라의 존폐가 달린 전쟁을 치르게 됭다. 그 전쟁에서 장왕이 죽음의 위기에 처했을 때, 장왕의 앞으로 나서서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초나라의 수호신이 되어 온 몸이 붉은 피로 물들며 흡사 지옥의 야차처럼 용맹하게 싸워서 장왕을 구하고 초나라를 승리로 이끈 장수가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장왕은 그 장수를 불렀고 용상에서 내려와 그 손을 감싸 쥐고 공로를 치하하며 목숨을 아끼지 않고 용맹하게 싸운 연유를 물었다. 그 장수는 장왕의 손을 풀고 물러나 장왕에게 공손하게 큰 절을 올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몇 해 전에 있었던 연회 자리에서 술에 취해 죽을 죄를 지은 소신을 폐하께서 살려 주셨습니다. 그 날 이후로 소신은 새롭게 얻은 제 목숨은 폐하의 것으로 생각 하며 살았고, 오늘 이 전장 에서 제 목숨을 폐하를 위해서 바칠 각오로 싸웠습니다.”

​ “절영지회(絶纓之會)”라는 말은 '갓끈을 자른 연회'라는 뜻으로 남의 잘못을 관대하게 용서하고 자신의 허물을 깨우친다는 의미의 고사성어이다. 자기 신뢰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일하야서 길지만 공유한다.

미국 초월주의 사상가인 랄프 왈도 에머슨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 자신을 신뢰하십시오. 모든 심장은 당신의 강철 현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전율합니다. 이 세상에 어떤 것도 당신의 마음의 고결함보다 거룩한 것은 없습니다." 문제는 리더가 자신의 거울을 보고 '나는 나를 믿을 수 있다'고 고백할 수 있느냐다. 리더인 척 하는 사람들은 대중에게 아부하고 그들의 인정이 자신이라고 착각한다. 그런 리더는 언제든지 무대에서 쫓겨날 수 있는 꼭두각시일 뿐이다.

(3) 11행-15행.
그날 아침, 내 앞에는 두 개의 길이 있었다.
낙엽엔 발자국이 찍혀 있지 않았다.
아, 나는 돌아올 다른 날을 위해 첫 번째 길을 남겨 두었다.
그러나 그 길이 또 다른 길로 이어져 있었기에
내가 돌아올 것임을 짐작하고 있었다.

리더는 오랫동안 갈고 닦은 심오한 안목을 통해, 누구도 발견할 수 없는 제3의 길을 제시한다. 남들이 가본 적이 없는 길이다. 그가 그 길로 들어선다고 해도, 흔적도 남기지 않을 초행길이다. 그는 마침내 결정한다. 자신의 양심이 말하는 그 길로 들어설 것이라고, 그는 새벽 여명에 일어나 마침내 그 길로 들어선다.

배철현교수는 자신의 책, <배철현의 위대한 리더>에서 "자신에게 리더인 사람이 리더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리더의 4 가지 덕목으로 카리스마, 자비, 안목 그리고 원칙을 리더가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선정하였다. 나는 위대한 리더를, 내가 꿈꾸는, '위대한 개인'으로 바꾸고 싶다. 몇 년 전부터 나는 '위대한 개인'이 위대한 사회'를 만든다고 믿고, 인문운동 활동을 하고 있다. 한 장 한 장의 단단한 벽돌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웅장한 건물이 설 수 없듯이, 위대한 개인이 존재하지 않으면 위대한 사회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단단한 벽돌과 같은 '위대한 개인'은 매순간 자신을 독수리의 눈으로 관조하고, 자신이 미래에 이루어야 할 임무를 찾아, 지금 이 순간 자신의 혼과 열을 다해 최선의 경주를 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매일 아침 인생의 초보자가 되고, 오늘은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사는 사람이다.

(4) 16행21행
세월이 한참 흐른 뒤,
나는 한숨 지으며 말하리라.
"두 개의 길이 하나의 숲에서 갈라져 있었지.
나는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은 길을 택했지.
그리고 그것이 내 인생을 바꿨지."

자신이 선택한 길은 종말론적이다. 우리가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은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 인간의 삶을 조절하는 시간과 시간이 만들어낸 장소를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소아시아 에베소 철학자 헤라클리토스는 "만물은 강물처럼 다시는 담을 수 없이 항상 변한다"고 선언했다. 그러기에 인간의 삶은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되돌릴 수 없다. 그런 삶을 깨달은 자는 자신이 지금 걸어가고 있는 그 지금-여기를 '도'(道)라고 여긴다. 그런 삶을 구가하는 사람은 먼 훗날 그렇게 말할 수 있다.

헤라클리토스는 '눈물의 철학자'로 불린다. 혼자 세상의 원인을 고민하느라 늘 '인상을 쓰며' 혼자였고, 그는 자연 법칙 네 가지를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1) 자연은 숨기를 좋아한다. 내 방식대로 말하면, 자연은 말이 없다. 즉 설명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에게 자연은 discovery(발견)의 대상이다. (2) 자연은 양면성이 이다. 오르막 내리막 모두 같은 길이다. 자연은 대립면의 꼬임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역』에서 말하는 음과 양의 대립, 노자가 말하는 무와 유의 대립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노자는 이것을 "유무상생(有無相生)'이라고 한다. (3) 같은 강물에 두 번 빠질 수 없다. 잘 알려진 라틴어 문장이다. Panta chorei ouden menei. 모든 것은 변하고 그대로만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영어로 말하면 이렇다. Everything changs, and nothing remains still. (4) 모든 것은 원리(logos)가 있다. 자연 현상은 원인에 의해 나타난다. Natura non facit saltum. 자연은 비약하지 않는다. 자연은 점프하지 않는다. 자연의 작용은 연속적이다. 영어로는 이렇게 말한다. Nature makes no leap.

매일 공유하는 시 대신, 오늘은 이 시를 다시 한번 전문으로 읽어 본다.

가지 않은 길/프로스트

두 개의 길이 노란 숲에서 갈라져 있다.
둘 다 갈 수 없어 섭섭했다.
하나만을 가야 했기에 한참을 서 있었다.
나는 볼 수 있는 데까지 내려다보았다.
길이 덤불로 굽어져 가는 곳까지

나는 똑같이 좋아 보이는 두 개의 길 가운데 하나를 택했다.
그 길이 더 나은 선택이라 여겼다.
풀이 많고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 길로 간다 해도
별다른 흔적이 남지 않을 것이었다.

그날 아침, 내 앞에는 두 개의 길이 있었다.
낙엽엔 발자국이 찍혀 있지 않았다.
아, 나는 돌아올 다른 날을 위해 첫 번째 길을 남겨 두었다.
그러나 그 길이 또 다른 길로 이어져 있었기에
내가 돌아올 것임을 짐작하고 있었다.

세월이 한참 흐른 뒤,
나는 한숨 지으며 말하리라.
"두 개의 길이 하나의 숲에서 갈라져 있었지.
나는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은 길을 택했지.
그리고 그것이 내 인생을 바꿨지."

글이 너무 길어 읽고 싶은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는 듯 해서, 이어지는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로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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